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붉은색
방계 친족들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무엇보다도 고귀한 자신들의 몸에 흠집을 내어, 피를 뽑는 일 자체를 좋아할 리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카르벨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 탓인지 아드라 남작 부인은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답했다.
“황녀님께서 최대한 가까운 친족으로 하라 하셨습니다. 가장 효율적으로 시약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요?”
“저는 상관없으니, 그럼 둘 다 하시지요.”
장갑을 벗은 뒤, 작은 단도를 들고 있던 리프리가 덤덤하게 답했다.
하지만 친족의 품에서 나온 약병은 하나였다.
“죄송하지만, 다른 시약은 저희가 테스트를 해본다고 사용해서 하나뿐입니다.”
왕족이 이렇게까지 나왔는데 거절하다니.
엘로니아는 냉정히 방계 친족들을 응시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들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거나 헛기침을 내뱉으며 피했다.
‘……아셀리 전하가 무어라 언질이라도 준 모양이네.’
현재 헤일튼 공작가의 가주는 카르벨이었다.
그러나 그가 없다면 후계가 없는 상황.
엘로니아 역시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지 않았으니 승계에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리프리 역시 타국 사람에다 모친 쪽 사람이니 제외된다고 하면.
‘헤일튼가를 넘겨받을 생각이구나.’
두 병이 있다고 한들, 그들은 한 병만 꺼냈을 것이다.
아셀리와 카르벨의 사이를 모르는 사람은 제국 내에 없었다.
혼담까지 깨졌으니 좋을 리 있겠는가.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투명한 속내가 가늠되자, 엘로니아는 작게 웃음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헤일튼가를 여기까지 유지한 게 누구인데.’
이런 가문의 개싸움까지 정령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을 듯했다.
엘로니아가 닉스를 부르려던 찰나.
“왕족의 몸에 흠집을 내자는 말을 참 쉽게도 하는군.”
카르벨의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차갑게 가라앉은 모습으로 방계 친족들을 직시하고 있었다.
“엘로니아. 선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굳이 정령의 힘까지 빌리지 말게.”
“그렇지만…….”
“감히 헤일튼가의 방계라며 오만하게 구는 모습을 보니,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군.”
카르벨의 서늘한 시선이 리프리를 향했다.
그러자 리프리는 손에 들고 있던 단도를 가볍게 던졌다.
휙, 허공을 가로지른 단도를 카르벨은 가볍게 받아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익숙하다는 듯이 하는 행동에 방계 친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서로 미워한 시간이 있어도 세월은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카르벨은 단검으로 자신의 검지를 가볍게 그었다.
실금처럼 핏물이 올라오자, 그는 병의 마개를 열었다.
똑, 핏방울이 맺히다가 병 안으로 떨어졌다.
녹색 액체와 섞이는 피를 보며 그가 물었다.
“자, 할 말이 있다면 더 해보게.”
“…….”
방계 친족들은 서로 눈치만 보다 팔꿈치로 툭툭, 서로를 건드렸다.
결국 등에 떠밀리다시피 온 남자가 마지못해 머뭇머뭇 손을 내밀었다.
카르벨이 단도를 들자 휙,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크게 났다.
순간 놀란 방계 친족들의 어깨가 크게 튀어 올랐다.
사실 엘로니아도 마찬가지였다.
‘베, 베어내는 줄 알았네……!’
다행스럽게도 카르벨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단검을 건네며 말했다.
“뭣들 하나. 어서 하지 않고.”
“……그,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방계 친족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가락을 그었다.
따끔했는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병을 찾는 그에게 카르벨이 손수 병을 건넸다.
“고맙…….”
방계 친족의 입에서 습관과도 같은 감사 인사가 나오려 했으나, 끝을 맺지는 못했다.
“만약 붉은색으로 변한다면 그대들은 가문을 걸고 엘로니아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게.”
말을 자르고 나온 스산한 음성에 방계 친족들은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방긋, 미소까지 지은 카르벨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 그대들 덕분에 파혼이라도 한다면 어쩔 뻔했는가.”
“그, 그게 무슨…….”
긴가민가하며 되물은 친족에게 카르벨은 그저 까닥, 고갯짓으로 병을 가리킬 뿐이었다.
친족의 핏방울이 병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액체와 섞여 움직이는 방향 그대로 붉은 실이 생기는 듯했다.
가볍게 병을 흔들자, 아래서부터 서서히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점차 아드라 남작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부, 붉은색…….”
붉은색. 카르벨이 헤일튼가의 핏줄이 맞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지, 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주 짙은 붉은색은 아니었으나, 녹색 시약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선홍빛은 띠고 있었다.
카르벨은 씨익, 한쪽 입매를 끌어올리며 냉정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과를 해야겠군, 아드라 남작 부인.”
