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가질 수 없는 것
아셀리는 마치 정해진 답을 내뱉듯 단호했다.
“모릅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표정은 작게 일그러져 있었다.
치욕스럽다고 느꼈는지, 늘 고고하고 우아하기만 했던 평소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원로원들은 무어라 말을 얹기 힘든지 어설프게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카르벨은 오히려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정말 모르십니까.”
“화재가 원인이 아니라면,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제가 마지막에 본 오라버니의 모습은 불길 속으로 사라지는 것뿐인걸요.”
거짓말. 엘로니아는 이를 꽉 물며 속으로 간절히 이름을 불렀다.
‘이프리트.’
늘 부르면 검은 연기와 함께 나타났던 그였으나, 어째서인지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프리트가 바라는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엘로니아는 초조하게 카르벨을 훔쳐보았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아셀리를 압박하는 걸까.
독살의 증거도, 아셀리가 로엘 황태자를 죽였다는 사실도 밝힐 수 있는 것이 없는데.
초조하게 제 두 손을 꽉 맞잡은 엘로니아는 주문이라도 외는 듯 속으로 이프리트를 불렀다.
‘이프리트, 이프리트. 제발……!’
순간, 건조한 카르벨의 낮은 음성이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로엘 전하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제게 찾아오셨다는 걸 아십니까.”
처음 듣는 소식에 엘로니아는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옆모습에서 슬쩍 보이는 그의 표정에는 정제되지 못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미소조차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제게 사과를 하더군요.”
카르벨은 비릿하게 입매만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왜 그러시나 했습니다. 이제야 알겠더군요.”
“카르벨 공.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아셀리 역시 서늘하게 맞받아쳤다.
카르벨은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좌관들 틈으로 손을 내밀었다.
원로회의 가주들을 따라온 보좌관들 틈에서 그레이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와 책을 건넸다.
“어……?”
엘로니아는 익숙한 책 표지에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조용한 회의실에 생뚱맞게 울린 그녀의 음성에 순간 시선이 집중되었다.
엘로니아는 다급하게 입을 합 다물며 속으로 외쳤다.
‘이거, 이프리트를 처음 만났을 때 있던 그 책이잖아!’
끝이 그을려 있던, 카르벨의 서고에 조용히 잠자고 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순간, 부르지 않았는데도 문틈으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들어왔다.
곧 이프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늘 보던 어린 모습이 아닌, 이전에 보여 주었던 어른의 모습이었다.
놀랄 틈도 없이 카르벨은 책을 건성으로 들어 보이며 물었다.
“아셀리 전하. 이 책을 기억하십니까.”
“모릅니다.”
“로엘 전하는 저와 달리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하셨죠.”
원로원들도 군말이 없었다.
실제로 엘로니아가 과거에서 본 로엘 황태자는 늘 책을 들고 있거나 보고 있었다.
카르벨과 대조되어 유독 크게 각인되어 있었다.
카르벨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며칠 전까지 읽으셨던 책입니다. 로엘 전하가 돌아가신 이후, 전하를 기리기 위해 따로 빼 두었습니다.”
“로엘 전하께서 계실 적, 저는 늦게 입궁해 배우던 시기입니다. 그 시절의 책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아셀리의 예민한 말투에 공격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애써 웃으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이질감이 들게 만들었다.
날카로운 외침이 회의실에 울렸다.
“로엘 전하는 그날 화재에 돌아가셨습니다! 화재가 사망 원인이라는 사실은 수많은 마법사와 의원들이 입증했는데, 제 탓이라고 하실 셈이신가요?”
“제게 왜 로엘 전하께서 사과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카르벨의 질문에 아셀리는 짜증스럽게 답했다.
“두 분이 저보다 더 친분이 두터웠으니 일이 있으셨겠죠.”
“아뇨. 알고 계셨으니까요.”
카르벨은 그대로 책을 든 손을 놓아버렸다.
탕! 거센소리를 내며 두툼한 책이 회의실 책상 위로 떨어졌다.
강한 울림을 뚫고, 카르벨의 단단한 목소리가 확신을 담아 답했다.
“로엘 전하께서는 본인이 황후의 태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겁니다.”
엘로니아는 언젠가 전대 헤일튼 공작 부부가 로엘 황태자에게 고개를 숙이던 과거를 떠올렸다.
본능적으로 로엘 황태자가 혈통집을 손에 넣은 것이 그 시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회의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원로원들은 새파랗게 질려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외쳤다.
동시에 검은 연기가 엘로니아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숨이 막히고, 탄내가 희미하게 나기 시작했다.
원로원들도 이 낌새를 알아챈 것인지, 코를 막기 시작했다.
서서히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엘로니아의 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엘로니아는 때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프리트. 모든 이들에게 보여줘.’
곧 익숙한 그의 음성이 머릿속에 울렸다.
[적절한 순간을 잘 찾아내셨군요.]
후욱, 검은 기운이 회의실을 꽉 채우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채우고, 채우고, 또 채워서 종국에는 널따란 회의실을 온통 검은 세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시야가 트였다는 생각이 들 무렵, 세상은 조용해졌다.
회의실은 어느새 이제는 사라져버린 황실 도서관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린 아셀리는 도서관 문턱이 선이라도 되는 듯 넘어서지 않은 채 앙칼지게 외쳤다.
“오라버니와 할 대화는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저를 부르지 마세요.”
