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221화 (221/234)

114. 이득을 보는 자

“……제가 왜 해명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아셀리의 독한 음성이 톡 쏘듯이 튀어나왔다.

목소리의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원로원들은 분노와 충격으로 작은 차이를 구분할 만큼 여유가 있지 못했다.

“방금 전부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정령사님께서 보여주신……!”

“과거가 조작된 것인지 제가 알 길이 있습니까?”

“지금 이 무슨 뻔뻔한…….”

원로원들은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벙긋거렸다.

아셀리는 표독스럽게 눈을 빛내며 고개를 뻣뻣하게 치켜들었다.

“그럼 제가 묻겠습니다. 바이카르 자작.”

“아, 예, 예?”

갑자기 호명된 바이카르 자작이 습관처럼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순 다른 원로원들의 눈총을 받자 주춤하는 그를 두고 아셀리가 되물었다.

“자작 부인이 황후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출산하실 때 곁에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마, 맞습니다만…….”

“그렇다면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야 저도 잘…….”

어정쩡한 답변에 머뭇거리는 그를 확인한 아셀리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이었다.

“선대 헤일튼 공작께서 황후 폐하와 사이가 좋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조카이자 황손을 바꿨다니. 믿어지십니까?”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정령사님께서 보여주신 게 있지 않습니까.”

“정령사가 진실만을 전할 것이라는 믿음은 어디서 기인한 건지 모르겠군요.”

아셀리의 질문에 원로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상 워낙 믿기 힘든 일이기도 하거니와, 굳이 황태자를 바꿔치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선대 헤일튼 공작과 황후 폐하를 직접 본 적이 있는 이들이기에 더욱 확신할 수 없는 눈치였다.

엘로니아는 그들이 아셀리를 믿어서 침묵했다기보다는 할 말이 없어서 물러섰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침착해지는 그녀를 두고 카르벨의 낮은 음성이 평온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엘로니아가 거짓으로 보여준 것이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그가 움켜쥔 책 모퉁이는 구겨져 있었다.

황당하기는 엘로니아도 마찬가지였다.

정령들이 어디 부탁한다고 다 들어주던 존재던가.

화가 부글부글 끓어 올랐지만, 어째서인지 이마 부근이 시원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닉스인가…….’

이프리트가 말했던 대로, 더 이상 정령들이 보이지 않는 걸까.

하지만 엘로니아는 이 자그마한 공기도 분명 닉스의 도움일 거라 믿고 싶었다.

그녀가 알던 정령들이라면 분명 그럴 것이기 때문에.

그런 닉스의 도움이 무색하리만큼, 아셀리의 이어진 말은 목 뒤를 잡기에 충분했다.

“제가 시약을 따로 준비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 대기하고 있던 유모는 눈에 익은 작은 병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를 본 헤일튼가의 방계 친족들은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저, 저건 친자 확인…….”

이전에 그들에게 아셀리가 직접 보냈던 그 시약병과 똑같은 색, 똑같은 모양이었다.

“저와 폐하의 피를 넣고 확인하면 되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카르벨 공?”

아셀리는 자신만만하게 카르벨을 향해 묻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예상치 못한 아셀리의 대응에 잠시 움찔, 어깨를 떨었다.

‘뭐, 뭐야. 왜 저렇게 당당하게 나와?’

오히려 너무 뻔뻔하게 나오니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아셀리는 헤일튼가의 방계 친족들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헤일튼가의 친족들께서도 직접 경험해보셨더랬죠.”

“예,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들은 카르벨의 눈치를 보며 손수건으로 허겁지겁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어느 쪽에 서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게 눈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이를 가만히 보던 카르벨이 엘로니아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가짜 약을 만들어두었군.”

아셀리는 자연스럽게 병의 코르크 마개를 열며 말했다.

“그럼 저와 폐하의 피를 넣고 확인해 보겠습니다. 황족의 몸에 피를 보게 한 죄. 반드시 묻겠습니다.”

