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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219화 (219/234)

112. 증인

카르벨의 발언에도 원로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특히나 대놓고 헤일튼가의 방계 친족들은 표정에서부터 다른 이들의 눈 밖에 날까 전전긍긍하는 모양새였다.

그런 분위기에 힘을 입은 것인지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데브니 남작 부인이 조곤조곤히 말했다.

“전하께서 무엇이 아쉬워서요. 어차피 헤일튼가가 제국의 가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시간 낭비 아닙니까.”

아셀리의 편에 서기로 했구나.

예상은 했지만 한 번을 제 편에, 아니. 적극적으로 돕지는 않더라도 가만히 있어 주지를 않는 모친을 보며 엘로니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시간을 벌은 이유는 뻔했다. 렌디먼 황제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지금 아셀리의 독살을 섣부르게 언급할 수 없었다.

키레일이 없고, 해독약 또한 없는 지금 들쑤셔 봐야, 벌집을 건드리는 꼴이었다.

엘로니아는 초조하게 굳게 닫힌 회의장 문을 힐끔거렸다.

그 순간, 작게 문이 열리고 기사로 보이는 이가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했다.

곧 곤란한 듯 시종이 카르벨에게로 다가왔다.

“공작님을 찾는다는 평민이 있다는데요. 헤일튼가의 인장이 찍힌 확인서를 들고 왔다고 합니다.”

“회의장으로 안내하게.”

원로원은 전부 참가하다시피 했다.

더 올 사람이 없을 터. 엘로니아는 어리둥절하게 카르벨에게 답을 바라듯 시선을 주었다.

자신 있게 입매를 늘린 그가 원로원을 향해 말했다.

“왜 그러한지는 지금 설명해드릴 수 있겠군요.”

“그게 무슨 소리이죠.”

“때마침 제가 부른 증인이 도착했다지 뭡니까.”

증인이라는 말에 회의실이 잠시 술렁였다.

여태 슬픔에 빠져 생기 없이 대화를 구경하기만 하던 아셀 리가 몸가짐을 바로 하며 되물었다.

“국경 지역 경비 강화에 대한 회의입니다. 이 문제에 무슨 증인이 필요하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네요.”

“그 부분을 설명해 드리려면 필요한 일이라서요.”

아셀리는 파리한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인지 감조차 못 잡았는지, 퀭한 눈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원로원 중 하나가 크흠, 헛기침을 하며 곤혹스러움을 내비쳤다.

“기사단원이라면 총사령관인 헤일튼가의 지시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외압에 의한 거짓 증언일 수 있습니다.”

“기사단원도 아니며, 현재 에스피디 제국에서 지내는 분이 아닙니다.”

달칵, 문이 열리고 허름한 부부가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긴장을 했는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위축된 어깨가 빈궁한 행색을 더욱 초라해 보이게 했다.

라티에 왕국에서 만났던 로엘 황태자의 친부모였다.

적막한 회의실에 시선이 훅 몰리자 부부는 이곳에 온 순간을 망설이는 눈치였다.

카르벨은 그들에게 친절히 감사를 전했다.

“용기 내어 와 주어 고맙네.”

“아, 아닙니다…….”

어리숙하게 고개를 숙이는 부부의 뒤로 자그마한 인영이 보였다.

눈만 끔뻑이는 아이는 그래도 라티에 왕국, 선대 헤일튼 공작 부인의 별장에서 보아서 그런지 카르벨을 보고 꾸벅 인사를 건넸다.

시종이 떨떠름하게 그들이 앉을 자리를 마련한 뒤 안내하자 원로원들의 시선이 그들을 따랐다.

그들 중 누군가 아이를 보며 속삭였다.

“묘하게 낯이 익지 않소.”

“아, 백작님께서도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기는 한데, 익숙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평민을 언제 만나셨겠어요. 오고 가다 보셨겠죠. 그냥 흔하디흔한 외모 아닙니까.”

