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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215화 (215/234)

108. 원로회 소집 명단

키레일의 반가운 소식에 엘로니아는 기대감을 가지고 되물었다.

“혹시 해독약을 구할 수도 있을까요?”

어떤 독초인지는 모르겠으나, 과거에 전대 헤일튼 공작도 해독약을 구하지 못했다.

님프도 알아보겠다고 하기는 했으나, 일시적으로 중화할 수 있는 약초만을 알아 올 뿐이었다.

지금의 렌디먼 폐하는 말 그대로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상황.

키레일은 고민 한 점 없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못 구하죠!”

그걸 이렇게 밝게 말할 일이야?!

황당함에 엘로니아가 무어라 소리치기 전. 키레일은 눈치 빠르게 슬쩍 몸을 뒤로 내빼며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뒷골목 놈들은 불량 약품을 만드는 놈들인데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겠어요?”

“그럼 처음부터 대안이 없다고 말씀해 주시던가요!”

“대안이 없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엘로니아는 처음으로 인내심이 파괴되는 기분을 느꼈다.

비즈니스를 위해 웃고 있었지만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덩달아 카르벨의 미소가 환해지는 것을 보아하니, 조금만 지나면 칼부림이 날 것도 같았다.

미세한 기운이 흐르는 집무실에서 키레일은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독초가 무엇인지만 구해와 주시죠. 그럼 분석해서 해독약을 딱 대령하겠습니다. 물론 저는 고급인력이기 때문에 비쌉니다.”

“그 부분은 염두에 두고 있었네.”

카르벨이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투로 답했다.

정말 한몫 단단히 챙길 생각이었는지, 키레일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안 들어보셔도 되겠습니까? 이거 주문 제작이라 진짜 크게 받을 겁니다. 한…….”

잠시 뜸을 들인 그가 손가락 세 개를 쭉 펴 보였다.

‘삼십만 골드인가?’

그 정도면 카르벨에게 큰 부담은 아닐 터.

하지만 그 뒤에 나온 말은 그녀의 상상보다 훨씬 큰 금액이었다.

“삼천이면 되겠네요.”

“그러지.”

……뭐라고? 내가 잘못 들었나?

태어나서 구경도 못 해본 금액에 엘로니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정작 카르벨은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했다.

굳어버린 엘로니아를 두고 그들은 착착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키레일은 한몫 잡았다는 생각인지 기분이 좋은 듯 날아갈 것처럼 해맑게 말했다.

“그럼 독초를 구하시는 대로 보내주시죠. 좋은 거래 감사드립니다.”

로브를 다시 뒤집어쓴 그는 계약서를 소중하게 품 안에 넣으며 히죽이는 얼굴로 방을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지나간 상황에 그녀는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다가 깨달은 듯 펄쩍 뛰었다.

“아니, 독초는 어디서 구해요?!”

엘로니아도 정령들이 보여준 과거에서나 본 것이었다.

뒷골목으로 찾아간다면 제일 먼저 아셀리의 귀에 들어갈 터.

증거를 인멸하거나 이도 저도 안 되면 렌디먼 폐하의 목숨을 그대로 끊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발만 동동 구르는 그녀와 다르게 카르벨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게 좋은 방법이 있어, 엘로니아.”

“아, 뭔가 계획이 있던 거였군요?”

“훔치면 돼.”

“…….”

“그쪽도 어차피 불법인데, 우리라고 꼭 법을 지키란 법은 없잖은가.”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참.

‘이게 에스피디 제국의 총사령관이라는 걸 제국민들이 알아야 할 텐데…….’

엘로니아는 차마 말릴 수도, 북돋울 수도 없어 그냥 차분하게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카르벨도 농담이 아니었는지, 시종을 시켜 데드 경을 불렀다.

자신만 불렀다는 것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진 듯 데드 경은 시끄럽게 발소리를 내며 활짝, 집무실 문을 열었다.

“각하! 부르셨습니까!”

