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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227화 (227/234)

120. 함께하는 이유

대앵, 댕.

에스피디 제도 광장에서도 중앙. 가장 높은 첨탑 위에 달린 육중한 종이 무거운 소리를 내었다.

국혼을 앞두고 축제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었다.

평소 울리는 법이 없는 종소리가 울린 이유를 에스피디 제국의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었다.

상자를 옮기던 남자 하나는 황궁이 있는 방향을 보며 말했다.

“오늘이던가?”

“아, 그렇네. 그 황녀 사칭범의 참수형이 있다고 했지, 참.”

“쯧, 폐하를 독살하려고 한 것치고 너무 자비로운 처사가 아니던가.”

혀를 끌끌 차던 사람들은 한때 아름답다고 찬양받던 아셀리의 몰락을 보기 위해 바삐 걸음을 움직였다.

카르벨이 즉위한 뒤, 연관된 많은 가문들이 재산을 몰수당했다.

적극적으로 아셀리를 도운 이들은 작위를 박탈당하였으며, 그보다 변변치 못한 죄목을 가진 이들은 그들이 가진 재산으로 뒷골목을 양지로 끌어올리라는 명을 받았다.

어떻게든 새 황제에게 잘 보여 작위라도 건져보고자, 귀족들은 자발적으로 빈민 구호에까지 돈을 쏟아붓고 있는 실정이었다.

덕분에 평민들의 삶은 이전보다 윤택해지고 있었다.

“이번에 자네 딸도 아카데미 입학장이 왔다며. 보낼 생각인가?”

“보내야지! 지원하는 사람은 모두 무상이라는데, 이때가 아니면 언제 가겠나.”

“하기야. 높으신 분들께서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각자 자식들의 꿈을 자랑하느라 광장에는 미세하게 들뜬 기운이 가득했다.

그런 바깥과 달리, 메티카 감옥은 살벌하기만 했다.

메티카 감옥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독방에는 실력이 좋은 황실군이 지키고 서 있었다.

이전과 달리 초췌하고 피폐한 얼굴로 앉아 있는 아셀리의 모습에서는 아름다웠던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뚜벅, 뚜벅. 지하 감옥에 낯선 발소리가 울리고, 누군가가 그녀에게 닥칠 운명을 전했다.

“곧 형을 집행할 것이니 죄인을 끌고 나와라.”

“예, 알겠습니다.”

답이 끝나기 무섭게 철컹, 굳게 닫혀 있던 철창이 열렸다.

기사들은 거칠게 아셀리를 일으켰다.

손발에 묵직하게 매여진 쇠줄에 쓸린 피부가 아파 왔으나, 아셀리는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죄인 같은 소리 하네.”

그녀의 자그마한 음성에 옆에 있던 기사가 짐짓 엄한 음성으로 그녀를 나무랐다.

“재갈을 물리기 전에 죄인은 입을 다물어라.”

“너는 이런 삶이 좋니? 고작 죄인을 끌어가고 지키는 삶?”

기사가 뒤를 따르던 이들에게 눈짓을 주자 간수 중 하나가 빠르게 재갈을 가지러 뛰어갔다.

그 틈을 타 아셀리는 속살거렸다.

“생각해봐. 가질 수 없는 걸 조금만 양심을 버리면 가질 수 있다고. 다들 아닌 척 제 이득을 위해 눈을 감고 살잖아?”

“시끄럽다! 죄인은 법을 어겼으며 선황제 폐하를 해하려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이다.”

“하하, 있잖아…….”

아셀리의 눈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접혀들었다.

흐트러진 모습조차도 고고한 그녀의 입에서 독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희망조차 없는 밑바닥에서는 공명정대한 방법으로 절대 올라올 수 없어.”

일순 웃음기가 사라진 그녀의 표정에서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최악을 보지 못한 네놈이야말로 어쭙잖은 착한 척 그만둬. 역겨우니까.”

퉷, 아셀리는 침을 뱉어냈다.

안타깝게도 며칠을 제대로 먹질 못한 탓인지 타액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사는 소름이 돋았는지 턱을 씰룩이고는 강제로 그녀를 끌고 나갔다.

길고 긴 복도를 지나고 문이 열리자, 환한 빛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멀었던 시야에 초점이 맞춰졌을 때. 눈앞에 보인 것은 수많은 관중이었다.

