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별장 관리인
별장은 오벨리아 왕비가 말한 것처럼 바닷가 근처에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공기에 미세하게 소금기가 섞여 있었다.
리프리는 제법 운치 있는 별장 앞에 서서 그들을 안내했다.
“여기입니다. 저도 한 번도 온 적이 없어서 처음 보네요.”
적당히 담쟁이넝쿨이 올라간 벽.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별장.
구석에는 나무로 만든 듯한 그네까지 있는 자그마한 정원은 보기 좋을 정도로 아기자기하게 느껴졌다.
‘그네까지 있다니. 전대 헤일튼 공작 부인께서 엄청 철저하게 살뜰히 꾸며두셨었구나.’
누가 본다면 정말 아이라도 있었겠구나 믿을 만했다.
카르벨 역시 이곳에 온 적이 없었으니 실상 저런 작은 그네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말이다.
만약 사정을 몰랐다면, 사실 그녀가 정말 출산했다고 믿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가만히 별장의 주변을 둘러보던 카르벨이 조용히 읊조렸다.
“관리가 잘 되어 있군.”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엘로니아는 이 별장이 과하도록 관리가 잘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프리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들어 별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형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담쟁이넝쿨도 누가 정리를 하는 모양이군. 창문 위로 더 올라가지 않는 걸 보면.”
“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관리인이 있는 것 같은데. 비용은 지불하셨습니까?”
“아니. 그랬다면 별장의 존재를 몰랐을 리 없지.”
오벨리아 왕비가 직접 관리를 한 걸까.
열쇠도 가지고 있었겠다, 위치도 알고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일이었다.
하지만 오벨리아 왕비와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정작 관리인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는 게 이상했다.
‘관리인이 있다면 굳이 열쇠를 주지 않으셔도 되지 않아?’
리프리도 있겠다, 관리인이 대신 문을 열어줘도 될 일이지 않은가.
짧은 시간이었지만 진솔했던 오벨리아 왕비를 떠올려봤을 때 그녀가 이를 알았다면 함구했을 리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벨이 슬쩍 엘로니아를 응시했다.
분명 오벨리아 왕비에게 무언가 들은 게 없냐고 묻는 눈치였다.
때문에 엘로니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없으셨어요.”
“그럼 도둑이 들었을 수도 있겠군.”
“설마요. 왕실의 사유지에 누가 간 크게…….”
“10여 년이 넘게 방치되지 않았던가. 별장이라고는 하지만 귀족이 아니라면 살기에도 나쁜 조건은 아니니.”
사실 데브니 남작저보다 훨씬 좋았기에 수긍이 갈 수밖에 없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알음알음 모이게 되는 법.
찰그랑. 열쇠를 꺼낸 그가 리프리에게 가볍게 던졌다.
자연스럽게 열쇠를 낚아챈 리프리는 망설임 없이 별장의 본관 문을 열었다.
누군가 기름칠을 주기적으로 한 듯이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내부 역시 오래되어 보이기는 해도,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리프리가 먼저 들어가고, 카르벨과 엘로니아가 뒤따랐다.
적당히 시원한 내부를 느끼기도 전, 순간 엘로니아의 시야가 가로막혔다.
헉, 소리를 내기도 전. 날붙이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카르벨의 음성이 들렸다.
“누구지.”
그제야 엘로니아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이가 카르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꺼냈는지, 검이 뽑혀 있었다.
리프리 역시 잔뜩 날이 선 모습으로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인기척은커녕 자그마한 날벌레 하나 본 적이 없는 엘로니아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덕분에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살벌한 분위기에 잔뜩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뭐, 뭔데. 뭐가 있어?’
긴장으로 침묵이 흐르기를 잠시.
어디선가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중년 남성이 삽을 들고는 문틈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누, 누, 누구시길래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오십니까!”
