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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222화 (222/234)

115. 연행

회의장에 있던 누군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유독 크게 울렸다.

“그야 온전히 황위를 계승할 수 있는 아셀리 전하뿐이겠지…….”

“이, 이보게.”

“헙!”

당황한 원로원 중 하나가 다급히 눈치를 주었지만 이미 전부 들은 뒤였다.

본능적인 시선들이 아셀리를 향했다.

용감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확답을 요청했다.

“전하. 정말 폐하를 독살하시기라도 하셨다는 겁니까.”

하지만 생각과 달리 그녀는 언제 분노했냐는 듯이 조용했다.

단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모습이 이질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회의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답을 기다리는 듯 침묵했으나, 어째서인지 아셀리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절이라도 한 건가.’

엘로니아는 계속 앵무새처럼 외워대던 반박이나 핑계가 없는 것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카르벨은 약이 오를 만큼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의원을 들라 해라.”

“예? 아, 예!”

부랴부랴 그의 명령에 여태 렌디먼 황제의 치료를 도맡고 있던 의원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불려왔으니, 혹여 렌디먼 황제의 건강 탓에 부른 줄 알았는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 카르벨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렌디먼 폐하의 차도는 어떠한가.”

“일단 궁 내의 모든 의원과 마법사들이 들러붙어 있기는 합니다만……. 오, 오늘이 고비일 듯합니다.”

카르벨은 테이블 위에 있던 병을 가볍게 손에 쥐고는 의원에게 건넸다.

“해독약이다. 폐하께 드리도록.”

“예? 하오나, 이것은…….”

의원은 성분을 알 수 없는 약물을 믿어도 되는지 헷갈리는 듯 머뭇거렸다.

원로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지 못한 탓인 듯했다.

이를 알아챈 키레일이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며 설명했다.

“유티라스 추출물이 대부분인데, 더럽게 힘들여서 구한 거라고. 먹고 숨이 넘어갈 리 없는 약이야.”

“누구신지…….”

“아, 못 믿겠으면 마시든지. 그쪽이 그냥 들이켜도 별문제 없거든.”

키레일은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지 귀찮은 듯 손을 건성으로 휘저었다.

이에 헤일튼가를 지지하는 원로원들이 득달처럼 서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전에 헤일튼가에서 보냈던 차도 폐하께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

“문제가 있다면 정령사님께서 말씀해 주시겠죠.”

“맞습니다! 에스피디 제국을 지킨다는 정령들이 해를 끼치는 약물이라면 보고만 있겠습니까!”

정작 정령들에게 들은 바는 없으나, 엘로니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돈을 지불한 일에 관해서 키레일이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런 시끄러운 일을 벌일 정도로 부지런한 성격도 아닌 것 같다고!’

기세가 이쪽으로 넘어오자, 의원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는지 병을 두 손으로 꽉 잡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상황을 지켜보고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렌디먼 황제의 상태가 걱정되었는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속도로 회의장을 나갔다.

아셀리는 이 모든 광경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우아하게 앉아 듣고만 있었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면 의중이라도 알겠거늘.

속내를 알 수 없는 데다, 평소 하던 행동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탓에 엘로니아도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셀리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원로원들도 머릿속이 바쁜 듯했다.

“그렇다면 진짜 황태자 전하는 어찌 된 건가.”

“내 어찌 아나……. 헤일튼가에서 숨겼다면 공작이 알고 있지는 않을는지.”

그중에서도 가장 사색이 된 사람은 데브니 남작 부인이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파리한 안색을 하고는 안절부절 엘로니아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자존심 탓인지 입술만 꽉 깨물 뿐이었다.

‘이 와중에도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구나.’

잡담이 이어질 때쯤. 일부 아셀리의 편을 들었던 원로원들이 눈치껏 카르벨에게 상냥히 말을 건넸다.

“그, 크흠. 카르벨 공. 내 원로회에서 하는 말은 그저 제삼자의 관점에서 냉정히 바라보고자 하는……. 그런 말일세.”

“그렇군요.”

“그러니 오해는 하지 말고……. 응?”

“오해하지 않습니다.”

환한 미소로 응대하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믿지 않는 듯 보였다.

대화마저도 단절시켜버리는 카르벨의 단답에 회장은 어색한 침묵과 더 어색한 입에 발린 말이 일방적으로 오고 가기를 반복했다.

‘저 사람은 그냥 텄구먼…….’

아셀리가 그림처럼 앉아 말이 없으니, 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녀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언제나 늘 눈에 띄는 사람이었기에 이렇게까지 존재감이 옅어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넘어간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급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서 울렸다.

곧 다급한 노크와 함께 아까 전, 병을 들고 나갔던 의원이 환희에 찬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폐,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호흡이 안정되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원로원들의 표정에 희비가 엇갈렸다.

헤일튼가의 방계 친족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카르벨의 편에 서서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우리 헤일튼 공이 절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일부 가주들은 믿기지 않는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독살이란 말인가. 정말……!”

순간. 귀가 찢어질 듯한 웃음소리가 회장 안을 가득 채웠다.

“하하……. 하하하하!”

아셀리는 상석에 앉아 배까지 움켜쥔 채로 깔깔깔, 온 힘을 다해 웃고 있었다.

높은 톤의 음성이 소름 끼치기도 하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아 더욱 무섭게만 느껴졌다.

엘로니아조차도 절로 겁에 질려 카르벨의 등 뒤에 슬쩍 숨을 수밖에 없었다.

