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침착한 긴장
“아셀리, 왔느냐.”
침대에 누워 있던 렌디먼 황제가 방문한 아셀리를 보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건강을 체크하던 보좌관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셀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침울한 음성으로 보좌관에게 되물었다.
“차도는 있으신가.”
“최악의 상황까지는 다행히 아니신 듯합니다. 의원도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자고 하였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행이구나.”
아셀리는 후우,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로 다가가자 보좌관이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주려고 했다.
그녀는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던 유모에게 눈짓을 주었다.
눈치 빠르게 그녀는 보좌관보다 먼저 의자를 붙잡아 빼며 말했다.
“전하, 앉으세요.”
순간 민망한 듯 보좌관은 내밀었던 손을 움찔거렸다.
아셀리는 못 본 척 의자에 앉으며 렌디먼 황제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 원로회가 열리기 전이라 요즘 바빠서 자주 못 들렀어요. 죄송해요.”
“그래. 보좌관에게 들었다. 헤일튼 공이 요청했다면서. 그러게 무엇하러 그런 짓을 했어.”
“아버지가 아프시단 소리가 흘러나가기라도 하면 괜히 허튼 생각을 하는 사람이 생길 테니까요. 제가 판단이 미숙했어요.”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화에 보좌관은 어색한 듯 잠시 눈을 굴렸다.
그런 와중에 유모까지 눈짓을 하자 그는 조용히 문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대화 나누십시오.”
렌디먼 황제는 그저 허허 웃으며 답을 이었다.
“어쩔 수 없지. 원로회를 겪어보는 것도 다 경험이 될 거다. 원칙적으로 네가 잘못한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지금 내게 한 이야기를 그대로 한다면 다들 넘어갈 게야.”
원로회를 취소할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셀리의 뒤로 똑똑, 노크가 들렸다.
하녀는 평범한 찻잔을 들고 들어와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공손히 두 잔을 세팅했다.
하녀가 나가는 사이, 아셀리는 슬쩍 몸을 틀어 잔을 가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일로 원로회가 열리다니. 솔직히 헤일튼 공께서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원래 의문이 있을 때는 확실하게 풀고 가는 게 좋은 것이다. 정령사님도 그 일로 어중간한 소문들이 한 번에 정리되지 않았느냐.”
종이호랑이인 와중에도 렌디먼 황제는 고지식하고 정형화된 답을 내놓았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유모는 품에서 빠르게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다 자라지 못한 어린잎이 한 줌 들어 있었다.
미처 자라지 못한 새싹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유모는 빠른 속도로 그 잎을 포트에 넣어 버렸다.
그녀를 제외하고는 렌디먼 황제도 모를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습관처럼 찻잔에 시선을 두자, 유모는 쪼르륵 태연하게 차를 따랐다.
렌디먼 황제는 잔을 들며 물었다.
“헤일튼가에서 보낸 차와 다른 듯하구나.”
“아, 매일 같은 것을 드시면 물리실 것 같아 특별히 준비했어요.”
“안 그래도 바쁜 네가 이런 것까지 신경을…….”
렌디먼 황제는 미안한 듯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셨다.
아주 짧은 정적이 흐르고, 곧 쿨럭. 그가 기침을 토했다.
거센 기침에 다급하게 찻잔을 내려놓은 그는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쿨럭. 이, 이게 무엇이냐, 아셀리. 조금 이상하구나.”
“……어떠세요?”
렌디먼 황제는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토할 듯 기침을 쏟아내던 그의 입에서 울컥, 피가 흘러내렸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그는 손을 떨며 물었다.
“아셀리, 설마…….”
“아버지, 죄송해요. 하지만 아버지보다 저는 앞으로 살날이 길잖아요.”
“쿨럭, 그게 무, 무슨…….”
곧 렌디먼 황제의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쓰러지듯 뒤로 넘어간 렌디먼 황제는 침대에 엎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아셀리가 조용히 유모에게 고갯짓을 했다.
