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오랜 짝사랑
산뜻한 데드 경의 표정과 달리, 독한 독초의 향은 생각보다 짙었다.
이런 향이 짙은 독초를 무색무취로 만들다니.
키레일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표현했지만 실상 그 뒷골목의 연금술사가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카르벨이 그에게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고개를 까닥였다.
데드 경은 기쁜 듯 활짝 웃으며 자신의 가슴 언저리에 주먹을 쥐어 보이며 외쳤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그럼 또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이 데드를 꼭 불러주십시오!”
거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닉스는 현실적인 질문을 중얼거렸다.
[대체 저 덩치로 어떻게 안 들키고 전부 훔쳐 온 거야?]
그러게.
엘로니아도 궁금했으나, 안 그래도 불법적인 일.
괜히 들쑤시기에는 자신의 양심이 더 아플 듯싶기에 조용히 궁금증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카르벨은 독초가 든 자루를 꽉 묶어버리며 옆에서 대기 중이던 그레이터에게 곧장 넘겨버렸다.
“키레일에게 전하게.”
고개를 숙이는 그를 두고 카르벨은 고개를 돌려 시종들에게 지시했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게. 흔적 하나 남김없이.”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눈에는 전부 보인 눈치였다.
‘닉스부터 님프까지 양옆에 사색이 되어 붙어 있으니, 좀 불편해 보였나…….’
엘로니아는 자신의 볼에 붙어 있는 두 정령을 가볍게 떼어내며 웃었다.
피식, 가볍게 바람이 빠지듯 웃음을 흘린 그가 다정히 되물었다.
“아카데미 일은. 잘 되겠나.”
“물론이죠.”
데드 경이 약초를 훔치러 떠난 직후, 엘로니아도 애니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녀는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꽤 정확한 상황을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에스피디 제국으로 제시간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많은 귀족들을 앞에 두고 제 주장을 펼치는 것은 아무리 엘로니아라 하더라도 조금 긴장되는 일이었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를 애써 펴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꺼내려던 찰나.
똑똑똑. 조금은 다급한 노크가 들려왔다.
“공작님, 엘로니아 님. 죄송합니다. 밖에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누구지.”
카르벨의 질문에 시녀는 힐끔, 곁눈질로 엘로니아를 살피며 말했다.
“그, 데브니 남작 부인께서 엘로니아 님을 뵙고 싶다고…….”
예상치 못한 이름에 엘로니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를 대신해 카르벨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히 답했다.
“사전에 연락 없이 만날 만큼 헤일튼가는 한가하지 않다. 돌려보내.”
“네, 알겠습니다.”
왜 찾아왔지. 무슨 일로?
복잡한 생각이 빠르게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만나고 싶지 않다. 만나고 싶다. 양가감정이 복잡하게 얽혔다.
지금 찾아왔다면 분명 원로회 때문이리라.
‘아버지랑 동생이 메티카에 있을 테니까…….’
원로회 소집에 대한 안내를 받는 이는 제 모친뿐이었다.
도와달라고 왔을까. 아니면 협상을 하려고 온 걸까.
아니면 사과라도 하려는 걸까.
그녀의 행동이 예상되지 않았다.
카르벨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나서는 시녀의 등을 가만히 보던 엘로니아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깐만.”
“네?”
문을 닫으려다 말고 멈칫, 멈춰 선 시녀를 향해 엘로니아는 어색하게 답했다.
“접객실로 안내해 드려.”
우려스러운 카르벨의 시선이 엘로니아에게로 향했다.
시녀도 명령을 번복하는 일에 망설이는 듯 눈치를 보다, 다른 말이 없자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집무실에서 벗어났다.
탁.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나직한 음성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엘로니아.”
“휘둘릴 일 없어요. 그냥 얘기만 들어보게요.”
“…….”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하잖아요. 그래서예요.”
엘로니아는 방긋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투로 답했다.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던 카르벨은 한참 뒤에야 답을 줄 뿐이었다.
“옆에 있겠네.”
참, 별거 아닌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진하게 울렸다.
***
데브니 남작 부인은 화려한 접객실 내부를 눈동자만 굴려 빠르게 훑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그런 제 모친의 행동이 창피하면서도 익숙했다.
분명 헤일튼가의 재산과 규모 등을 줄 세우고 있으리라.
‘본인은 안 들키게 잘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야.’
그런 데브니 남작 부인이 유독 시선을 피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그녀의 옆에 버젓이 앉아 친절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카르벨이 있는 쪽이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흔한 인사나, 그 어떤 예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리를 꼬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묘한 기류에 압박감을 느꼈는지, 데브니 남작 부인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크흠,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나.”
“나쁠 건 없으니까요. 용건이 뭐예요?”
언제부터 그리 살갑게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였다고.
곧장 본론을 꺼내는 엘로니아를 나무라고 싶은 듯 모친의 눈꺼풀이 잠시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이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정식으로 혼인을 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집안에 연락 한 통이 없니.”
“어머니도 없으셨잖아요.”
“가문이 어떻게 되었는지 가장 잘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구나.”
잘 알고 말고.
사실상 그를 메티카에 넣어버린 이가 카르벨이라는 점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앞에 예의상 놓인 찻잔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 말 하려고 오셨어요?”
“……원로회가 열린다고 소집 공문이 내려왔더구나. 알다시피 가문에 아무도 없어서 내가 참석하게 되었잖니.”
그녀는 목이 타는 듯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네 아버지를 용서할 때도 되지 않았니?”
“뭐……라고요?”
“네 동생도 그렇고, 이미 메티카에서 얼마나 고생하고 있겠니. 이 정도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생각해.”
