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원로회를 위한 초석
에스피디 제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차가 오늘따라 더뎠다.
벽 하나만 넘으면 에스피디 제국인데도 어째서인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너무 오래 걸리자, 결국 마부가 먼저 곤란한 듯 입을 열었다.
“공작님, 어제부로 에스피디 제국의 입국 절차가 까다로워졌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네요.”
그의 말을 들은 카르벨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공문을 받은 기억이 없는데.”
국경 지역의 수비에 관한 내용은 기본적으로 총사령관인 카르벨에게 우선적으로 보고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가 라티에 왕국에 있었다고 해도, 모든 연락 수단이 막힌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헤일튼 공작가에서 라티에 왕국은 수시로 연락하던 관계였다.
적어도 방법을 몰라서 안 했을 리가 없다.
‘카르벨의 승인 없이 국경 경비를 강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엘로니아가 알기로는 한 사람뿐이었다. 렌디먼 황제.
하지만 그는 현재 국정에서 대부분 물러나 있는 상황.
“아셀리 전하로군.”
엘로니아의 생각을 그대로 읊어낸 듯 카르벨의 나지막한 음성이 울렸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데.”
카르벨의 예민한 시선이 잠시 창밖을 향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마차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 주변을 호위하던 기사들이 말을 탄 채로 다가왔다.
그들도 현 사태에 대해 어림잡아 가늠을 하고 있는 모양인지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카르벨은 조용히 명령했다.
“현 경비 강화에 대해 헤일튼가에서는 승인된 바가 없다. 내 이름으로 전하라.”
“존명.”
기사들이 말을 이끌고는 짐꾼 마차를 헤치고 앞으로 향했다.
카르벨은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뒤, 다시 마차로 돌아왔다.
엘로니아는 걱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전하께서 승인하신 일인데, 이렇게 엎어도 돼요?”
“전시 상황도 아니고, 라티에 왕국은 에스피디 제국과 가장 우호적인 나라다. 저들도 과잉 경비라는 걸 알고 있어.”
“그럼 왜…….”
“발목을 잡겠다는 거겠지.”
카르벨은 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떻게든 라티에 왕국에서 그들이 일찍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국경의 경비까지 건드렸으니 어이가 없을 법도 했다.
아셀리가 이렇게 시간을 끌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엘로니아는 절로 드는 걱정에 조금 불안한 듯이 되물었다.
“폐, 폐하는 괜찮으실까요?”
“괜찮으니 이렇게 금방 들킬 수까지 썼겠지. 위급했다면 보란 듯이 전시했을 사람이니.”
카르벨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짐꾼 마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닌 옆으로 비켜서 헤일튼가의 마차 한 대만 지나갈 법한 길을 만들어 주었다.
곧 카르벨의 명령을 받고 갔던 기사들이 돌아와 말을 전했다.
“각하께서 먼저 지나가시라 합니다. 현재 전언을 전달 중이니 나머지 경비는 차차 풀릴 것 같습니다.”
“알겠네.”
카르벨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들의 말을 끊어냈다.
그렇게 멈춰 있던 마차가 움직였다.
***
헤일튼 공작저에 도착하자 시종들과 집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리 오래 저택을 비운 것도 아닌데, 에이미는 몇 년 만에 만났다는 듯이 반겼다.
“마님! 마님이 없어서 아침마다 얼마나 허전했는지 몰라요.”
“없는 동안 휴일이라 생각하고 좀 쉬지 그랬어.”
마차에서 내린 엘로니아가 어색하게 웃자, 대기하고 있던 데드 경이 눈치 없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저희끼리 괜히 각하와 싸우셔서 물 좋고 공기 좋은 라티에 왕국에 터를 잡으시고 안 오시는 거 아니냐고 말이 많았, 합!”
물론 카르벨의 살벌한 미소에 끝까지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누군가 돌아왔을 때 이렇게 반겨주니 괜히 기분이 간지러웠다.
엘로니아는 쑥스럽다는 듯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아니야. 가서 바다도 보고, 왕비 전하도 얼마나 다정하신지. 오히려 즐거웠어.”
