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새로운 가족
방금까지 유하던 접객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라티에 왕비는 이런 분위기에서도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내 동생이 남긴 곳이야. 죽기 전까지 휴양하던 곳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요청드리는 겁니다.”
“헤일튼가를 승계한 뒤로 보러온 적도 없는 네가 갑자기 요청을 하니 슬프구나. 그런 말을 하려면 뭐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니?”
옆에 있는 라티에 왕은 이 사태가 흥미롭다는 듯이 관망하고 있었다.
카르벨은 이조차 예상하기라도 한 듯 여유로웠다.
“그래서 제국에서부터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라티에 왕비는 만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이 묻기까지 했다.
“보석이라면 질린다. 내가 장신구가 없어서 못 사는 것도 아니고, 지금 정도면 충분해.”
“마력이 들은 장신구입니다. 훌륭한 연금술사가 제국에 있습니다.”
“라티에 왕국에도 마법이 넘치는데, 됐다.”
“그럼 좋아하시는 살구잼은 어떠십니까.”
“왕궁의 주방장을 무시하니?”
라티에 왕비의 말에 모두 답을 찾지 못했다.
리프리조차도 카르벨을 변호해주려다가 차마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무엇을 제시하던지 거절할 심산인 듯했다.
엘로니아가 곁눈질로 살펴보니, 카르벨은 웃는 모습 그대로 굳은 모양이었다.
표정 관리를 하느라 그의 가슴이 작게 들썩였다.
카르벨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되물었다.
“그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이십니까.”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냉큼 답을 건넸다.
“며칠만 입궁해서 지내겠니?”
“……지내는 게 전부입니까.”
“그럼. 요즘 나도 나이가 들었나. 리프리도 매번 바깥으로만 돌고, 시녀들이 있다지만 아무래도 그들은 내가 불편하지 않겠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는지, 술술 덧붙는 말들이 아예 작정했던 듯싶었다.
“이렇게 엘로니아 양도 왔으니까 입궁해 있는 동안 말동무라도 해 주면 좋을 것 같구나. 나도 딸이랑 같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쇼핑하는 게 소원이었단다.”
“엘로니아는 전하의 딸이 아닙니다.”
“조카며느리면 뭐 어떠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안 됩니다.”
카르벨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혹여 그녀가 다른 제안을 덧붙일까 싶었는지,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엘로니아는 아직 전하의 며느리도 아니며, 그래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제게 원하는 게 있으면 제게 요청하십시오.”
그의 선에서 요구는 단번에 잘려 나갔다.
사실 엘로니아의 입장에서는 힘들 것 하나 없는 요청이었다.
본래 의상실에서 귀족 손님들을 많이 맞이하기도 했고, 다른 것보다 쇼핑 정도라면 어려울 일도 아니었다.
‘그거 한 번으로 전대 공작 부인의 별장을 알아낼 수 있다면 괜찮은 거래 아닌가?’
보아하니 라티에 왕비는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리프리와 같은 반듯한 아들을 키워냈을 정도이니 당연한 걸까.
카르벨의 눈치를 보던 그녀는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쇼핑 정도라면 도와드릴 수 있어요!”
순간 카르벨의 고개가 휙, 빠른 속도로 엘로니아를 향했다.
놀란 그의 표정과 상반될 정도로 라티에 왕비는 해사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과거에서 본 헤일튼 공작 부인과 퍽 닮아 있었다.
그래서 자매인 모양이다.
“어머, 정말이니? 역시 정령사님은 내 조카와 달리 맘이 넓구나.”
“저, 저도 여자들이랑 수다를 떨 일이 많지 않으니까요.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 그녀의 옆얼굴에 뚫어질 듯 카르벨의 시선이 박혀들었다.
엘로니아는 애써 모른 척 하하,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그 정도면 왕비님께서도 굉장히 많이 양보하신 거예요.”
“…….”
“표정 풀어요. 전하 앞이잖아요.”
못마땅한 카르벨의 표정이 온몸으로 드러나는 듯했다.
하지만 엘로니아의 요청에 그는 마지못해 더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수긍했다.
***
오델리아 라티에 왕비는 굉장히 쾌활했다.
리프리같은 아들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왕궁으로 의상실을 통째로 옮겨온 듯한 진풍경 속에서 오델리아가 보닛 하나를 가리켰다.
“이건 어떠니?”
“예뻐요. 고급스러우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아서 더 좋은 듯해요.”
“그럼 그 옆에 있는 건?”
“그것도 예쁘지만, 저는 하얀색 코르사주가 달린 쪽이 더 괜찮아 보입니다.”
엘로니아는 착실하게 예전에 일하던 경험을 살려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오델리아는 조용히 재봉사에게 요구했다.
“그 코르사주 달린 것과 어울리는 드레스와 장신구를 가져와 주겠어?”
“예, 전하.”
순식간에 그녀가 골랐던 보닛을 제외하고는 모두 방 안에서 사라졌다.
빠르게 비워진 공간은 다시 드레스와 장신구로 꽉 꽉 들어찼다.
오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엘로니아에게 물었다.
“여기서는 뭐가 제일 괜찮니?”
“어……. 다 예쁜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 오델리아 왕비가 입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고급스러운 것들이었다.
애초에 의상실에서 알아서 맞춰온 듯했다.
엘로니아의 답에 오델리아는 고민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부 다 구매하지. 엘로니아의 앞으로 보내주렴.”
“알겠습니다, 전하.”
깍듯한 인사와 동시에 물러나는 이들을 보며 엘로니아는 펄쩍 뛰었다.
“제 앞으로라뇨?!”
“라티에 왕국까지 왔는데, 먼 걸음 해 준 손님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렴.”
“아,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아요.”