그 순간. 똑똑, 노크가 들려왔다.

곧 곤란한 표정을 한 기사 하나가 분위기를 살피며 들어왔다.

“저, 전하. 늦게나마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자가 있습니다. 들여보낼까요?”

“원로원분인가.”

“일단 회의 소집에 연락을 보냈던 기록이 있습니다. 참석 여부를 밝히시진 않으셨지만 참가서도 가지고 오셨고요.”

기사는 그녀에게 원로회 소집 공문을 내밀었다.

확실하게 찍혀 있는 황실의 인장은 카르벨이 받았던 것과 동일했다.

“원로원분이라면 들여보내야지. 당연히 참석하셔야 할 분인데.”

한층 여유가 생긴 그녀의 답에 기사는 어중간하게 고개를 숙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얼굴과 상큼한 음성이 회의실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 이거 참. 귀족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연금술사들이란 자고로 다 밤낮이 뒤바뀌어서 산다고요, 예?”

“키, 키레일 씨?!”

엘로니아는 뻔질거리는 얼굴과 긴 보랏빛 생머리를 보고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곧장 팔꿈치로 힘차게 카르벨의 옆구리를 찔렀으나, 그는 알고 있던 모양인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키레일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낄낄거리며 엘로니아의 옆에 섰다.

비스듬히 두 손을 테이블 위에 놓고 상체를 기울인 그가 회의실을 쭉 둘러보며 물었다.

“이야, 이거 오랜만에 뵙는 얼굴들이 많습니다?”

“누, 누구십니까.”

원로원 중 하나가 낯선 듯 의심쩍은 눈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키레일은 씨익, 입매를 비뚜름하게 늘리며 말했다.

“아, 원래 이런 고리타분한 회의는 참석을 안 해서 다들 모르시나 봅니다. 연금술사 협회장 키레일입니다만?”

협회장?

엘로니아는 옆에서 빠르게 입을 합 다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놀란 비명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연금술사란 자고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다.

불법적으로 어중간하게 배운 이들이 뒷골목에서 가짜 약을 판매하거나 금을 만들어 유통하고는 했다.

불법이고,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실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금으로 연성을 했으나 독성이 흘러나온다든가.

하여, 실력이 뛰어난 이들은 모두 협회에서 보증을 하고 있었으며, 그런 이들은 제국 안팎은 물론.

능력을 인정받아 개발을 인정받는 등의 업적을 올리고 있었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들의 흥밋거리 위주이기 때문에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은 그리 많지 않지만.’

대표적으로 그들이 만든 업적 중 하나는 리아티코 향수가 되겠다.

다만 연금술사들 대부분은 연구실에 틀어박혀 얼굴을 보기 힘들었으며, 성격이 괴팍해 귀족들과 성격적으로 부딪히기 일쑤였다.

이들은 연금술에 찬양하며, 오로지 실력이 좋은 연금술사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이들이 실력 하나만 보고 추대한 이가 바로 연금술사 협회장이었다.

‘어, 어쩐지 뒷골목 불법 연금술사들을 너무 줄줄 꿰고 있더라니!’

실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알았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체 협회장씩이나 되어서 왜 이상한 것들을 만들어서 판 거야!’

괴짜들이니 사고회로를 따라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당황한 엘로니아를 두고 키레일은 고개를 돌려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이구, 우리 정령사님은 구면이시고?”

순간, 그녀의 어깨가 뒤로 가볍게 끌어당겨졌다.

단단한 신체가 그녀의 등에 느껴졌다. 곧 머리 위로 카르벨의 친절한 음성이 들려왔다.

“시킨 일은.”

“아아, 거참. 보채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제가 또 고급 의뢰는 어기지 않는다는 나름의 신념이 있어서.”

키레일은 얄밉게 히죽거리며 휙 몸을 일으켰다.

