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결혼식 준비
즉위식이 끝난 뒤, 엘로니아의 거처도 황궁으로 옮겨졌다.
여유도 잠시였을 뿐. 아셀리의 처분과 빠르게 이뤄진 즉위식 탓에 미뤄두었던 일들이 몰려드는 모양이었다.
서둘렀다고 하더니, 정말 최소한의 것들만 처리한 뒤 식을 거행한 눈치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 수가 없어……!’
혼인식을 준비하는 것도 차원이 다르게 느껴졌다.
덕분에 에이미를 비롯해 몇몇 시녀들 역시 그녀를 따라 입궁할 수밖에 없었다.
“어휴, 궁이 얼마나 한산한지 몰라요. 인수인계도 제대로 안 되어서 재봉사 하나 부르는 것도 한세월이 걸리는 줄 알았다니까요.”
“오늘 예정대로 온다고 해?”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예요. 입궁하는 것부터 아주 바늘 하나 다 검사해서 빼앗아가는지 말도 아닌가 봐요.”
혼인식을 준비하느라 유독 바빠진 에이미는 입술을 내민 채 불평을 내뱉었다.
카르벨이 즉위한 뒤, 많은 시녀와 하녀들을 내보냈다.
오랜 시간 황궁에서 하녀에서 황비의 전담 하녀로, 전담 하녀에서 아셀리의 유모로 지낸 이가 메티카 감옥에 갇혀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모르는 사람이 궁 안에 없을 리 없었고, 아셀리 역시 하나뿐인 황손으로 지냈던 터라 연계된 이가 많았다.
엘로니아는 수북하게 쌓인 서신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를 집어 드니, 어디서 많이 본 가문들의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이제는 보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훤히 알고 있었다.
‘아셀리의 만행을 고발하거나, 아셀리의 측근이라고 생각하는 가문을 고발하거나 혹은 연회 초대장이겠지.’
카르벨은 생각보다 잔혹한 면이 있었다.
아셀리가 메티카에 수감 되면서 끝이 난 줄 알았더니, 연관된 귀족부터 평민까지 싹 잡아들이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들려왔다.
그러다 보니 애매하게 엮인 이들이 살아남을 방법은 고발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감형받아야 할 테니까.’
이런 서신에 카르벨은 답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엘로니아에게까지 서신이 몰리는 중이었다.
일부는 과거까지 내보일 수 있다며 정령사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하기까지 했다.
선물도 어찌나 휘황찬란한지,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쌓인 편지들을 건성으로 보며 에이미에게 물었다.
“카르벨은?”
“오전부터 알현이 줄을 이어서 바쁘신 모양이세요. 그래도 오후에는 꼭 오시겠다고 신신당부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에이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가 들렸고, 잔뜩 지친 얼굴로 재봉사가 들어왔다.
그녀의 뒤로 무수히 많은 드레스가 하인들의 손에 들려 들어왔다.
재봉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긴장한 듯 말했다.
“일전에 맡겨주셨던 드레스 중에 가장 선호도가 높았던 디자인을 바탕으로 준비했습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 주시옵고…….”
그가 설명을 하는 사이, 바짝 군기가 든 하인들이 엘로니아가 보기 좋게 옷을 마네킹에 걸었다.
화려한 레이스부터 다이아를 흩뿌리듯 한 땀 한 땀 박아넣었다는 원단. 실크에 주름을 넣은 상의.
평소 너무 화려한 옷은 잘 찾지 않는 엘로니아의 눈에는 거기서 거기로 보였다.
하지만 에이미는 아닌 모양이었다.
“엘로니아 님. 제가 감히 의견을 드리자면, 3번 드레스와 5번 드레스. 11, 13, 19, 26번까지 시착해보시는 건 어때요?”
“너무 많지 않아……?”
“마차를 타고 행렬까지 하실 텐데, 최고로 아름답게 보이셔야죠.”