“라티에 왕국이 볼거리가 많죠! 꽃축제가 열리면 길거리가 온통 화사하다고 들었어요.”
그간 카르벨의 눈치를 보느라, 라티에 왕국에 대한 말을 아껴 왔던 걸까.
다들 모른 척 늘 입에 올리지도 않았던 라티에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고 있었다.
물론 가끔씩 카르벨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그……. 시간 되면 마님도 가보시는 건 히, 힘드시겠죠?! 하하, 에스피디 제국도 좋지요!”
얼마나 눈치를 주길래 에이미가 이렇게 굳어 있는 거야?
엘로니아가 휙 고개를 돌려 카르벨을 확인했으나, 늘 보던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기분 탓인가?’
짧게 고개를 갸웃한 그녀는 애써 에이미의 말을 받아넘기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카르벨의 집무실까지 무사히 오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후, 다들 말은 안 해도 라티에 왕국에 엄청 가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예전에는 리프리가 선물도 많이 가지고 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확실히 좋더라고요.”
그래도 탁 트인 곳을 보고 와서인지 몰라도 마음이 가뿐했다.
엘로니아는 어깨를 크게 들었다가 놓으며 크게 숨을 내쉬듯 외쳤다.
“좋은 것도 봤으니, 이제 힘을 내 봅시다.”
문제는 아셀리였다.
원로회를 열면 해결될 일이지만, 문제가 있었다.
엘로니아는 소파에 앉으며 비장하게 카르벨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카르벨. 원로회를 열 만한 트집 하나 없을까요?”
아무래도 에스피디 제국에 있는 이들이 전부 모이는 자리였다.
당연히 중대한 안건이 아니면 여는 일이 쉽지 않을 터.
‘렌디먼 폐하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증거를 내기도 쉽지 않고…….’
해독이 증거가 될 수 있겠으나, 정작 아셀리가 탔다는 결정적인 단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서 찻잎을 구하기는 했을 거 아니야. 다 뒤져 봐?’
닉스와 님프에게 부탁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먼 나라까지 가서 독차를 공수해 왔을 리는 없으니, 해봤자 제국 안.
곰곰이 고민하는 그녀의 앞에 카르벨이 마주 앉으며 말했다.
“방금 있지 않은가.”
“네? 뭐가요?”
“총사령관의 허가 없는 과잉 경비.”
“그걸로 가능할까요?”
트집이야 잡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이 지긋하고 보수적인 원로원이 움직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도 아닌, 업무를 대리로 맡는 아셀리의 작은 실책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헤일튼가의 방계가 약속대로 참석한다고 해도……. 숫자가 너무 부족해.’
늘 최악을 상상하는 버릇 때문일까. 엘로니아는 본능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정작 카르벨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하나가 더 있지.”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이며 집무실 책상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떠나기 전까지 보았던, 방계가 가져왔던 시약병이 있었다.
“이런 조악한 물건에 대해 관심이 많은 자가 있잖나.”
“누구요?”
리프리 저하인가?
선뜻 대상이 떠오르지 않아 눈만 끔뻑이고 있자, 카르벨이 씨익 웃었다.
그는 마치 퀴즈라도 내듯이 조금 여유롭게 물었다.
“아셀리 전하께서 저걸 어떻게 구했을까.”
“음……. 아무래도 눈에 띄는 분이시니 사람을 시켜서……?”
“그럼 그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부탁할까.”
“예전부터 거래하던 곳일 확률이 높겠네요……. 아!”
순간 엘로니아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이런 조악한 물건에 관심이 많고, 실제로 능력도 있는 사람.
그리고 아셀리와 이미 한 번 거래를 한 적이 있는 남자.
엘로니아는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반갑게 답했다.
“상단주 키레일 씨!”
“맞아. 그리고 그 상단주가 아주 꾸준히 헤일튼 저를 깔짝이고 있었지.”
카르벨이 창문 밖을 보며 혼잣말인 듯 설명하는 듯 말했다.