찰랑이는 보랏빛 머릿결을 가볍게 손으로 넘긴 그는 가벼우면서도 조금 촐싹거리는 듯한 걸음으로 아셀리를 향해 다가갔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다가가는 그를 아셀리의 유모가 막아섰다.

“예를 지키십시오. 감히 어디라고 회의실에서…….”

“오, 이거 시약이네?”

이미 그녀는 안중에도 없는 듯 키레일은 눈을 빛내며 시약병에 집중했다.

누가 무어라 하기도 전히 가볍게 시약병을 낚아챈 키레일은 눈 한쪽을 감은 채 빤히 병 안을 들여다보며 탄식했다.

“오, 복잡하기는 한데 잘도 만들었네.”

그의 말에 조금 경계심이 풀어진 유모가 되물었다.

“마, 맞습니다. 꽤 정확도가 높은 시약이죠.”

“그야 높기는 하겠지.”

키레일은 낄낄거리며 옆에 있던 하녀의 어깨에 떨어져 있던 머리카락 한 가닥을 뜯어냈다.

“잠깐 실례.”

그러고는 보란 듯 병 안에 넣어버렸다.

당황한 유모가 그를 말리려고 했으나, 그보다 액체에 머리카락이 녹아드는 속도가 더 빨랐다.

천천히 색이 변하는 것을 보며, 키레일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건 시약이 아니라 아무거나 넣어도 정해진 색을 보여줄 뿐이잖아?”

순간, 일그러지는 아셀리의 표정을 보며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앉아 있는 아셀리의 시선이 위로 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고개까지 꺾어가며 물었다.

“그만큼 다급하셨나 봐, 전하? 이렇게 허접한 물건을 가지고 나온 거 보면.”

“협회장이라 하여도 황궁에서의 소란은 용서하지…….”

“아, 뭐. 난 내쫓겨도 별로 미련도 없고요.”

그는 약을 올리듯 가볍게 입매를 움직이며 로브 속에 손을 넣어 뒤적거렸다.

품에서 곧 무언가를 꺼낸 그가 휙 엘로니아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

갑작스러운 일에 엘로니아의 몸이 움찔거렸다.

다행스럽게도 탁. 바로 얼굴 앞에서 카르벨의 커다란 손이 병을 잡아냈다.

“키레일. 장난이 지나치다.”

“아, 실수입니다. 제가 손이 미끄러져서 살짝 옆으로 비껴갔네?”

누가 보아도 실수가 아니었지만, 카르벨은 그를 노려볼 뿐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 말이다.

카르벨은 병을 들어 보이며 원로원들을 향해 말했다.

“최근 렌디먼 폐하께서 위중하다는 소식은 다들 들어서 알고 계실 겁니다.”

조용한 회의실에서 그는 병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병. 어디서 많이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예리한 눈매가 아셀리와 유모를 향했다.

지레 찔린 듯 시선을 피하는 유모와 달리, 아셀리는 이를 악문 채 표정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카르벨이 여유롭게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돌아가실 적, 이와 비슷하더랬죠. 그래서 제가 키레일 씨에게 특별히 약을 부탁했습니다.”

“잠깐만, 헤일튼 공. 황후 폐하는 몸이 워낙 약하셔서 일찍 돌아가신 게 아닌가.”

“선대 헤일튼 공작께서 황태자가 어릴 때 미리 바꿔치기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탁. 병을 테이블 아래에 내려놓으며 단호히 말했다.

“황후 폐하는 병이 아닌 독살로 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선대 헤일튼 공작께서는 이를 알고 황태자의 안위를 걱정해 미리 아이를 구해 바꿔치기를 한 것이고요.”

“아니, 대체 누가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분개하는 의원들 사이로 카르벨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글쎄요. 황후 폐하가 죽고 참 때가 좋게 황비 전하께서 들어오셨죠.”

카르벨은 고개를 돌려 아셀리를 마주 보며 물었다.

“그리고 현재 렌디먼 폐하가 돌아가시면, 누가 가장 이득을 보겠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