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할 말
아셀리가 연행된 뒤, 그녀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복도에서 희미하게 계속 울려왔다.
또렷하지는 않아도 조용한 회의장에까지 그 소리가 불안정하게 깔려 있었다.
모두가 카르벨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대상으로 유모를 지목했다.
“아셀리의 유모 역시 공조죄로 함께 연행한다.”
이미 얼굴이 보랏빛으로 보일 정도로 조용히 숨을 참고 있던 유모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공작님. 저는 그저 전하께서 시켜서 했을 뿐입니다.”
“내 설명이 부족했던가.”
카르벨은 가볍게 목을 풀며 허리춤에 있던 검 손잡이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당장이라도 꺼내어 베어버릴 듯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말을 이었다.
“황비와 친한 이가 황궁 하녀로 있었다지.”
“그, 그건…….”
말하지 않아도 황후의 죽음 역시 황비와 유모의 합작이라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가장 충격을 받은 이는 헤일튼가의 방계 친족들인 모양이었다.
황후 역시 헤일튼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카르벨에게 그리 빡빡하게 굴었던 이들은 슬픔에 목이 멘 듯 악에 받쳐 유모를 향해 소리쳤다.
“대체, 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던 건가. 안 그래도 몸이 약하던 황후 폐하께 왜……!”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저……. 밑바닥 인생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여…….”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사람을 죽여서라도 얻어야 했냐는 말이야!”
“하지만, 멈출 수 없었습니다.”
유모는 체념한 듯 주름진 눈을 감으며 말했다.
“한 번 시작하고 나니, 덮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일개 하녀였던 그녀 역시 아셀리의 유모가 되면서 작위를 받았다.
만약 아셀리나 황비가 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일개 하녀로 평생을 살다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모 역시 기사들에 의해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아셀리와 달리 그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길을 따라갔다.
원로회는 엉망이었다.
회의를 진행해야 하는 아셀리가 사라진 마당에 황실의 직계일 지도 모르는 카르벨을 두고 어색하게 머뭇거리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카르벨은 평소처럼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그 모습이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적어도 이곳에 없는 듯했다.
도저히 이어갈 수도, 끝을 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카르벨은 묵묵하게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폐하께서 건강을 되찾으시는 대로, 시약 검사를 진행하겠습니다. 키레일을 비롯해 여러 검증을 거쳐서 받도록 하죠.”
그렇게 원로회는 끝이 났다.
이 숨 막히는 회의실이 답답했는지, 원로원들은 부리나케 카르벨에게 인사를 한 뒤 사라졌다.
아마도 돌아가자마자 온갖 귀족들끼리 앞으로 어떻게 줄을 대야 할지 회의할 게 분명했다.
그 와중에도 홀로 남은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엘로니아.”
그녀의 어머니, 데브니 남작 부인이었다.
엘로니아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 상황에서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알 터.
“엘로니아, 우리 얘기 좀 할 수 있겠니. 이번에는 자식과 어미 된 입장에서 말이다.”
데브니 남작 부인의 어색한 웃음 속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녀가 말을 꺼내기 전, 엘로니아는 소리 나게 드르륵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이런 점이 싫었어요.”
“뭐?”
데브니 남작 부인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카르벨은 태연하게 엘로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기사들이 눈치 빠르게 그들이 지나갈 길을 안내하듯 길을 터주었다.
엘로니아는 카르벨의 손을 잡은 뒤, 제 어머니였던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자식은요, 득과 실을 따지는 관계가 아니에요.”
“그 말은…….”
“근데 데브니 남작 부인께서는 제게 따지고 계시잖아요. 그 말은 이제 가족이 아니라는 거죠.”
데브니 남작 부인은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지나치며 엘로니아는 단호히 말했다.
“이제 저희 인연은 여기에서 끝이에요. 더는 이런 일로 마주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
전부 끝났다.
엘로니아는 헤일튼가로 돌아오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아 넌지시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기까지 했다.
저택에 돌아와, 침대에 눕는 순간까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와 끝을 내고 나니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로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나, 이제 진짜 혼자구나.’
고요한 밤. 조용해진 주변을 보고 그제야 깨달았다.
“닉스.”
늘 시끄럽게 다가오던 정령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밤이면 모여들어서 퍼즐을 자랑하고, 노움에게 구황작물을 추천받던 일상이 사라졌다.
님프의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닉스…….”
이렇게 조용하게 잠든 적이 언제던가.
엘로니아는 이 정적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제 옆에서 시끄럽게 하던 때가 그립기까지 했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기에 엘로니아는 숄을 하나 걸친 채 정원으로 나왔다.
달빛에 드리워진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정령들과 시끄럽게 지내느라 잊고 있었던 것들이 이제야 눈에 찬찬히 들어오는 듯싶었다.
“님프.”
조용히 이름을 읊조렸으나 해맑던 웃음이 들리지 않았다.
정원의 벤치에 앉은 엘로니아는 무릎을 끌어모았다.
사방이 조용하다 보니, 상념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카르벨은 황궁으로 들어가겠지.’
황태자가 될 거고, 렌디먼 황제 폐하를 대신해 황제가 될 것이다.
이제 정말 그녀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나는 어떻게 되려나.’
정령을 볼 수 없다고 하면, 그녀의 부모님처럼 돌아서지는 않을까.
카르벨이라면 그간 정을 생각해서라도 데려가 줄지도 모른다.
그는 적어도 자신을 도와준 이를 잊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뿐이면 어쩌지.