유모는 고개를 숙여 렌디먼 황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답했다.
“아직 숨이 붙어 있군요. 그래도 이 정도면 치명적이었을 겁니다.”
“찻잎을 전부 도둑맞지만 않았어도 한 번에 끝났을 텐데. 쯧.”
아셀리는 작게 혀를 찼다.
유모 역시 한숨을 내쉬며 독이 들었던 찻잔 속 내용물을 전부 옆 화분에 쏟아버린 뒤 미리 준비한 듯 새 찻잔을 두었다.
그녀는 죄책감조차 없는 듯 포트를 들어 쪼르륵, 화분으로 흘려보내며 답했다.
“어린잎이라 독성이 그 정도로 독하지는 않을 거라 그랬어요. 그래서 많은 양을 넣기는 했는데, 조금 더 우렸으면 좋았을 텐데요.”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아셀리는 헐떡이는 렌디먼 황제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을 이었다.
“원로회 전에 죽어줬으면 서로 편했을 텐데 말이야.”
냉정했던 아셀리의 얼굴은 유모의 포트가 다 비워진 뒤, 새로운 차가 가득 차고 나서야 누그러졌다.
거짓된 표정을 짓는 건 아셀리에게 쉬운 일이었다.
어린 시절, 조금만 불쌍한 척해도 사람들은 못 배우고 자란 뒷골목 출신의 아이에게 친절했다.
‘그 빌어먹던 시절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쉰 뒤, 겁에 질린 듯 입을 가리고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꺄아악, 아버지! 아버지!”
온 궁에 있는 시종은 전부 들으라는 듯이 말이다.
그녀의 외침에 궁 안의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들었다.
아셀리는 정신이 없는 렌디먼 황제의 옷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안 돼요,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폐하!”
“의원, 의원을 불러!”
시종들은 정신이 없는 듯 의원을 찾아 허둥지둥거렸다.
뒤늦게 다시 온 보좌관은 렌디먼 황제가 각혈한 흔적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창백한 얼굴로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아셀리는 렌디먼 황제의 손을 꽉 붙잡으며 생각했다.
‘어차피 제게 물려주시려고 했던 자리잖아요. 조금 일찍 받아 갈게요.’
***
“폐하께서 쓰러지셨다고?”
엘로니아는 아카데미에서 온 서신을 전하러 온 에이미에게 놀라 되물었다.
에이미는 본인도 믿기지 않는지 당황해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네, 네. 방금 공작님에게 황궁에서 전언이 왔다고 그랬어요.”
원로회를 하루 앞둔 시기였다.
엘로니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에이미가 전해준 서신을 열었다.
아카데미에서 엘로니아의 요청에 따라 애니에게 절차를 밟아 에스피디 제국으로 보냈다는 안내였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오면 아슬하게 도착은 할 수 있겠는데…….’
본래 학기 중에는 마음대로 학생을 뺄 수 없었으나, 후원자이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3일간의 시간을 주었다고 했다.
본래대로라면 3일로도 충분했다.
서신을 읽는 사이,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카르벨의 음성이 들려왔다.
“엘로니아, 잠시 괜찮나.”
고개를 드니 에이미가 들어올 때 열어 둔 문을 두드리고 있는 카르벨이 보였다.
“네. 황궁에서 전언이 왔다고 들었어요.”
“그래. 폐하께서 위독하시니 일정을 미룰 수 있겠냐는군.”
그렇게 되면 애니는 다시 아카데미로 들어가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아셀리가 너무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데드 경이 독초를 전부 훔쳐 와서 그나마 살아계신 건가.’
아마도 독초가 전부 도난당했으니, 대체재로 시도하려다 실패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원로회를 열어도 참석이나 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핑계 삼았던 무통보 국경 지역의 경비 강화는 렌디먼 황제의 건강보다 우선시 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엘로니아의 고민을 카르벨의 나지막한 음성이 끊어냈다.