“얘는. 보닛이 있으면 드레스가 있어야 하고, 드레스가 있으면 장신구가 있어야 하는 건 기본 아니니?”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으나 엘로니아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저 오델리아는 기쁜 듯 다음 스케줄을 읊을 뿐이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구두를 깜빡했네.”
“구두는 카르벨이 선물해준 게 많아서 괜찮습니다, 전하!”
“카르벨, 안 되겠네.”
순간 오델리아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어딘가를 노려보는 그녀의 모습에 엘로니아는 자신이 혹여 말실수라도 한 것인지 되짚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연인 사이에 구두를 선물하면 도망간다는 속설도 모르다니. 내 언젠가 그 녀석에게 단단히 일러놔야지.”
뜻을 알 수 없는 혼잣말뿐이었다.
엘로니아는 과한 선물에 몸 둘 바를 몰라 점점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굳이 타국의 왕비에게 이런 선물을 받아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고민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방금까지 콧노래를 부르던 오델리아가 다정하게 엘로니아를 불렀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네, 엘로니아 양.”
“아, 아니에요. 너무 과분한 선물을 주셔서 어찌 갚아야 할지…….”
“갚는다니. 내가 조카며느리한테 좀 사주겠다는데.”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엘로니아는 망설이다 점점 늘어나는 선물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솔직히 말을 건넸다.
“카르벨을 조카라고 인정해주신다고 하셨지만, 저는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잖아요.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것은 너무 감사드리지만…….”
그녀의 말을 가만히 경청하던 오델리아는 따스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짓으로 다른 이들을 모두 물렸다.
그러고는 올곧은 자세로 다 식어가는 찻잔을 들어 마시며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카르벨은 어릴 적부터 봐 왔지. 내 동생이 헤일튼 공작의 얼굴에 넘어가서 결혼한다고 할 때 불안했거든.”
……공작 부인께서도 상당한 미모이시던데 헤일튼 공작의 외모에 넘어가신 거였구나.
엘로니아는 묘한 기분으로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오델리아는 덤덤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주 오가고, 리프리와도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고 하니 정말 잘 가깝게 지냈어. 그래서 카르벨이 언젠가 일이 생겼을 때 제일 먼저 내게 의논을 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아…….”
“알다시피 카르벨의 성격이 조금 별로잖니.”
차마 여기서 공감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입장에 놓인 엘로니아는 급히 차를 마시는 것으로 대답해야 할 상황을 넘겼다.
문득 그들이 부러웠다.
공작가의 친자식이 아니더라도 기꺼이 카르벨을 조카라고 흔쾌히 답을 할 수 있는 라티에 왕과 오델리아 왕비.
리프리 역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그와 멀어졌던 거리를 차츰 좁혀가고 있었다.
오델리아가 이렇게 말을 하는 이유도 결국 카르벨을 걱정해서인 게 분명했다.
‘가족이란 이런 건가.’
엘로니아는 꾸역꾸역 올라오는 부러운 감정을 애써 눌러 잠재웠다.
피가 섞이지 않아도 가족일 수 있구나.
이렇게 진심으로 누군가가 따뜻하게 맞이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그녀가 바라던 이상향이었다.
외부적인 어떠한 것에도 그 사람을 믿고 사랑해주는 것.
남으로 태어나서 그러기가 어디 쉽던가. 가족끼리도 원수지간이 되는 세상에선 욕심이었다.
그래서 홀로 그저 정령들과 함께 지낼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조용히 찻잔을 들어 겉면을 만지작거리는 엘로니아에게 오델리아는 찬찬히 말했다.
“그런 카르벨이 데리고 왔으니, 너 역시 내 가족이나 다름없지.”
“네?”
엘로니아는 고개를 들어 정면에 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델리아는 특유의 해맑은 미소로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리프리에게 들었단다. 친부모에게 의지할 수도 없는 데다, 헤일튼 공작가에서도 어른이 없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니.”
“아, 아니에요. 저는…….”
“그러니 심심하면 와서 말동무나 해주련. 와서 카르벨의 욕을 한다면 아주 즐겁게 맞장구쳐줄 자신이 있단다.”
말을 꺼낸 그녀는 주변에 누가 없나 확인한 뒤, 슥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내 카르벨의 약점을 알려줄 용의도 있지.”
“뭐, 뭔데요?”
“그건 결혼을 해야 알려줄 거란다.”
본능적인 호기심에 대뜸 질문을 건넸던 엘로니아는 결혼이라는 말에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오델리아는 그저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모른 척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분명 엘로니아의 망설임을 느꼈을 텐데도 그저 모른 척 차를 마시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렇게 즐거운 날이 다 있구나.”
***
라티에 왕실에서는 카르벨과 엘로니아를 위해 방을 딱 하나 내주었다.
엘로니아는 믿기지 않아 카르벨에게 재차 되물었다.
“정말 하나예요?”
“그래.”
둘도 아니고 하나.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아 광활한 방 한가운데 서 있던 엘로니아는 입을 떡 벌렸다.
온종일 쇼핑에, 오델리아에게 왕국의 볼거리와 놀러 가면 좋은 장소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몇 군데는 조금 호기심이 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쳐서 돌아오니, 침대 위에 떡하니 카르벨이 있지 않은가.
‘돌아갈까.’
엘로니아가 잠깐 고민하는 사이, 침대에 기대어 있던 카르벨이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모님과 쇼핑은 즐거웠나.”
“아, 뭐……. 엄청 좋으신 분이라 좋았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동자만 굴리는 그녀에게 카르벨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들며 물었다.
“피곤할 텐데 눕지 않고 뭐 하는 거지.”
생각해 보니 카르벨은 덤덤한데 저 혼자 이러는 게 못내 자존심이 상했다.
입을 삐죽인 엘로니아는 일부러 큰 보폭으로 다가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