덜덜덜, 패기롭게 물은 것과 달리 삽을 꽉 그러쥔 그의 손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로 중년의 여성이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 모습이 어디선가 본 듯이 낯익었다.
‘어, 설마…….’
엘로니아가 말을 뱉기 전.
카르벨이 다시금 엘로니아를 붙잡아 자신의 품에 감싸 안았다.
중심을 잡기 위해 그의 품을 다급하게 붙잡았을 때.
뒤에서 변성기가 온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세요?”
“가이릭! 이리 오렴. 얼른!”
중년 남성이 큰 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검은 머리에 처진 눈매. 묘하게 순해 보이는 인상. 그리고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로엘 황태자와 닮아 있었다.
혹여 카르벨이 검으로 베어낼까 두려워 엘로니아는 다급하게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아, 안 돼요! 저희가 찾던 분인 것 같아요!”
엘로니아의 외침에 놀랐는지, 가이릭은 겁에 질린 듯 벽에 딱 달라붙어 슬금슬금 자신의 부모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아, 아빠!”
“그래, 가이릭!”
마치 아이를 빼앗으러 왔다고 느꼈는지, 뒤에 있던 중년 부인은 아이를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누구십니까. 무슨 일로 방문하셨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이 별장이 그대의 것이라고.”
“그, 그건…….”
차마 거짓말은 할 수 없었는지, 중년 부인이 말을 흐렸다.
엘로니아는 그 틈으로 빠르게 되물었다.
“헤, 헤일튼 공작가에서 왔습니다!”
“헤일튼 공작가요?”
이름을 듣자마자 두 사람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카르벨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럼 혹시…….”
“맞아요. 헤일튼 공작님이세요!”
그들은 영 믿기지 않는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카르벨을 응시했다.
분명 그에게서 로엘 황태자, 그들이 전대 헤일튼 공작에게 보냈던 그 아이의 그림자를 찾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엄연히 카르벨과 로엘 황태자는 다른 사람이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엘로니아는 운을 뗄 수밖에 없었다.
“전대 헤일튼 공작님께 보냈던 아이 때문에 왔어요.”
“우, 우리는 그런 거 모릅니다!”
“저희는 다 알고 왔어요.”
엘로니아는 말을 하며 카르벨의 검을 든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렸다.
부부의 반응을 보며 카르벨은 순순히 검을 내렸다.
더는 위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부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이 집은 헤일튼 공작 부인께서 저희에게 사용하시라 한 겁니다! 그러니 썩 나가십시오!”
“죄송하지만 아드님께서 돌아가신 지 시일이 좀 되었습니다.”
“……뭐라고요……?”
엘로니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찰그락.
남자의 손에서 삽이 힘없이 떨어졌다.
***
별장의 방 어느 곳에서 보아도 창문에서 바다가 보였다.
탁 트인 전경이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듯했다.
이 장소를 전대 헤일튼 공작 부인이 그들에게 지내도록 허락했다고 했다.
로엘 황태자를 자신들에게 맡겨준 보답으로 열쇠를 넘겼단다.
처음에는 좋은 집을 설마하니 그토록 방치했겠나 싶어 관리인처럼 지냈으나, 얼마 지나 지원해주던 돈이 끊겼다고 했다.
그렇다고 지리도 잘 모르는 라티에 왕국에서 다시 에스피디 제국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
집도 있겠다, 바닷가 근처라 먹거리도 풍부하겠다.
그냥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모양이었다.
언젠가 로엘 황태자의 소식을 들려주지 않을까, 희망을 지닌 채 말이다.
마주 앉은 부부는 가이릭의 손을 꽉 잡은 채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그럼, 저희 아들이 지금……. 황궁에서 죽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들은 전부 들어놓고도 재차 확인하듯 되물었다.
에스피디 황궁과 거리가 제법 먼 라티에 왕국.
거기서도 더 변두리 끝까지 들어와야 있는 별장.