“데드 경.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말씀만 하십시오! 역시 그 국경 지역에서 허가 없이 경비가 강화된 일 때문이십니까!”

“그건 내가 해결할 테고, 데드 경은 약초를 하나 훔쳐줘야겠어.”

“역시 각하께서는 저를 믿……, 네?”

“자세한 위치는 키레일에게 받아줄 터이니, 거기서 엘로니아가 알려주는 약초를 하나 훔쳐 와.”

엘로니아는 차마 그의 얼굴을 볼 낯이 없어 조용히 고개를 돌리며 모른 척 님프를 불러냈다.

곧 책상 위에 살랑살랑 날아다니며 꺄르륵 웃음을 흘리는 그녀에게 엘로니아는 조용히 속삭일 뿐이었다.

“님프, 혹시 닉스가 보여줬던 과거의 독초 하나만 그려줄 수 있어?”

고개를 크게 끄덕인 그녀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만년필로 계약서 위에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놀란 엘로니아는 재빠르게 새 종이를 꺼내 다시 내밀었다.

님프는 아무래도 좋은 듯 웃으며 다시 삐뚤빼뚤하게 그림을 그려냈다.

큼지막한 약초가 그려지고, 엘로니아는 모른 척 스윽, 정신이 나간 데드 경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부탁할게요.”

그러자 핫, 정신을 차린 그는 가만히 주변을 살피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종이를 받은 데드 경은 바짝 각을 잡은 자세로 외쳤다.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반드시 훔쳐 오겠습니다!”

엘로니아는 누가 들을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되레 카르벨은 그를 당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

“전하. 헤일튼가에서 원로회 소집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에스피디 황실의 보좌관은 렌디먼 황제를 대신해 아셀리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는 곤혹스러운 듯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본래 황실 기사단을 움직이는 일은 신중해야만 했다.

자칫 우호적인 관계에서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셀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폐하께서 위중하시다는 소문이 흘러나가면 욕심을 부리는 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를 위한 방비였을 뿐. 문제가 될 여지는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헤일튼 공의 승인 없이 진행된 것이라 이에 대한 절차는 밟으셔야 합니다.”

“이런 일로 원로원이 참석할 리 없습니다. 무의미한 일이에요.”

어차피 카르벨이 그냥 넘어갈 리 없다고 예상했던 일이었다.

원로원들은 대부분 고지식하고 원리원칙을 따지는 이들이었다.

고작 이런 일로 움직일 만큼 부지런하지도, 카르벨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을 리도 없었다.

원로원에게 카르벨과 아셀리는 이단이었다.

헤일튼가의 방계가 대놓고 무시할 정도로 말이다.

오래전 반란군을 몰아낸 업적으로 렌디먼 황제가 그에게 권력을 쥐여주고, 가문의 이름과 정령사와의 약혼이라는 배경들이 겉으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주었을 뿐.

‘결국 나와 다르지 않아.’

혈통집에도 쓰여 있던 가짜 신분까지.

유모가 구해준 시약이 잘못된 게 분명했다.

아셀리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이래서 뒷골목 불량한 연금술사 놈들을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일전에 유모가 황후를 죽일 때 썼다던 독초라 믿었거늘.

그대로 업무를 이어받았다는 제자는 별다른 능력이 없는 사람인 듯싶었다.

렌디먼 황제의 차에 독초 양을 늘려도 어째서인지 죽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아셀리의 무미건조한 답에 보좌관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참석을 밝힌 원로원이 있습니다.”

“한둘 정도면 참석자 명단에서 한참 모자랍니다.”

“그게…….”

그는 곤란한 듯 입을 다물고는 아셀리의 책상 위에 명단을 내려놓았다.

“펠런 백작가에서 제일 먼저 참석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백작위를 그대로 넘겨받았기 때문에 그녀에게도 원로회에 참석할 권리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래도 고작 한 가문으로는 열릴 리 없었다.

그러나 보좌관은 끝없이 명단을 줄줄이 읊어냈다.

