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개정
엘로니아의 부탁에 이프리트는 답이 없었다.
특유의 건조한 시선으로 잠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건가……?’
하긴. 정령이라고 해서 정령사가 부탁한다고 들어줘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혹시 몰라 애니를 불러두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 무렵.
엘로니아의 머리카락 속에 숨어 있던 닉스가 꿍얼거렸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면 꼭 저러더라.]
“응?”
[흥, 저거 분명 뭔가 내키지 않는 게 있어서 저러는 거야.]
대차게 말을 꺼낸 그는 이프리트의 시선이 향하자 다시 그녀의 머리카락 뒤로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그래도 닉스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터.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냥 예전에 보여줬던 과거 중 일부를 보여주면 돼. 애니도 있고, 나머지는 카르벨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프리트는 그답지 않게 어린 모습으로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었다.
[상황이야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 그때 가서 정하면 될 일입니다. 다만…….]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엘로니아의 두 눈을 올곧게 응시하며 단호히 말했다.
[제 모습을 보이는 것과 달리, 과거를 보이는 일은 많은 힘을 필요로 합니다. 보이는 대상의 수와 시간. 모든 것이 정령사께서 버거우실 겁니다.]
“내가 버겁다는 게 무슨 뜻이야?”
[자연은 흘러가도록 두는 것입니다. 지나간 세월은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새겨져 있습니다. 이를 강제로 꺼내는 것은 어느 정도 나중에 일어날 일을 책임지셔야 합니다.]
이프리트가 명확하게 답을 준 것은 아니었으나, 엘로니아는 그의 말에서 숨은 뜻을 알 수 있었다.
자연은 신기하면서도 조용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사람이 마음대로 헤집는다고 해서 내리지 않는 비를 내리게 할 수 없고, 산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들은 방관하고 있을 뿐. 모든 책임은 헤집은 사람의 몫이었다.
이프리트가 하는 말도 결국 그런 것이었다.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거구나.’
이전부터 지내왔던 정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본래 존재하였으니까.
하지만 엘로니아가 부탁하려는 일은 단순히 정령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었다.
정령사만 볼 수 있던 과거의 일을 다른 이들에게도 공개하는 일은 확실히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
어느 정도는 감수할 생각이었다.
엘로니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내가 부탁한 거니까, 내가 책임져야지. 그게 뭔지 알 수 있어?”
[한동안 정령들이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프리트의 덤덤한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팟, 그녀의 옆으로 닉스가 튀어나왔다.
그는 엘로니아의 앞에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싫어! 엘로니아가 없으면 난 누구랑 놀아!]
예상치 못한 책임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닉스의 툴툴거리는 말에 꽤 적응이 된 상태였다.
아니, 정이 들었다고 하는 게 맞을까.
제 앞에서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조금 발개진 눈으로 노려보는 닉스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웠다.
엘로니아는 드레스 자락을 보이지 않게 꽉 움켜쥐며 되물었다.
“어, 얼마나……?”
[그야 그 상황에 따라 다르겠죠.]
이프리트는 이런 상황에서도 아쉬움이나 다른 감정은 내비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임무에 충실할 뿐이었다.
아마도 그간 느꼈던 이프리트와의 거리감이 이런 것이었나 보다.
정령사의 도움으로 건설한 에스피디 제국에서, 정령사를 보기 힘든 이유가 이런 뜻이었을까.
엘로니아는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하는 건 아니지?”
[물론입니다. 저는 그저 정령사님의 명령에 따를 뿐.]
똑똑, 조바심이 가득 담긴 노크가 대화 사이를 가로질렀다.
“마님, 마님. 곧 출발하셔야 원로회에 늦지 않으실 수 있어요.”
“지금 나갈게!”
반사적으로 빠르게 답을 내뱉은 엘로니아는 다시금 이프리트를 향해 말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신중하게 생각해볼게.”
[예. 그럼 자연의 가호가 함께하시기를.]
스르륵, 검은 연기가 된 이프리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었다.
방금까지 있던 사람이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
[엘로니아. 그냥 그 공작인지 시커먼 놈은 죽든지 말든지 내버려 두자. 제국 따위 알 게 뭐람?]
에스피디 황궁 복도를 걷는 길.
어디서 소식을 들은 것인지 노움과 님프까지 따라와 곡소리를 내고 있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찰싹 옆에 붙어 있는 정령들을 데리고 아무렇지 않게 걷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특히 닉스가 하는 말은 아무도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끔씩 엘로니아를 흠칫 놀라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 황녀인지 뭔지 눈 쫙 찢어진 여자가 황제를 죽일 때까지 다 속은 놈들이 눈깔이 삔 거지! 엘로니아가 도와줄 필요 없어!]
움찔거리는 그녀의 모양새가 느껴졌는지, 에스코트를 위해 손을 잡고 있던 카르벨이 잠시 시선을 주었다.
“왜 그래. 긴장한 건가.”
“그, 그런가 봐요. 애니는 제시간에 도착했으려나요?”
“현재 국경 경비를 강화해서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더군. 일단은 말은 전해두었으니 괜찮을 거라 믿어.”
“키, 키레일 씨는요.”
“……늦지 않게 온다고 호언장담은 하던데, 모습이 보이지 않더군.”
설마 돈만 받고 튄 건 아니겠지.
시간이 촉박한 탓에 그가 만든 해독약의 완성품을 보지 못했다.
엘로니아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자, 그가 괜찮다는 듯이 손을 작게 힘을 주어 잡았다.
작게 대화를 나눈다고 했으나, 안내를 하던 시종이 힐끔 뒤를 돌아 엘로니아를 응시했다.