책상에 기대어 앉아 달빛을 불빛 삼아 책을 보던 로엘 황태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에는 카르벨이 회의실에서 보여 주었던 그 책이 들려 있었다.
그는 아셀리를 확인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너도 찔리니까 온 거잖아.”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내가 네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해서 온 거 아니야?”
지금보다 훨씬 어린 아셀리는 표정을 숨길 줄 모르는 듯했다.
부들부들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두려움을 숨기지 못한 아셀 리가 모른 척 말했다.
“그저 오라버니가 자꾸 귀찮게 하는 게 싫어서 온 거예요.”
“너도 알고 있잖아. 네가 렌디먼 폐하의 자식이 아니라는 걸.”
순간 아셀리의 커다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새하얗게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아, 아니야…….”
“걱정하지 마. 고발하려고 부른 게 아니니까.”
로엘 황태자는 보던 책을 탁, 덮으며 몸을 일으켰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버려진 책과 달리, 그의 품에서 혈통집이 나왔다.
그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너와 같으니까.”
“……무슨 뜻이죠?”
“나도 폐하의 자식이 아니야. 이 책에 그렇게 쓰여 있더라.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어.”
그의 말을 잠시 곱씹는 듯하던 아셀리의 떨림이 점차 멎어 들었다.
아셀리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되물었다.
“그래서……, 손을 잡자는 건가?”
정체가 탄로 났다고 생각해서인지, 그나마 갖추던 예의조차 사라져버렸다.
아셀리의 질문에 로엘 황태자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사실대로 폐하께 말씀드려.”
“……뭐라고?”
로엘 황태자는 안쓰럽게 아셀리를 응시했다.
그녀를 향한 안타까움보다는 아셀리를 통해 그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폐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자.”
“……그럼 분명 황실 기만죄로 우리 둘 다 목숨을 보전할 수 없을 걸.”
“렌디먼 폐하는 우리를 진정으로 아끼셨어.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간 정을 봐서라도 조용히 넘어가 주실 수 있을 거야.”
로엘 황태자는 초췌한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미미하게 붉은 눈가에서 이 말을 꺼내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갈등을 겪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덤덤한 로엘 황태자의 권유에 아셀리는 되물었다.
“……거절한다면.”
“그렇다면 내가 폐하께 말씀드리겠어.”
“하, 지금 선택권을 주는 척 협박을 하시겠다?”
아셀리는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늘 유순하게만 보이던 로엘 황태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달빛을 받아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그의 인상이 각인되었다.
“협박이 아니야. 네가 스스로 폐하께 사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야.”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엘로니아는 수많은 원로원들 사이에서 말을 건네던 그의 부모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닮았다. 솔직하고, 정처 없이 흔들리면서도 강인한 심지가 무척이나.
고민을 하는 듯 아셀리가 머뭇거렸다.
어느새 결정을 내렸는지, 그녀는 문턱을 넘어 로엘 황태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런 그녀에게 로엘 황태자는 쓸쓸하게 물었다.
“아셀리. 할 말 없어?”
“그게 뭔데? 오라버니가 그렇게 설명하면 내가 어떻게 알겠어.”
아셀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의 앞에 섰다.
로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책에 이름을 읊어주었다.
“혈통집.”
“……그게 왜 오라버니의 손에 있는 거야?”
날카로운 아셀리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 뒤로 엘로니아가 이미 본 내용들이 줄을 이었다.
아셀리와 혈통집을 받기 위해 몸싸움을 하고, 화재가 일어나고.
그리고 그녀가 떠나는 모든 순간이 이어졌다.
엘로니아는 그제야 로엘 황태자가 아셀리에게 했던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네 것이 아니라는 게, 혈통집을 뜻하는 줄 알았거늘.
‘아셀리의 황녀라는 자리. 그 자체를 이야기했던 거였어.’
로엘 황태자는 아셀리를 제법 동생으로, 같은 고통을 가진 동료로 대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마법사들을 사전에 물리고, 아셀리에게 여러 차례 찾아가 나오라고 권유한 것이니라.
‘아셀리 전하도 알고 있던 거야.’
로엘 황태자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자신과 똑같이 황족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로엘 황태자를 구해주지 않은 거야.’
엘로니아는 조용히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로엘 황태자의 마음이 안타까워서 마지막을 볼 자신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엘로니아의 귓가에 서서히 현실감 넘치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탄내가 느껴지던 공기는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변한 지 오래였다.
엘로니아가 눈을 뜨자, 회의실은 적막했다.
원로원 중 그 누구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본 게 맞는 거야?’
엘로니아는 의문을 느끼며 카르벨을 제일 먼저 살폈다.
꽉 움켜쥔 그의 손이 보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것처럼, 힘을 줘 피부가 창백하게 보일 정도였다.
본 것이다. 로엘 황태자가 죽어가는 모습을 전부 본 게 분명했다.
그가 보았다는 것은.
“이게, 이게…….”
원로원 중 누군가가 탄식처럼 덜덜 떨리는 음성을 내뱉었다.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가장 오래전부터 로엘 황태자와 렌디먼 폐하를 봐 온 이가 붉어진 눈으로 엄하게 외쳤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황녀께서는 설명을 하셔야 할 겁니다.”
그간 나눴던 회의와는 달리, 얼음장처럼 공기가 날이 서 있었다.
그런 이들의 시선 속에서 아셀리는 일그러진 얼굴로 엘로니아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