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했다.
만약에 사과를 하면,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어머니니까.
이대로 지나가야 하나 하는 우스운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엘로니아는 굳은 얼굴로 가만히 그녀를 마주 보며 되물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저를 딸로 생각하시기는 하셨나요?”
“네 마음 안다. 네가 홀로 힘들었다고 지금 이러나 본데, 가족이잖니. 가족이라면 당연히 서로 돕고 사는 거 아니겠니?”
“…….”
“네가 그렇게 고생했으니 결국 카르벨 공도 만나고, 잘 풀린 거 아니겠어?”
한때는 가족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부모님 마음에 들어보려고. 칭찬 한 번 들어보고 싶어서 아등바등 갖다 바치고 좋아하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울 뿐이었다.
그깟 시선 한 번을 갈구하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였을까.
오벨리아 왕비는 제 조카가 피가 섞이지 않아도 가족이라고 하는데.
그런 게 진짜 가족이었다.
물질이나 다른 무언가의 대가가 아닌, 엘로니아가 바라던 이상향.
그녀가 답이 없자, 데브니 남작 부인의 말이 더욱 빨라졌다.
“원로회를 열어달라 요청한 쪽이 헤일튼가라고 들었다. 좋은 게 좋다고, 나도 너희를 도울 수 있지 않겠니.”
“필요 없습니다만.”
엘로니아가 무어라 답을 내뱉기 전.
카르벨의 나지막한 음성이 데브니 남작 부인의 말을 잘라냈다.
“가족이 언제부터 협상과 동의어였던가.”
“카, 카르벨 공작! 협상이라니, 말이 지나치십니다.”
“지나치다고? 지나친 것은 데브니 남작 부인입니다.”
그는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이며 귀찮다는 듯 허공을 대충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용서도, 고생도 받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알아서 재단하고 결론까지 내다니. 대단하군.”
크게 몸을 일으킨 그는 고쳐 앉으며 두 팔을 무릎에 걸쳤다.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늘 짓던 미소로 데브니 남작 부인을 마주 보며 가르치듯 단호하게 설명했다.
“데브니 남작 부인이 돕는다고 달라질 것 없습니다. 오히려 없는 쪽이 엘로니아를 위해 도움이 되겠군요.”
“지금 화해를 요청하러 온 사람에게 너무한 처사입니다!”
“데브니가에서는 이런 걸 화해라 하는 모양이군요.”
데브니 남작 부인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카르벨은 여유롭게 소파에 등을 기대며 엘로니아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뻣뻣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엘로니아의 몸이 그의 힘에 속절없이 기울었다.
그녀를 가볍게 감싸 안은 그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오해가 있는가 본데, 엘로니아가 마음을 곱게 써서 제가 선택한 게 아닙니다.”
“카르벨……?”
이렇게까지 도발해도 되는 건가.
괜한 불안감에 엘로니아는 카르벨의 옷깃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하지만 카르벨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엘로니아가 너무 대단해서, 제가 마음에 들려고 노력한 것이지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데브니 남작 부인의 얼굴이 점차 수치심으로 붉게 타올랐다.
드레스를 꽉 쥔 손이 부르르 떨리다 못해 마지막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까지 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모욕하다니, 그간 카르벨 공을 좋게 본 제가 너무 소견이 짧았군요!”
“글쎄요. 왜 좋게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잘 보이려고 한 적도 없는데.”
“하, 소문에 제 핏줄도 모른다는 얘기가 돌더니. 이리 천박한 언행을 구사할 줄이야.”
그녀는 홱, 몸을 틀어 접객실을 성큼성큼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녀들이 부랴부랴 어쩔 줄 몰라 하며 길을 터주자, 그녀는 몸을 틀어 엘로니아를 향해 외쳤다.
“어디 가족도 뭣도 없이 잘 되나 봅시다. 사람이 어느 정도 선을 지켜야 하는 법이에요, 카르벨 공작.”
“선은 검을 뽑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켰습니다.”
“또 모르지요. 원로회에서 제 표 하나가 절실해질지 누가 압니까.”
그녀는 비릿하게 미소를 지은 뒤, 엘로니아를 쏘아보았다.
그러고는 미련 없다는 듯이 접객실을 빠져나갔다.
쾅, 거칠게 닫힌 문소리가 엘로니아의 등 뒤에서 울렸다.
잠시 정적이 접객실에 흘렀다.
엘로니아가 답이 없자, 카르벨이 먼저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괜찮나.”
“네. 괜찮아요. 고마워요, 카르벨. 덕분에 엄청 속이 시원했어요!”
엘로니아는 방긋 웃으며 두 손을 꽉 움켜쥐어 보였다.
애써 밝은 음성으로 답했지만, 그녀를 보는 카르벨의 시선은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다.
“정 뭣하면 메티카에 넣어버릴 수 있어. 원한다면 말만 해.”
“아, 아니……. 어떻게요?”
“핑계야 만들면 그만인 것을.”
진심인 양 그의 시선이 조금 가늘어졌다.
보통 무슨 일을 벌일 때 그가 자주 짓던 표정이었다.
그리고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대부분 그리 정직하고 올바른 방향의 일이 아니었다.
굳이 원로회를 앞두고 트집 잡힐 일을 할 필요는 없다.
엘로니아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크게 숨을 내쉰 그녀는 허탈한 듯, 조금 후련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그냥, 오랜 짝사랑을 끝낸 기분이에요.”
더 이상 부모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아등바등하던 어린 그녀는 없다.
이번 일로, 엘로니아는 조금 확고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