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청혼
카르벨의 명령이 떨어지고 정적이 흘렀다.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한둘씩 고개를 숙인 뒤 빠른 속도로 그레이트 홀을 빠져나갔다.
술렁이던 홀 안이 서서히 비워질수록,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하인들까지 머뭇거리며 사라졌다.
엘로니아는 순식간에 줄어드는 인파에 눈짓으로 리프리를 찾았다.
‘리, 리프리 저하. 살려주세요!’
평소와 다른 분위기의 카르벨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 곁에 있어야 용기가 날 것 같았다.
황실의 인장이 자수 놓은 제복과 잘 넘긴 머리, 황궁.
이 모든 조합이 엘로니아에게는 낯설기만 한 것들이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리프리에게 닿지 못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는 태연하게 인사를 건넨 뒤, 엘로니아를 향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마치, 복도를 거닐면서 라티에 왕국으로 도망쳐도 된다는 말을 잊지 말라는 듯이 말이다.
이를 지켜보는 엘로니아의 심장이 더욱 불안감으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망명을…… 준비해야 하는 정도야?’
짚이는 부분은 많았다. 이제 더 이상 정령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 사실 하나만으로 엘로니아는 망망대해에 홀로 떨어진 것처럼 불안했다.
그래서 에이미가 죽어라 치장에 공을 들인 걸지도 모른다.
그녀를 잘 좀 봐달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에이미, 틀렸어……. 카르벨은 외모 따위에 넘어갈 만큼 관대한 사람이 아니라고…….’
리프리를 마지막으로 그레이트 홀에는 카르벨을 제외하고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고요한 홀 안은 엘로니아의 심장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엘로니아가 먼저 말을 걸 수도 없었다.
이제 그는 전처럼 편하게 먼저 찾아갈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 만에 카르벨의 입이 열렸다.
“엘로니아.”
“네, 네, 전하. 아니, 폐하.”
하필 목소리가 떨릴 건 또 뭐람. 호칭 실수는 또 뭐고.
엘로니아는 민망함에 티 나지 않게 잇새를 깨물었다.
고개를 숙인 채 얌전히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어째서인지 낮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도저히 적막감을 참지 못한 그녀가 슬쩍 고개를 들었을 때.
희한하게도 원로회에서조차 웃던 카르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저런 표정을 엘로니아는 본 적이 없었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짜증이 난 것도 아니다.
매서운 눈매 속 눈동자가 또렷하게 엘로니아만을 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엘로니아는 팍, 빠르게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러자 머리 위로 그의 낮은 한숨이 내려앉았다.
“하…….”
동시에 그의 한쪽 무릎이 굽혀졌다.
무슨 상황인지 그녀가 인식하기도 전에 아래를 향하던 시야 안으로 카르벨이 보였다.
여전히 굳은 얼굴은 조금 전과 달리, 엘로니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피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시간을 길게 끌 걸 그랬어.”
조금 씁쓸한 미소와 함께, 그의 손에 들린 붉은 케이스가 열렸다.
그는 한 손에 케이스를 올린 뒤, 열린 모습 그대로를 그녀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엘로니아 데브니. 그대가 나와 결혼해주기를 간청한다.”
순간, 현실감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엘로니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어떤 답도 내뱉지 못했다.
그 사실을 오해한 것인지, 카르벨이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알아. 그대가 언제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쯤은.”
그가 든 케이스 안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영롱한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황궁의 화려한 샹들리에 빛에 반사되어 여러 가지 색으로 빛이 났다.
그 반지를 멍하니 보고 있자, 카르벨이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그래서 서둘렀다. 되도록 빠르게 그대가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려면 헤일튼가보다는 앞으로 지내야 할 황궁이 나을 테니까.”
그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한 적이 있던가.
그제야 엘로니아는 그가 긴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태 한 번도 겁을 먹거나 긴장한 적 없는 그가, 고작 프러포즈를 앞두고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방울져 엘로니아의 마음 한구석에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이제 정령이 보이지 않아요.”
“상관없어.”
“화, 황궁의 일도 잘 모르고…….”
“내가 할 일이다.”
계속되는 엘로니아의 말을 가볍게 잘라버린 카르벨이 단호하게 말했다.
“난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같이하길 청하고 있는 거야.”
아, 그래.
서서히 퍼진 감정이 어느새 북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엘로니아는 조금 시큰거리는 눈을 깜빡이며 카르벨과 시선을 맞췄다.
손을 뻗은 그녀는 반지 케이스를 잡을 듯 말 듯 망설였다.
그러자 카르벨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그녀의 손에 케이스를 쥐여 주었다.
“다른 이유는 필요 없어. 엘로니아, 나와 함께 평생을 해주겠나.”
한 방울,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 엘로니아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엘로니아의 답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굳어 있던 입매가 크게 호선을 그렸다.
곧 천천히 다가온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히 물었다.
“대체 왜 우는 거야. 싫으면 지금이 기회야. 라티에 왕국 말고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줄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바짝 몸을 붙여오는 모양새가 쉽사리 갈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그간 했던 괜한 생각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냥…… 카르벨은 이제 제가 필요 없지 않을까 했거든요.”
“사랑한다는 말이 모자랐나 보군.”
그가 눈매를 접어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사랑해.”
조용히 그의 고개가 내려앉았다.
입술 위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짧은 입맞춤과 함께 잠시 떨어진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닿을 듯 가까이 보였다.