“에스피디 제국에서 지낸 이가 아니라지 않나.”

원로원들은 가주의 자리, 오랫동안 제국에서 지식을 쌓은 이들인 만큼 로엘 황태자가 살아 있을 적을 본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카르벨이 이 평민 가족을 부른 이유를 유추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데브니 남작 부인은 이마저도 불쾌한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로원들이 참석하는 자리에 어떻게 이렇듯 교양 없는 이들을 데려다 두신단 말입니까.”

그녀의 말에 숨을 곳도 없는 회의실에서 평민 부부는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이에 엘로니아는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반박했다.

“회의에 중요한 증인을 터부시 여기는 것이 교양은 아니지요, 부인.”

“……엘로니아.”

“여기는 공식적인 자리예요, 데브니 남작 부인. 예를 지키세요.”

아무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자, 데브니 남작 부인은 조용히 입을 꾹 다물었다.

소란스러운 와중, 방계 친족 중 하나가 좌불안석 땀을 닦아내며 초조하게 물었다.

“그래서, 이 평민은 왜 부른 것이랍니까?”

날카로운 눈초리에 부부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단지 황궁이 신기한 듯 입을 벌리고 보는 아이만 이질감이 들 뿐이었다.

카르벨은 그런 이들에게 친절히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말하게.”

고개를 들어 불안한 듯 엘로니아를 보는 이들에게 그녀 역시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기가 전해졌는지, 남자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로엘 황태자 전하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일순간 잡다한 목소리가 섞이던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던 아셀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한 얼굴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심장이 점차 박자를 빨리하기 시작했다.

저 익숙한 얼굴이 누구를 닮았는지.

쳐진 눈매와 조금 유약한 듯한 분위기. 묘하게 닮은 인상의 부부의 시선을 어디에서 봤는지.

남자의 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그녀의 귀에 들어오지 못했다.

“로엘은 사실 제 아들입니다.”

조용해진 회의실에서 쿵. 아셀리의 심장이 떨어졌다.

정적에 숨이 막혀왔다. 아셀리의 눈동자가 바삐 엘로니아를 찾았다.

단호한 얼굴. 평소 무르다 못해 조금 만만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녀가 올곧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에서 꽉 움켜쥐며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었다.

“……폐하께서 의식이 없으시다 하여도, 모욕하는 것은 참기 힘들군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신을 차린 원로원들이 소리쳤다.

“마, 맞소!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우리가 로엘 황태자 전하께서 어린 시절부터 황후 폐하의 품에 안겨 있는 걸 다 보았는데!”

“카르벨 공. 이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일세.”

일부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순간 자그마한 평민 남자의 음성이 떨리듯 조용히 울려 퍼졌다.

“선대 헤일튼 공작님께서 제게 제안하셨습니다. 로엘이 당시 워낙 몸이 약했기 때문에, 황궁에 들어가면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어허, 평민이 어디 귀족들 말을 하는데 끼어들어! 이는 황실 모독죄로 목을 쳐도 시원찮겠네!”

원로원 중 하나가 삿대질까지 하며 언성을 높이자 팍, 고개를 들은 남자는 조금 단호하게 마음을 먹은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보냈습니다. 로엘은 제 아들이 맞습니다.”

평민 주제에 고개를 뻣뻣하게 드는 얼굴은 여전히 망설임과 억울함 그리고 마지막 양심이 엿보였다.

그 모습이 어느 한순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가질 수 없는 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해, 아셀리. 그건 네 것이 아니야.’

로엘 황태자의 그 조언이 얼마나 같잖던가.

그 홀로 결백하게 살든가. 죽으려면 혼자 죽든가.

왜 죽어서까지 자신을 구렁텅이로 끌고 가려고 하나.

그 사실을 들켰을 때의 악몽 같은 순간이, 지금 저 평민 가족의 얼굴에서 다시금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아셀리는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조금 닮았다는 이유로 돌아가신 오라버니까지 팔아먹다니. 그 대가로 무엇을 주기로 했습니까, 카르벨 공.”