그가 했던 고백들이 의심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엘로니아가 받았던 사랑은 다 조건부였다. 돈을 벌 수 있어서, 정령사라서.
확신이 없는 혼란 속, 그녀의 앞에 그림자가 졌다.
달빛이 환하던 눈앞이 조금 어두워졌다.
곧, 그녀의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잠든 줄 알았는데.”
“카르벨.”
고개를 드니 원로회에서 입었던 옷 그대로의 그가 있었다.
환복조차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넣은 그의 모습이 퍽 건방지면서도 권위적으로 느껴졌다.
카르벨은 그녀를 보며 나직하게 되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냥……. 잠이 안 와서요.”
엘로니아의 답에 그는 짧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또 혼자 고민하는군.”
“아니에요. 그냥, 그냥……. 앞으로가 어떻게 될까 잠깐 생각한 거예요.”
그의 이맛살이 짧게 우그러졌다. 무언가 상당히 못마땅한 듯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한 손을 주머니에 여전히 찔러넣은 채 고민하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이랑 크게 다를 거 없어.”
카르벨이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내가 정령이 없어도요?
엘로니아는 목구멍 끝까지 나온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원로회장에서 만난 데브니 남작 부인의 빠른 태도 변화를 본 탓이니라.
심지어 헤일튼가의 방계 친족들조차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냥해지지 않았던가.
이게 사람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녀의 무능력함을 깨닫게 되면, 그가 실망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카르벨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훑으며 말했다.
“……곧 황궁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그는 무슨 말을 할지 고르는 듯이 잠깐 입을 달싹였다.
덩달아 마음이 졸리는 그녀를 두고 카르벨은 이내 결정한 듯 말을 이었다.
“그레이터와 대충 얘기를 해보았는데, 되도록 빠르게 황실로 들어가기로 했어.”
“이렇게 빨리요?”
“황궁에서 폐하의 쾌차 속도가 퍽 빠르다는 서신이 와서. 미뤄서 좋을 게 없으니까.”
예상보다 너무 빠른 진행에 엘로니아는 입을 다물었다.
괜히 바쁜 그를 두고 헛소리를 할 것 같았다.
조용한 그녀를 두고 카르벨은 가볍게 그녀의 볼을 엄지로 쓸며 말했다.
“그때, 할 말이 있어.”
“뭔데요?”
카르벨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을 아꼈다.
고개를 숙인 그가 엘로니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금방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정령들이랑 며칠만 지내고 있어. 내가 잘 부탁한다고 인사라도 할까.”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애도 아니고…….”
차마 정령이 안 보인다는 말을 할 수 없는 탓에 엘로니아는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카르벨은 슬쩍 그녀의 손을 잡고는 손가락 마디를 가볍게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끝낼게.”
그는 어째서인지 제법 기쁘면서도 조금 긴장한 듯이 보였다.
그림자가 진 그의 눈동자가 워낙 진지한 탓에 엘로니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다행스럽게도 렌디먼 황제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회복되었다.
친자 검사 시약도 키레일을 비롯한 마법사들과 의원들까지 들러붙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여러 번이나 입증했다.
당연하게도 카르벨은 황족으로 검증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더 이상 헤일튼 공작이 아닌, 황태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럼 엘로니아 님은 언제쯤 공작님……. 아이고, 제 정신 좀 봐. 전하죠, 전하!”
정원에서 케이크를 들고 서성이는 엘로니아를 따라 주절거리던 에이미는 호칭 실수에 자신의 입술을 따끔하게 때렸다.
워낙 오랫동안 공작으로 지냈으니 어색한 게 당연할 터.
하지만 헤일튼가는 빠른 속도로 적응해가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정원 구석에서 전에 둔 케이크 접시가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아직 정령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나마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약간 긴장이 풀린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척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이미는 적응력도 빠르네. 그럼 즉위식은 언제쯤 이뤄진대?”
“제가 듣기로는 폐하께서 업무에서 이제 물러나시고, 카르벨 공……, 전하께 넘기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셨대요.”
“그렇게나 빨리?”
“워낙 두 분이 사이가 좋으셨잖아요. 이제 보니 마음으로는 아드님을 알아보신 거 아닌가 싶어요!”
너무 바쁜 탓에 얼굴 한 번 제대로 보기 힘든 그였다.
덕분에 아셀리의 형 집행도 미뤄진 모양이었다.
그가 아무런 말도 안 해준 탓에 조금 서운해진 엘로니아는 고개를 들어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에이미는 양산을 들고는 엘로니아의 머리 위에 받쳐주었다.
“마님, 당분간은 얼굴 타시면 안 돼요. 얼른 정령님께 케이크 드리고 들어가서 향유라도 발라 드려야겠어요.”
“향유는 왜?”
요즘 들어 부쩍 그녀의 외모에 엄청난 정성을 들이는 에이미에게 엘로니아는 미심쩍은 듯 되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른 척 말을 얼버무렸다.
“아, 아니. 이제 카르벨 전하가 즉위하시면 다른 귀족 나리도 엄청나게 만나실 테고, 즉위식 때 당연히 참석 하셔야죠!”
“나는 정식으로 혼인한 것도 아닌걸? 그냥 참석만 하는 거 아니야?”
“아이고, 답답해라.”
할 말이 많은 듯 입술을 오물거리던 에이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자신의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주 단호하게 그녀를 이끌며 말했다.
“아무튼 참석하시는 날이 엄청 중요하다고 전하께서 신신당부하셨어요. 저는 명령을 따르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