“미루지 말고 일정대로 진행하라고 전했다.”
“그래도 돼요……?”
실상 방계 친족들은 카르벨의 협박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참석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만약 렌디먼 황제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아셀리가 즉위한다면 귀족들 사이에서 권력의 주축이 크게 흔들릴 게 뻔했다.
아셀리와 카르벨은 대외적으로 혼담이 깨진 탓에 사이가 좋지 않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눈치가 빠른 이들은 아셀리의 눈에 들기 위해 비위를 맞출 확률이 높았다.
이럴 때 강제로 원로회를 밀어붙인다면.
“귀족들의 눈 밖에 날 수 있어요.”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건넸다.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심지어 렌디먼 황제는 카르벨을 아끼는 듯이 보였으니 말이다.
아슬하게 원로회를 열 최소 인원수만 맞춰둔 터라 한 명이라도 빠지면 인식만 나빠지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카르벨의 또렷한 눈동자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상관없어. 그걸 뒤집으면 될 일 아닌가.”
그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박쥐 같은 가문들 명단을 추리기도 쉽겠지.”
조용히 읊조리는 말이 자신감보다는 각오에 가까운 듯했다.
늘 안전을 추구하던 엘로니아와 달리, 그는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신기하게도 그의 답에 떨리던 엘로니아의 심장이 차츰 제 박자를 찾아갔다.
***
원로회 당일이 되자, 엘로니아는 오히려 더 차분해졌다.
되레 에이미가 떨리는 듯 그녀를 단장하며 잦은 실수를 연발했다.
허공에다 빗질을 하는 그녀에게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언질을 주었다.
“이쯤에서 끝낼까?”
“헉, 마님. 죄송합니다!”
엘로니아는 그저 친절하게 미소를 지어줄 뿐이었다.
황금빛이 도는 드레스에 화려한 물방울 모양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촘촘하게 그녀의 목을 장식했다.
겉으로 보면 꼭 연회를 나가는 사람처럼 보일 법했다.
오전부터 엘로니아의 침대에서 뛰어놀던 닉스는 희한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화를 안 내?]
“뭐가?”
[이상하다. 내가 아침마다 엘로니아 주위를 시끄럽게 돌아다니면 이불 뒤집어쓰고 안 일어났잖아.]
그걸 알면서 그런 거였구나……?
봐준다고 일부러 감내했던 순간이 잠시 허탈해지는 순간이었다.
닉스는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았는지, 거울 속 엘로니아를 빤히 노려보며 되물었다.
[오늘은 늦잠도 안 자고 일어났어! 완전 큰일이잖아? 어디 아파? 죽을병인 거야?]
고작 하루 일찍 일어난 게 그렇게 문제인 걸까.
한참을 헛다리를 짚는 닉스에게 엘로니아는 다급하게 변명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일찍 일어난 거야!”
[중요한 일?]
설명보다 빠른 건 없는 법.
엘로니아는 어디에 정령이 있을지 몰라 뻣뻣하게 걸어 다니는 에이미에게 작게 눈짓을 주었다.
눈치 빠르게 그녀가 방을 비우자, 엘로니아는 조용히 익숙한 이름을 불러냈다.
“이프리트.”
곧 닉스의 옆에 사람과 같은 크기의 검은 연기들이 모여들었다.
연기가 팽창하듯 사라지고, 그 안에서 이프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정령사.]
[으악, 이, 이, 이프리트는 왜 부른 거야!]
기겁하며 엘로니아의 뒤에 숨은 닉스를 그가 무심하게 흘겨보았다.
그러자 기어가듯 닉스가 말을 덧붙였다.
[……요.]
[정령사에게 존칭을 써야 하지 않겠나, 닉스.]
어차피 닉스의 말투는 그녀가 허락한 일.
엘로니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웃어 보이며 이프리트에게 부탁을 건넸다.
“이프리트, 괜찮다면 오늘. 사람들 앞에서 보여 줬으면 하는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