사람들과의 교류라고는 일절 단절된 삶을 살았는지, 그들은 에스피디 제국의 정세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무단으로 왕국에 터를 잡은 입장이다 보니, 주변 사람들과 맘 편히 소통하기도 힘들었을 터.
그들의 눈에 붉은 기가 천천히 감돌았다.
“왜, 누가……. 왜 죽었답니까. 건강이 많이 안 좋았는데, 그 때문인가요?”
카르벨이 대뜸 진실을 말하려 했으나, 엘로니아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분명 직설적으로 말하면 상처를 받을 게 분명했다.
엘로니아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건강 때문은 아니었어요. 부모님의 성정을 닮아, 굉장히 좋은 분으로 자라셨습니다.”
“근데 왜…….”
“황녀 전하를 구하시려다 돌아가셨어요.”
엘로니아의 말에 리프리도 놀란 듯 커진 눈으로 엘로니아를 바라보았다.
부부 역시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황녀님이라뇨.”
“서고 화재 때. 황녀님을 구하시려다 돌아가셨어요.”
“……이렇게 찾아오신 것을 보면, 명예로운 죽음이 아니었던 게지요.”
부부의 질문에 카르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할 수 있었지만, 황녀께서 무시한 걸로 추정하고 있소.”
“하……!”
기가 막혔는지 중년 부인은 입을 틀어막았다.
이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는 가이릭만 멀뚱하게 앉아 어른들의 대화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엘로니아는 하나 더 부탁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녀는 헤일튼 공작저에서부터 가지고 왔던 것을 그들에게 건넸다.
둘둘 말린 여러 장의 종이였다.
가운데 묶인 리본을 보고 부부가 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펼쳐보세요.”
그들이 리본을 풀어내자, 어린 시절의 로엘 황태자의 모습과 크는 과정이 담겨 있는 초상화들이 주르륵 펼쳐졌다.
엘로니아는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들에게 말했다.
“저희가 후원하는 아이에게 부탁해, 로엘 전하의 초상화를 시기별로 부탁했어요. 황궁에도 남아 있지만, 저희가 가져올 수는 없어서요.”
“세상에…….”
그들은 손으로 로엘 황태자의 얼굴을 차마 만지지도 못해 허공에서 쓰다듬을 뿐이었다.
뒤늦게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이 혹여 종이에 묻을까 빠르게 닦아내기까지 했다.
힘들어하는 두 사람에게 아직 할 말이 더 남아 있었다.
그 말을 꺼내기가 참 어려웠다.
엘로니아가 머뭇거리는 것을 알아챈 걸까.
카르벨이 그녀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며 속삭였다.
“내가 하지.”
“괜찮아요. 제가 말을 꺼냈으니까 제가 할게요.”
“미움받는 건 내가 전문이라. 나야 익숙하다지만 그대는 괜한 꼴을 볼 필요는 없잖아.”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두어 번 그녀의 손등을 도닥였다.
그리고는 언제 그리 따뜻하게 말했냐는 듯. 다시 냉정한 얼굴로 돌아와 그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을 찾은 이유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네.”
“으흐흑, 아이까지 데려가 놓고 이제 저희에게 무엇을요. 또 가이릭을 데려가실 건가요?”
부부는 곤란해하는 가이릭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저었다.
차마 원망스럽지만 카르벨의 잘못은 아니라서 뭐라 할 수도 없는 눈치였다.
누군가의 탓이라도 하고 싶을 터.
로엘 황태자의 착한 성정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부부를 쏙 빼닮은 모양이었다.
이 모습을 무덤덤하게 지켜보던 카르벨이 조용히 말을 전했다.
“에스피디 제국으로 함께 갈 생각은 없는가.”
“어째서죠. 황태자를 바꿔 친 것을 들킨다면 저희는 최소 사형입니다!”
“그 부분은 공작저에서 책임지겠네. 그러니 황녀가 로엘 황태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그대들이 폭로해주었으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