혼인식이 끝나면, 마차를 타고 제국민들이 모두 볼 수 있게 행렬을 해야만 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철저한 에이미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보통 이런 건 양 가문의 어르신들이 와서 보셔야 하는데, 저희는 아니잖아요. 누가 흠을 잡기 전에 완벽하게 해야죠.”
헤일튼가도 어른이라 불릴 사람이 없었고, 엘로니아 역시 와 줄 사람이 없었다.
그간 에이미가 왜 그리 평소보다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 듯싶었다.
순간 마음 한구석이 고마움으로 물러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를 어디선가 들었는지 엘로니아의 눈앞에 물방울이 모이기 시작했다.
곧 모인 물방울 속에서 잔뜩 화가 난 닉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누가 엘로니아 보고 옷이 구리대?!]
엘로니아가 무어라 답을 하려고 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포르르 그녀의 정수리 위에 앉으며 말했다.
[뭐, 패션 센스는 좀 구리기는 하지만 뭐 어때. 뛰어난 안목, 탁월한 센스를 지닌 이 닉스 님이 있다면 엘로니아도 패션 선두주자가 되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나빠지는 터라 엘로니아는 그냥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그녀가 상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에이미는 의욕적으로 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엘로니아 님. 제가 영혼을 팔아서라도……!”
“아니야……. 영혼은 팔지 마. 그냥 입을게…….”
결국 그녀를 생각하는 이들 앞에서 물러서야 하는 사람은 엘로니아일 수밖에 없었다.
다급하게 그녀를 말렸으나, 말려질 턱이 없었다.
네 번째 드레스를 입을 때쯤. 엘로니아는 슬슬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오, 이번 드레스는 괜찮은데?]
“아까도 그 얘기 하지 않았어?”
[다 하얀 걸 어떡해. 내 눈에는 다 비슷해 보인단 말이야. 드레스가 어떻게 푸른색이 아닐 수가 있냐고!]
“파란색 드레스면 눈에 띄기는 하겠네.”
드레스 선택에 큰 도움이 안 되는 닉스를 두고 엘로니아는 하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복을 하느라 가려둔 커튼이 열리자, 앞선 드레스 시착과 달리 고요함이 느껴졌다.
소파에 앉아, 정면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카르벨 탓이리라.
순간 놀란 엘로니아는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카, 카르벨. 언제 왔어요?”
“재봉사가 입궁했단 소식을 듣자마자. 급한 일을 끝마치느라 조금 늦었군.”
그가 고개를 까닥이자, 환복을 돕던 시종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다들 잔뜩 얼어서 카르벨의 눈치만 살피는 것이 영 이상했다.
엘로니아는 그들이 나간 문을 보며 의문스럽게 되물었다.
“뭐지. 시종들이 방금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글쎄. 잘 모르겠군.”
카르벨은 그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몸을 일으킬 뿐이었다.
그는 정중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혼자 보느라 마음 상했겠어.”
“그런 것보다는 에이미랑 닉스가 좀…….”
깐깐해서요.
엘로니아는 차마 뒷말을 뱉을 수 없었다.
특히 그녀의 옆을 날아다니며 잔뜩 날이 선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는 닉스 때문에 더더욱.
[시커먼 놈이 무슨 드레스를 볼 줄 안다고. 나랑 엘로니아랑 잘 고르고 있었는데 말이야, 엉?]
시비를 걸듯 그의 앞을 알짱거리기까지 했다.
엘로니아는 애써 모른 척 카르벨의 부축을 받아 낮은 단상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드레스는 재봉사가 워낙 실력이 좋아서 그런지 다 좋다고 해서요. 아무거나 골라 입어도 되겠어요.”
엘로니아는 옷매무새를 만져주던 하녀가 없어 걷는 게 불편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진 그녀는 그냥 달랑, 두 팔로 드레스 밑자락을 올려 들었다.
그러고는 소파에 쓰러지듯 털썩 앉고 말았다.
“아, 힘들어요. 그냥 이걸로 끝내고 싶은데. 카르벨도 봤으니 괜찮죠?”