“지급할 수 없지요. 선대 헤일튼 공작께서 저지른 일인 것을. 현 가주인 제가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라버니가 황실의 인원이 아니라 한들, 지금 이 원로회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습니다.”

애써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답을 내뱉자, 카르벨의 매서운 눈동자가 꿰뚫을 듯 그녀에게 박혔다.

카르벨의 나지막한 음성이 되물었다.

“정말 관계가 없다 생각하십니까.”

혼란스러운 회장 틈으로 똑똑, 조금 전 평민 부부를 안내한 듯한 시종이 얼굴을 드러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아카데미에서 정령사님의 서신을 들고 찾아온 아이가 있어서…….”

애니였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한 아이에게 엘로니아는 당장이라도 뽀뽀를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누가 뭐라 하기 전에 빠른 속도로 답했다.

“맞아요, 제가 후원하는 아이인데 오늘 도움을 위해 불렀습니다. 들여보내 주세요!”

살벌한 회의실 공기에 시종은 머뭇거리며 애니를 들여보냈다.

이전에 뒷골목에서 보던 때보다 멀끔해진 얼굴로 아이는 엘로니아에게 어설픈 예를 갖춰 인사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령사님!”

“아니야, 애니. 오늘 너의 실력이 필요해서 불렀어.”

엘로니아는 원로원들에게 간략하게 그녀를 소개했다.

“애니입니다. 말로 설명하면 그대로 그림으로 구현해내는,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어서 제가 후원하고 있어요.”

“허, 나 참……. 그런 걸 어찌 믿으라고…….”

이미 충격을 받은 탓인지, 원로원들은 골치가 아픈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엘로니아는 애니의 키에 맞춰 무릎을 굽히며 말했다.

“미안한데, 저기 아저씨가 말해 주는 대로 그림을 그려줄 수 있어?”

“네! 맡겨만 주세요!”

애니는 활짝 웃으며 종이 뭉치를 꺼냈다.

평민 부부는 자신이 보냈다는 아이의 생김새를 설명했고, 그럴수록 애니의 손놀림은 빨라졌다.

목탄은 어느새 자그마한 아이를 그려냈다.

그리고 원로원들은 알 수밖에 없었다.

엘로니아와 카르벨이 그 그림을 처음 봤을 때처럼 말이다.

“……로, 로엘 황태자 전하…….”

“말도 안 되네. 내 신뢰할 수 없어.”

끝까지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애니는 당차게 말했다.

“그럼 제게 다른 분을 설명해주시겠어요? 제가 그려 보이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긴가민가하며 원로원 중 하나가 못마땅한 듯 머뭇거리며 설명했다.

“……키는 내 어깨만 하고, 얼굴은 조금 웃는 상이었던가. 웃으면 눈가에 주름이 지고 입술이 가느다란 편이네. 목소리는 반대로 웃을 때 좀 굵직했지.”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애니의 종이에는 사람의 형태가 잡혀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림이 그려졌을 때.

설명했던 원로원의 눈가가 붉어졌다.

“……맙소사. 어찌 이리 똑같을 수가. 내, 내 세상을 먼저 등져버린 아내의 생전 모습과 너무도 닮았어.”

다른 이들의 의심도 곧장 쑥 들어갔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기에, 보고 그렸다거나 미리 연습해서 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은 애니에게 종이를 받아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혼란스러운 듯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황태자 전하는 그럼 어찌 되셨다는 거야.”

이를 지켜보던 카르벨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친절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왜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셨다 생각하십니까.”

“화재로 돌아가셨지. 다 아는 얘기가 아니던가.”

원로원의 말에 카르벨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파리한 얼굴로 앉아 있는 아셀리를 향해 되물었다.

“어찌 돌아가셨는지 아셀리 전하께서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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