그 눈초리가 썩 온화하지는 않았다.
‘황궁 공기가 무거워…….’
렌디먼 황제가 위급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원로원들은 회의를 미루자고 제안했다.
아셀리도 렌디먼 황제의 간병을 이유로 미뤄주기를 부탁한다는 공문을 보내기까지 했다.
보나마나 뻔한 수였지만 그들만 아는 사실.
실제로 어느 쪽에도 줄을 대지 않던 귀족들조차 회의에 소극적인 태도로 변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종들의 눈에는 그깟 국경 지역 경비 문제로 유난을 떤다고 보이려나…….’
친절함을 위해 짓던 미소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은근한 불편함이 엘로니아에게도 느껴졌다.
“헤일튼 공작님과 정령사님 입장하시겠습니다.”
건조한 호명이 끝나고, 황궁에서 가장 넓은 회의실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익숙한 얼굴들이 긴 원형으로 된 테이블에 앉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숨이 막힐 듯한 정적과 함께 적개심이 가득한 분위기가 읽혔다.
특히나 아셀리를 지지하던 이들은 대놓고 못마땅한 듯한 표정으로 일어나 최소한의 인사만 건넬 뿐이었다.
유독 이런 분위기를 못 견뎌 하는 님프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카르벨은 조용히 한 발짝 앞서 나가 그 시선을 막아주며 말했다.
“일찍들 와 계셨군요.”
“……별것도 아닌 일을 이리 크게 키우셨는데. 늦으셨습니다.”
“폐하께서 후작의 충심을 아시면 크게 감격하시겠습니다. 개정 시간보다 이리 일찍 오신 것을 보면.”
대놓고 늦지 않았다는 말을 돌려 하고 있었다.
카르벨의 말에 그들은 작게 이를 물며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시종이 꺼내 준 의자에 착석하자, 그 무게가 절로 느껴졌다.
그나마 펠런 백작이나 어딘가 익숙한 듯 보이는 귀족들이 인사를 건네주었다.
대충 인원을 확인해 보니, 참여하겠다고 한 숫자보다 많은 이들이 참석해 있었다.
‘그래도 방계 친족들이 약속은 지켰네.’
비록 강제로 끌려왔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소리와 함께 익숙한 이름이 호명되었다.
“아셀리 에스피디 전하 입장하십니다.”
엘로니아는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고, 어두운 녹색 드레스를 입은 아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이리 부지런히 참석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초췌한 듯한 안색과 쉰 목소리.
약간 부은 듯한 눈가까지. 누가 보아도 렌디먼 황제 탓에 고생을 한 황녀의 모습이었다.
‘대단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어디에 줄을 설지 계산이 끝난 듯 보이는 귀족들이 앞다퉈 위로의 말을 전했다.
“전하, 얼마나 마음이 아프십니까.”
“폐하께서도 전하의 정성을 아시면 금방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그런 말을 건네는 이들 중에는 방계 친족들 중 일부도 섞여 있었다.
아셀리는 힘겨운 듯 애써 미소를 지으며 상석에 자리했다.
“다들 신경 써주신 덕분이지요. 이리 국정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석해주시니 폐하께서 얼마나 좋은 신하들을 두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개정을 알렸다.
“그럼 국경 경비 강화를 총사령관인 헤일튼 공작께 고지하지 않은 건에 대한 원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개정을 알렸음에도 회의장은 조용했다.
굳이 누가 먼저 나서서 말을 꺼내는 것을 꺼리는 듯한 눈치였다.
엘로니아도 이런 곳에서 대뜸 아셀리를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근차근, 흐름을 타지 못하면 괜한 트집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애니는 언제쯤 도착하는 거지.’
힐끔 뒤에 시종들을 바라보았으나, 누군가 새로 도착했다는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도 카르벨은 묵묵하게 제가 할 말만 꺼낼 뿐이었다.
“먼저 국경 경비에 대한 것은 저의 소관입니다.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제 실수였습니다. 아버지가……, 아니. 폐하께서 아프시다 하니 덜컥 겁이 나서요.”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철수하면 될 일입니다만.”
애니가 아카데미에서 넘어오는 것도 경비 강화로 인해 힘들다고 할 정도였다.
알면서도 굳이 경비 강화를 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아셀리는 준비한 듯이 조용히 답을 건넸다.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강화해야지요. 내부가 가장 약한 시기가 아닌가요.”
“제 실력이 못 미더우시다는 뜻처럼 들리는군요.”
카르벨의 날카로운 답변에 아셀리의 눈매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그저 에스피디 제국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게 카르벨 공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몰아가시는 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일부 원로원들이 득달같이 편을 들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애초에 이 시기에 원로회를 강제로 여는 게 옳다고 봅니까!”
“솔직하게 개인적인 감정으로 이러신다고밖에 느껴지지 않는군요.”
“세대가 교체될 때마다 피곤해서, 원. 기 싸움은 개인적으로 합시다.”
개인적인 싸움이라니!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는 엘로니아는 화가 나 무어라고 반박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카르벨은 표정 하나 변함없이 적당한 미소를 띤 얼굴 그대로였다.
그는 높낮이가 일정한 목소리로 흔들림 없이 답했다.
“전하께서 가경 경비를 강화한 이유가 단순히 실수다, 원로원께서는 이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그럼 전하께서 굳이 그러실 다른 이유라도 있습니까.”
가만히 지켜보던 젊은 귀족 하나가 손을 들며 물었다.
여태 관망하듯 굴던 그의 질문에 카르벨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제가 라티에 왕국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할 이유라면. 답이 충분히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