카르벨은 그녀의 옆에 앉으며 짧게 침음을 흘렸다.
“음.”
“왜요? 별로라도 어쩔 수 없어요. 이건 카르벨이 늦은 탓이고, 어차피 입는 건 저니까 제가 결정해야겠어요.”
안 그러면 오늘 하루를 드레스를 입는 데만 소요하게 생겼다.
결혼이 중대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엘로니아의 단호한 답에 카르벨의 눈매가 미세하게 접혀 들었다.
“예뻐.”
“……네?”
순간 엘로니아는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움찔거리며 조용히 고개를 돌리자, 그녀를 또렷하게 응시하고 있는 그가 보였다.
그제야 그의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듯싶었다.
조금 부끄러워진 그녀가 슬쩍 눈동자를 아래로 움직여 피하자, 그는 정말로 기쁜 듯 말을 이었다.
“식을 치르면 그대가 내 곁에 머무를 거라고 생각하니까 기다리기 힘들더군.”
커다란 그의 손이 엘로니아의 약지를 살살 쓸었다.
그가 즉위식에서 끼워준 반지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카르벨은 그녀의 손을 들어 손등에 지그시 입술을 눌렀다.
“엘로니아.”
입술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피부 결을 타고 느껴졌다.
왜인지 간지러운 기분에 엘로니아는 손을 움찔거리며 답했다.
“그, 소, 손은…….”
“엘로니아.”
손을 가볍게 얽은 그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낮게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와 아무도 없는 고요한 드레스룸.
그제야 엘로니아는 그가 이 넓은 곳에서 한 번도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화려한 드레스가 있어도, 그녀가 무슨 옷을 입어도 그의 시선은 오롯하게 엘로니아를 향해 있었다.
“엘로니아.”
그의 입술이 살짝 열이 오른 엘로니아의 뺨을 찾았다.
기울어진 그림자가 그녀를 가리듯 감쌌다.
엘로니아는 한쪽 눈을 작게 감았다 뜨며 답했다.
“드, 드레스가 망가져요. 행렬도 해야 한다면서요. 오랫동안 입고 있어야 하는 걸까요?”
회피하려는 듯이 묻는 말에 그의 짓궂은 표정이 얼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어차피 축제도 열릴 테고. 다들 즐기느라 바쁘겠지.”
“원래 국혼에 축제까지 열리나요?”
“평소는 아니지만, 요즘 분위기를 보아서는 축제라도 열려야 환기가 될 듯싶어서.”
아무래도 궁 안의 흉흉한 분위기를 말하는 듯했다.
이 와중에도 거기까지 생각한 그가 얄미워서 엘로니아는 샐쭉하게 답했다.
“제 결혼식이 그렇게 이용당하는 거예요?”
그녀의 질문이 의외였는지, 그가 잘게 입을 맞추다 말고 잠시 멈췄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크게 웃음을 터트린 그는 기폭제라도 된 것처럼 엘로니아의 볼에 입술을 비비며 말했다.
“그럴 리 없잖아. 누구보다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싶어서 그래.”
그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다정히 엘로니아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부정적인 감정보다, 그대와의 결혼은 모두가 축하했으면. 그런 날로 기억했으면 해서.”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제 투정이 너무 어리게만 느껴졌다.
그 때문에 그리도 바빴던 거구나.
저도 모르게 쌓여 있던 감정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한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카르벨은 입술을 머금은 채 고개를 내렸다.
짧게 입을 맞춘 그의 숨결이 뜨거웠다.
회색빛 눈동자에 잠시 이채가 서리는 듯하더니, 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드레스. 조금 망가져도 되나.”
“……네?”
“많이 마음에 들었어?”
“아니, 뭐. 또 그렇게까지는 아니…….”
엘로니아의 뒷말은 곧 카르벨의 입 속으로 삼켜졌다.
풀썩, 가볍게 소파에 등을 기댄 엘로니아는 그제야 그가 한 질문의 의도를 깨닫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