무수한 눈빛 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느껴졌다. 안타까움, 분노, 호기심.

형이 집행되는 중앙으로 가려고 할 때, 인파를 뚫고 베오가 튀어나왔다.

“잠깐만, 아셀리! 잠깐만!”

기사들이 막아서려 했으나, 위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마지막 길인데 친우 정도는 보게 해요.”

엘로니아의 자그마한 음성과 동시에 카르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알아들은 기사들이 베오를 통과시켜주자, 그는 꾸벅 감사 인사까지 건넨 뒤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신발 하나는 어디에 버린 것인지 짝짝이에, 지푸라기 같은 머리는 한층 더 지저분하게 뻗쳐 있었다.

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아셀리를 보며 말했다.

“아셀리, 아셀리……. 차라리 빌지 그랬어. 정령사님께라도 빌면 봐주셨을지도 모르잖아.”

역시 베오는 멍청하다. 황제를 독살하려고 한 이를 봐줄 거라 생각한다니.

순진해서 황실에 전부 고해바친 걸까. 그는 다른 죄인들과 달리 자유로워 보였다.

아셀리는 조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베오. 남자가 야망이 고작 그것밖에 안 돼?”

“지금이라도 빌자. 전부 내놓고 에스피디에서 추방은 당하겠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게 어디야.”

“추방당하면. 나는 땅 파먹고 사니?”

“내가 따라갈게.”

베오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제야 얼마나 운 것인지 퉁퉁 부은 눈두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네가 하라는 거 다 할게. 황궁처럼 대단한 저택이랑 음식은 못 해 주지만, 그래도……. 노력할게. 그러니까 죽지 마.”

우습다.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이가 있었다니.

멀쩡한 자신조차 내던져 같이 추방을 당하겠다고 하는 저 순진한 생각이 아셀리의 심장을 따끔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에게 아셀리는 환하게 웃어 주었다.

아마도 어릴 적을 제외하고는 처음인 것 같았다.

어색한 듯 경련이 이는 얼굴 근육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겠지.

기대감 서린 표정으로 보는 베오에게 아셀리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를 제일 먼저 죽였어야 했는데.”

“뭐……?”

뒷골목의 진창 속에서도 그녀를 도왔던 이는 베오 한 사람뿐이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그녀를 찾을 때면 대신 앞을 막아주던 어린 베오가 떠올랐다.

그 험한 곳에서 도망쳐 나온 주제에 그는 이렇게나 철이 없었다.

자신 같으면 죽이고 싶었을 제 아버지도 그는 그저 조용히 넘어갈 뿐이었다.

너무 멍청하지 않은가. 그래서였다.

멍청하게 잊을 수 있는 베오 그 자체가 부러웠고,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

자신을 아는 모든 뒷골목 이들을 죽였는데도 그 하나만은 도저히.

“그러니까 미련 두지 마.”

아셀리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그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단상으로 향했다.

우스운 건 베오가 아닌 자신이었다.

‘너처럼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나 남은 양심이 그를 살려두었고, 그녀의 죽음을 슬퍼해 주는 단 한 사람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된 걸까.

아셀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가져다 대었다.

욕심이 조금만 적었어도, 아니. 두 사람 중 누군가 하나의 상황이 처음보다 나았으면 어땠을까.

베오의 아내로 혹은 좋은 친구 사이로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권력에 모든 것을 불 싸지른 자신보다 베오가 더 현명하고 강한 걸지도 모르겠다.

죽을 때가 되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제야 후회가 드는 걸 보니.

아셀리는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집행!”

집행인의 음성이 울렸고, 그곳에서 아셀리는 생을 마감했다.

***

에스피디의 제도로 타국에서 물밀듯이 방문객이 밀려들었다.

그중 단언 가장 화려한 마차는 아무래도 라티에 왕국에서 온 마차였다.

하얀 백마가 줄을 잇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신부 대기실 창문으로 정문을 지켜보던 에이미는 이를 확인하자마자 펄쩍 뛰며 외쳤다.

“라티에 왕국에서 왕비님이 방문하신 것 같아요!”

“뭐? 지금 나가야 하나?”

엘로니아는 다급하게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움켜쥐며 되물었다.

그러자 다른 시종이 부랴부랴 그녀를 말렸다.

“아, 안 됩니다! 절차상 식전에는 폐하께서 보시면 안 돼요!”