‘워, 원래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랑 대화하는 거 아니라고 그랬어.’

한참 숨이 넘어갈 듯 웃던 아셀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하하하……. 정말, 정말 대단하네, 헤일튼 공작. 그래, 정령사를 데려왔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했지.”

갑자기 뚝, 웃음을 멈춘 그녀는 엘로니아를 노려보며 스산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그냥 죽였어야 했는데. 가짜 정령사일 줄 알고 안일했던 내 실수지.”

“아셀리 황녀!”

누군가 그녀에게 큰소리를 치며 말렸으나, 아셀리의 시선은 오롯이 죽일 듯 엘로니아와 카르벨을 향해 있었다.

여태 보아온 아름다운 황녀 아셀리의 모습은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광기가 서려 사람 하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미친 여자만이 존재했다.

“난 절대 혼자 못 죽어, 카르벨. 그러는 너도 헤일튼가의 사람이 아니잖아?”

“……알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하하! 너도 나랑 똑같아. 너도 결국 네 이득을 위해 그 자리에 꾸역꾸역 가주인 척 앉아 있는 거잖아?”

아셀리는 실소가 멈추지 않았다.

경멸 어린 시선들. 언제 우러러보았냐는 듯이 뒤돌아선 귀족들.

제가 여태 죽어라 지켜온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것도 바로 저 정령사의 꼴 보기 싫은 능력 하나로. 그깟 정령이 뭐라고!

그녀는 계속 웃음을 흘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가 나보다 나은 게 뭘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권력? 정령의 간택? 결국 다 혈통이 만들어 준 것 아니야?”

“저 추악한 것을 당장 감옥에 가두지 않고 무엇하느냐!”

“내가 얌전히 가면을 쓰고 웃으면 구분도 못하는 주제에, 혈통 하나로 황녀가 되고 천민이 된다니. 하하하!”

기사들 역시 위험을 감지하고 빠른 속도로 아셀리의 주변을 에워쌌다.

우습다. 제 명령 하나에 고개를 숙이던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가두겠다고 험상궂은 얼굴을 하는 게.

그녀의 유모가 기사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팔로 밀었으나, 훈련이 된 이들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셀리의 양팔을 기사들이 붙잡아 일으키려 하자,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버텼다.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져내릴 것들이었던가.

‘내가 10여 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데. 어떻게 나를 완벽하게 가꾸고, 내 본심을 숨기고 살았는데!’

저기 멀쩡히 자신을 보고 있는 카르벨은 자신과 똑같이 가짜인 주제에 왜 저리 멀쩡하게 서 있느냔 말이다!

절대로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지옥을 갈 거라면, 동료가 하나라도 더 있어야지.

아셀리는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기 위해 몸을 비틀며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가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으나, 그녀의 시선만은 또렷했다.

“카르벨. 너도 죽어야지. 너도 나처럼 밑바닥으로 내려와야지. 너는 왜 거기 아무렇지 않게 서 있어, 왜!”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엘로니아는 선대 헤일튼 공작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황비와 아셀리의 계획을 가장 먼저 눈치챈 그가 굳이 로엘을 헤일튼가에 입적시킨 뒤에 카르벨과 바꿔치기한 이유를 말이다.

“너도 헤일튼가의 사람이 아니잖아! 너도 가짜잖아!”

아셀리의 갈라지는 외침을 뚫고 카르벨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맞다. 나도 헤일튼가의 사람이 아니지.”

카르벨이 고갯짓을 까닥하자, 키레일은 로브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이야, 귀신같네. 내가 또 만든 건 어찌 알고. 비싸게 쳐주시렵니까?”

“물론.”

“이거 후불이라 배로 비싸게 받을 겁니다.”

키레일은 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던졌다.

일전에 아셀리가 친족들에게 보냈다던 친자 검사 시약이었다.

“아, 그거 저 가짜 황녀님이 사용하셨던 것보다 더 확실합니다. 나름 내 역작이라고요.”

카르벨은 보란 듯 약병을 받아 엉망이 된 아셀리의 눈앞에 보여주며 말했다.

“자. 시약병이다.”

“뭐야?”

“폐하께서 정신이 드셨다니 다행이지. 폐하의 피와 나의 피로 검사를 해 볼 생각이거든.”

“뭐?”

아셀리는 믿기지 않는 듯 입을 벌렸다.

원로원들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로니아는 아셀리의 표정으로 보고 확신했다.

‘선대 헤일튼 공작님께서는 정말……. 카르벨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셨던 거구나.’

만약 카르벨이 진짜 황태자라고 적혀 있었다면. 입양아로 표기되어있지 않았다면.

일찍이 그 혈통집을 본 아셀리가 그를 죽였을 테니까.

협박을 일삼으며 살려두었던 것은 전부 카르벨이 ‘입양아’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린 아셀리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거짓말하지 마. 네가 진짜라니. 그럴 리 없어!”

“그야 시약을 확인해 보면 될 일이고.”

아셀리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시약을 빼앗아들 듯 몸을 거칠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기사들에 의해 붙잡힌 그녀는 그저 바르작거릴 뿐.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안 돼. 절대 아니야……. 놔! 이 망할 놈들아!”

“……지하 감옥, 독방에 가두거라.”

카르벨의 명령에 기사들은 군말 없이 잘 훈련된 걸음걸이로 아셀리를 끌고 갔다.

버티는 그녀의 발이 질질 끌리고, 고함을 치느라 쉰 목소리가 연속으로 욕설과 카르벨의 이름을 울부짖었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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