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기도 전, 카르벨의 고개가 다시 기울었다.
조금 더 깊게 숨결이 뒤섞이자, 엘로니아는 두 팔을 벌려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이따금 호흡이 거칠어질 때면, 카르벨은 아주 짧게 숨 쉴 틈을 내주었다.
얼굴에 미미하게 열이 올라온 것이 느껴졌으나, 카르벨은 그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 뺨에 잘게 입을 맞춘 뒤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익숙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뭐야, 놔요! 놓아 달라고! 저 인간이 엘로니아를 잡아먹잖아!]
닉스의 음성에 엘로니아는 본능적으로 카르벨을 밀어냈다.
하지만 카르벨도 들은 것인지, 그 역시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르벨의 어깨 뒤로 보인 것은 어른이 되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이프리트와 그의 손에 눈이 가려진 닉스와 노움, 님프였다.
그의 손에서 시야가 가려진 채 닉스는 바둥거리고 있었다.
[빨리 놔줘요! 엘로니아는 아기라고!]
[누가 아기라는지 모르겠군. 너도 한낱 자연 앞에서는 아기인 것을.]
온화한 말과 달리 잔뜩 질색하는 얼굴로 이프리트는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황한 엘로니아는 카르벨에게서 빠른 속도로 떨어지며 물었다.
“이, 이프리트. 어, 어떻게 들어왔어요? 아니, 언제부터 있었어요? 어디서부터 봤어요?”
[아마도 저 시커먼 인간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처음부터 다 봤다는 뜻이잖아!
엘로니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조금만 건드리면 펑 하고 터질 것처럼 얼굴이 뜨거웠다.
창피해서 누군가 틈만 내주면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차라리 카르벨이라도 안 보였다면 저 혼자 알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보셨다니, 기척이라도 내주셨다면 환대해드렸을 텐데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카르벨은 아주 태연하게 그들과 대화까지 나누고 있었다.
전부 다 들었다는 소리였다.
이프리트는 창백한 얼굴로 당장이라도 오만상을 찌푸릴 듯 카르벨을 노려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네 선조 놈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
“선조라면, 헤일튼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초대 황제. 그도 정령사의 도움을 받아 에스피디를 건국한 뒤, 네 놈처럼 굴었지.]
그는 보란 듯 혀를 차며 정령들을 막고 있던 손을 풀었다.
동시에 팍, 하고 빠른 속도로 엘로니아에게 닉스가 안겨들었다.
[엘로니아! 이제 내가 보이지? 나랑 님프랑 노움이 보고 싶다고 이프리트 님을 엄청 괴롭혔어!]
닉스가 자랑하듯 하는 말에 님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에 이프리트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아주 골치가 아팠습니다, 정령사여. 틈만 나면 정령들이 제게 물을 뿌리거나 제 불의 능력 앞에서 고구마와 감자를 굽는 등. 다양하게 사고를 쳤습니다.]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그래도 다시 닉스와 아이들을 보게 되니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숨길 수 없는 기쁨으로 그녀의 입꼬리가 애매하게 씰룩이자, 이프리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정령사란 본디 정령과 가장 친화적인 자. 정령들이 이토록 정령사를 따르니 일찍이 다시 능력을 되찾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엘로니아는 그들과의 재회에 기쁜 듯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기고만장해진 닉스는 고개를 치켜들며 거만하게 말했다.
[이 닉스 님이 말이야. 엘로니아 몸에 자꾸 이상한 향을 뿌려대기에 다 없애버렸지. 분명 날 보지 못하니까 엘로니아가 도움을 청하지 못한다고 딱 생각했지!]
“잘했어. 역시 닉스일 줄 알았어.”
엘로니아의 칭찬에 기쁜 듯 닉스는 허공을 빙글빙글 돌았다.
님프와 노움도 앞다퉈 자신의 업적을 자랑했다.
이런 와중에도 이프리트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정령의 앞에서 혼인을 약속하셨습니다. 확실하십니까.]
“응.”
엘로니아는 활짝 웃으며 기쁜 듯이 답했다.
카르벨이 들고 있는 반지에 호기심을 보이는 님프 탓일까.
그는 반지를 꺼내어 엘로니아에게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자, 반지가 그녀의 약지에 딱 맞아떨어졌다.
카르벨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맞춘 뒤, 이프리트에게 말했다.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하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정령왕.”
덕분에 이프리트의 얼굴이 더욱 오만상으로 구겨졌다.
[알고 있기에 모습을 보였다, 인간 황제여. 선조 때부터 내 심기를 거슬리게 만드는 데 특출난 재능이 있군.]
“제 선조께서도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나셨나 보군요.”
능글맞게 받아치는 그의 말에 이프리트는 차마 부정하지도 못한 채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이조차도 즐거웠기에, 엘로니아는 소리 내어 웃었다.
지금 이 순간이 좋았다.
가족이 될 사람이 생겼고, 조건 없이 그녀를 바라봐주는 이가 이곳에 있었다.
[엘로니아, 이것 봐. 노움이 결혼 선물로 광산에서 엄청 비싼 보석을 발굴해 왔어!]
“닉스……. 이거 가져와도 되는 거야?”
[몰라.]
눈을 끔뻑이는 작은 정령들도 이제는 없어서 안 될 엘로니아의 소중한 것들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카르벨은 가볍게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거, 라이벌이 너무 많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