“그, 그럼 왕비 전하께서 오신 건 어떡해?”

“폐하께서 잘 응대하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엘로니아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님프는 양손으로 열심히 꽃을 흔들어 댔다.

긴장을 풀라는 무언의 응원인 모양이었다.

‘어째 더 떨리는 기분이지만…….’

기꺼이 화동을 자처한 정령들이었으나, 슬프게도 엘로니아를 제외하고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덕분에 공중에 휘휘 떠다니는 꽃을 보고 한동안 시녀들이 겁을 먹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저기……. 정령사님, 죄송한데 정령님들께서 꽃을…….”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꽃으로 점을 치고 계시는데요…….”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곤혹스러워하는 시녀의 뒤로 닉스가 신나게 프리지아 한 송이를 해체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엘로니아 옆에 장미를 뿌린다, 프리지아를 뿌린다, 장미를…….]

“닉스! 꽃에 그러면 못 써!”

엘로니아가 짤막하게 외치자 닉스는 입을 삐죽이며 답했다.

[하지만 봐. 장미를 뿌리면 냄새가 역하고, 프리지아를 뿌리면 이것도 향이 별로잖아!]

“향은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밖에 나가면 탁 트인 공간에서 다 날아갈 거야.”

[아, 싫은데.]

입을 삐죽 내민 닉스는 짜증난다는 듯이 대충 점을 치던 꽃을 팽개쳐버렸다.

시녀에게 꽃을 너무 많이 주지 말라 지시하려고 고개를 돌린 찰나.

라티에 왕비와 눈이 마주쳤다.

“어……, 전하?”

“노크를 했는데 못 들은 모양이구나.”

“아, 죄송해요. 너무 경황이 없어서요.”

“아니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널 낚아챈 카르벨이 문제지.”

이제는 한 제국을 다스리는 위치가 되었거늘, 그녀에게는 아직도 한낱 조카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본 엘로니아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와 두 손을 잡았다.

“내가 카르벨이 별로면 도망치라고 리프리에게 언질까지 따로 주라고 했는데. 협박을 하든? 아니면 목에 검이라도 들이대던가?”

“아, 아니에요! 청혼은 평범했어요.”

“그래? 걔가 그런 성격이 아닌데…….”

처음 메티카에서 했던 청혼이 설마 그의 성격에 알맞은 장소였단 말인가.

조심스럽게 라티에 왕비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의 눈에는 장난기와 함께 따스함이 묻어 있었다.

“나도 멋있는 조카며느리를 얻었구나. 언제든지 찾아오렴.”

정말로 기뻐 보이는 모습에 엘로니아는 괜한 쑥스러움이 밀려왔다.

순간, 맞춘 것처럼 바깥에서 웅장한 나팔 소리가 창공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음악대의 경쾌한 소리는 곧 식이 거행된다는 뜻이었다.

부랴부랴 에이미가 쥐여 주는 부케를 들고, 데드 경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붉은 융단이 끝없이 펼쳐진 곳을 따라가자, 그 끝에는 카르벨이 있었다.

정복을 차려입고, 잘 넘긴 머리. 그리고 굳게 닫힌 채 휘어진 입매까지.

늘 매서웠던 눈매도 오늘만큼은 조금 유해 보인다면 착각일까.

카르벨은 정중히 엘로니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옆에 세웠다.

주례를 맡은 대신관이 조용히 물었다.

“카르벨 헤일튼 에스피디와 엘로니아 데브니는 서로를 평생 사랑할 것을 약속합니까.”

“약속합니다.”

“네, 약속합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하는 말이 묘하게 창피해 그에게 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카르벨은 그럴 때마다 아프지 않게 꽉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럼 맹세의 입맞춤을.”

대신관의 안내에 따라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을 때.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온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아, 결혼 선물을 준비했는데. 이제 데브니 남작가는 당신 거야.”

“……네?”

“남작가에 남아 있는 이들 전부 작위를 박탈해버렸거든.”

그는 자랑스럽게 미소를 지은 뒤 입을 맞췄다.

당황한 그녀가 그의 어깨를 쥐었다.

‘세상에, 결혼식을 올리는 지금. 이런 걸 선물이라고 전해 주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그녀의 뒤로 열심히 꽃을 뿌리는 정령들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었다.

엘로니아의 맞닿은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어쩌겠는가. 자신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것을.

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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