엘로니아도 덩달아 창문 밖을 확인했지만, 일상적인 정원과 기사들이 보일 뿐. 별다른 손님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카르벨은 익숙하게 설렁줄을 흔들어 시종을 불렀다.
“밖에 손님이 계실 거다. 모시고 와.”
“예……?”
시종 역시 처음 듣는 소리인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카르벨은 소파에 편안하게 기대고 앉아 조금 거만한 투로 지시했다.
“정문에 나가서 나타나지 않으면 재밌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전해.”
“아, 알겠습니다…….”
시종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눈치였으나, 일단 그가 명령하니 알았다고 고개를 숙이는 눈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귀신같이 키레일이 로브를 흩날리며 찾아왔다.
“역시 헤일튼 공작이라고 해야 하나요. 어떻게 아셨답니까?”
“기척을 숨기려면 더 치밀했어야지.”
“대부분은 이 정도면 몰라요. 카르벨 공이나 아시는 일이지요.”
키레일은 시종이 안내를 하기도 전에 빈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로브의 모자를 휙 젖힌 뒤 눈을 빛내며 물었다.
“먼저, 우리 호칭 정리부터 해 주시죠? 각하라고 불러야 합니까, 아니면…….”
키레일은 전부 다 아는 듯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목소리를 줄여가며 물었다.
“전하?”
어디까지 아는 걸까.
엘로니아는 너무 놀라서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일단은 공식적으로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리프리와 라티에 왕비와 왕을 제외한다면.
이들의 성격으로 보아 새어 나갈 리도 없었다.
차마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리는 엘로니아와 달리 카르벨은 날카롭게 답했다.
“이 저택이 어디인지 잊은 모양이군. 궁처럼 커서 헷갈렸나.”
“아, 공작님. 아닙니다. 제가 또 이런 거에 눈치는 빠삭하지요.”
능글맞게 웃으며 눈치 빠르게 호칭을 바꾸는 모습이 대충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카르벨은 예상했다는 듯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시약병을 던지며 물었다.
“그래서, 이 시약은 누가 만든 것인지 알고 있나.”
“이거, 안 그래도 제가 판매나 해 볼까 했던 건데 말입니다. 쯧, 한발 늦었구먼.”
그는 아쉬운 듯 시약병을 대충 흔들어 보였다.
한쪽 눈을 감고 한참을 들여다보던 그는 고개까지 기울여가며 침음했다.
“흐음……. 되게 대충 만들었는데, 내용물도 싸구려고.”
“싸구려라고.”
“이거, 아무리 봐도 뒷골목 놈들이 만들었지 싶네요. 저희 상단은 이렇게 허접한 것은 안 쓰거든요. 고급 재료로 고급 손님만 받는 전략이라.”
그는 테이블 위에 툭, 병을 던지며 두 손을 비볐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더 좋은 시약은 필요 없으십니까? 이건 그냥 대충 만든 거지만, 저희 쪽 물건은 무조건 색도 똑같이 나와요. 오차율 0.001%!”
“이걸 누가 팔았는지 알아 오면 비싸게 구매하도록 하지.”
카르벨의 제안에 솔깃했는지, 키레일이 신이 난 듯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누가 먼저 묻지도 않았는데 줄줄줄 말을 내뱉었다.
“뒷골목 놈들 중에 이 정도 급을 만드는 녀석들이야 손에 꼽죠. 어디 보자, 하나, 둘…….”
손가락 열 개를 쫙 펼쳐서 숫자를 세듯 접어 보이는 그에게 엘로니아는 재빨리 되물었다.
“그들 중에 독초를 잘 다루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엥, 독초요?”
“네. 특히 색이 없고, 향이 옅으며 꾸준히 복용해야 죽음에 이르는 독초요.”
엘로니아의 질문에 잠시 턱을 문지르던 키레일은 두 손가락을 쫙 펼쳐 보였다.
“두 명이요.”
다행이다. 금방 찾아낼 수 있겠구나!
환호하려던 찰나. 그가 나머지 한 손가락도 접으며 씨익 웃었다.
“그 중 노친네 하나는 죽었고, 지금 그 제자 홀로 이어가고 있죠. 고로 한 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