“바일가, 로펠가, 아벨린가…….”

“모두 헤일튼가의 기사로 있는 이들의 가문이로군요.”

“그뿐만 아닙니다.”

보좌관은 손으로 명단 아래에 사인이 된 부분을 가리켰다.

동시에 아셀리의 눈동자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헤일튼가의 방계 가문들에서도 전부 참석 의사를 밝혔습니다.”

말도 안 된다.

카르벨이 가문을 이은 뒤로 거의 보지 않고 살다시피 한 지 오래였다.

알고 싶지 않아도 연회 때마다 기묘하리만큼 갈라선 이들을 모를 수 없었다.

고작 국경 경비를 강화했다는 이유로 참석할 만큼 의리나 정치적 이득이 있을 관계가 아니었다.

아셀리는 종이를 들어 다시 한번 가문 명을 확인했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 보좌관의 음성이 울렸다.

“최소 참석자 인원. 충족하였습니다.”

“그럼…….”

“원로회를 소집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셀리는 목이 바짝 마르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

“……그럼 원로회 소집 날을 잡도록 해요.”

“예. 일정 공문으로 보내겠습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보좌관이 나간 뒤 집무실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명단이 적힌 종이를 쥔 아셀리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유모, 유모…….”

뒤에서 어떻게 구슬렸는지 모르겠지만, 빨리 렌디먼 황제를 죽이고 즉위해야만 한다.

원로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은 황제뿐이었다.

아무리 대리로 업무를 맡고 있다고는 하나, 그녀는 황제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유모에게 뒷골목 연금술사에게 더 확실하게 증거 없이 죽일 수 있는 약초를 얻어오라고 지시한 차였다.

황후를 죽였을 때와 같은, 효과적인 그 독초를 말이다.

‘리프리 저하가 좀 더 제 역할을 해주길 바랐는데. 눈치 빠른 여우 새끼 같으니라고.’

곰처럼 굴더니 중요할 때에 바로 노선을 변경하다니. 짜증이 솟구쳤다.

아셀리는 창백한 얼굴로 문밖에 있을 시종을 향해 소리쳤다.

“유모는 어디 있어!”

“그, 그게……. 외출 후 아직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면 들어오라고 전해줘. 급한 일이라고!”

“아, 알겠……. 어, 오셨어요!”

시녀의 어리숙한 답이 갑자기 끊겼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문이 열리고 비장한 얼굴의 유모가 들어왔다.

벗을 틈조차 없었는지, 로브를 뒤집어쓴 채였다.

그녀는 엄숙한 표정으로 시녀에게 문을 닫을 것을 눈짓으로 알렸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아셀리는 되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구했어?”

유모는 아무도 없는 집무실을 예민하게 둘러본 뒤,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셀리는 다급하게 되물었다.

“왜 답이 없어. 구하라고 한 건 구해 왔냐고!”

“그게, 전하…….”

유모는 잔뜩 굳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뒷골목에 찾아갔는데 말입니다. 글쎄, 독초를 전부 도둑맞았다지 뭡니까.”

***

헤일튼 공작저의 집무실.

엘로니아의 얼굴 양옆으로 찰싹 붙은 닉스와 님프는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책상 위에 놓인 퀴퀴하고 허름한 자루를 노려보고 있었다.

특히 닉스는 엘로니아의 코를 움켜쥐며 말했다.

[저런 고약한 건 어디서 구해온 거야? 맡지 마! 몸에 안 좋은 느낌적인 느낌이야!]

‘냄새 맡고 죽는 것보다 숨을 못 쉬어서 죽는 게 더 빠르겠는걸…….’

엘로니아는 모자란 호흡을 입으로 버겁게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데드 경은 활짝, 아주 기쁜 듯이 외쳤다.

“각하와 마님께서 지시하셨던 대로 훔쳐 왔습니다!”

그는 어깨를 크게 펼치며 해맑게 말을 덧붙였다.

“거기 있는 거 전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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