“말도 안 돼. 이건……. 그래요. 황녀님께서 분명 가까운 친족 내로 하라 하셨는데, 직계도 아니고. 그래서 잘못된 걸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우기기로 작정한 모습에 엘로니아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카르벨은 어째서인지 여유가 넘쳐 보였다.
“그럼 품에 숨기고 있는 그 병도 내놓게. 리프리 저하로 확인해보지.”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시약병은 방금 사용하신 게 전부입니다!”
“그럴 리가.”
카르벨은 테이블 위에 놓인 단도를 가볍게 던졌다.
다트처럼 빠른 속도로 그녀를 향해 날아가자, 양옆에 있던 방계 친족들이 소리를 지르며 흩어졌다.
아드라 남작 부인은 도망조차 가지 못한 채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렸다.
찌익, 단도는 그녀가 아닌 그녀의 팔 부근을 찢고 소파 뒤에 박혔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팔 부근으로 약병의 코르크 마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로니아의 눈에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훤히 보였다.
“거기 하나가 더 있군. 아드라 남작 부인이 나이를 먹더니 이제 이런 것도 깜빡하시나.”
“……이, 이건.”
더는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입만 뻐끔거리는 그녀를 두고 카르벨은 리프리에게 물었다.
“저하, 괜찮으시겠습니까.”
“…….”
정작 리프리도 충격을 받은 것인지 붉어진 시약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깊은 한숨과 함께, 조금은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 혼란스러운 음성이 답을 건넸다.
“예, 형님. 얼마든지 협조……. 하겠습니다.”
카르벨은 능청스럽게 아드라 남작 부인에게 시약을 건네라는 듯이 눈짓했다.
그녀가 시약을 건네기는 했으나, 사실상 의미가 없다시피 했다.
이를 눈치챈 방계 친족 중 하나가 제일 먼저 빠르게 테이블 아래로 무릎을 꿇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디서 떠드는 소문들이 워낙 현실성 있던 지라 그러면 안 되는데…….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헤일튼 공. 내 잘못했네. 어릴 적 그대에게 잘해주었던 것을 기억해서 한 번만 용서하면 안 되겠나. 내 정말 선대 공작이 한 말도 있고 하여 오해했네.”
마지막까지 아드라 남작 부인은 부들부들, 창백해진 얼굴로 떨고만 있었다.
무릎을 꿇은 이들을 앞에 두고, 카르벨은 답했다.
“내게 사과할 필요 없다만.”
그가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지, 일순 그들의 얼굴이 환해지려던 찰나.
카르벨의 서늘한 음성이 얼어붙듯 차갑게 내려앉았다.
“어떤 식으로든 그대들을 다시는 내 영지에 들일 생각이 없거든.”
“……카르벨 공!”
“그리고 사과할 대상이 잘못되지 않았나. 나는 분명 시약을 하기 전, 명확하게 요구를 한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모든 시선이 엘로니아에게로 향했다.
카르벨을 향해 틀어져 있던 몸과 고개들이 빠른 속도로 엘로니아를 향했다.
그들은 간절하게 빌었다.
“정령사님, 저희가 무지하여 정령사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듯합니다. 한 번만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자연을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부디…….”
엘로니아는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이렇게까지 사과를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들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리프리조차 의심할 정도로 선대 헤일튼 공작이 꼭꼭 숨겨둔 데다, 혈통집까지 입양아로 적혀 있지 않았던가.
거기다 정령사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상황이니 이해를 못할 것도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다리에 매달릴 듯한 사람들 틈에서도 아드라 남작 부인은 드레스 자락을 꽉 쥔 채 떨고 있었다.
카르벨은 그런 그녀에게 짧게 일갈했다.
“아드라 남작 부인께서는 그대로 생을 달리하고 싶으신가 보군. 소원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 같은 기세에 엘로니아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카, 카르벨. 잠시만요!”
이를 어떻게 말려야 하나.
엘로니아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사이, 아드라 남작 부인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고고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평생 헤일튼가의 방계로, 귀족으로 살았을 그녀에게는 아마도 이 순간이 치욕스러운 듯했다.
“엘로니아 님……. 저희가 큰 잘못을 하였습니다.”
곱씹듯 차근차근 나오는 목소리의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엘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으면 카르벨의 검에 누구라도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일어나 주세요.”
하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옆에 버티고 선 카르벨 탓인 듯했다.
벌이라도 내리지 않으면 그는 용납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가만히 고민하던 엘로니아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대신, 나중에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무, 무슨 일이신가요.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나중에……. 원로회가 소집된다면. 무조건 저희 지시에 따라주세요.”
“……원로회가 열립니까?”
황궁에서 렌디먼 황제의 의견만으로 가늠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만 소집되는 원로회는 제국 내의 가주들이 모두 참가하는 자리였다.
각 가주들의 70% 이상이 원로회가 열리면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야만 열릴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그 어디서도 원로회를 연다는 소식은 없었다.
방계 친족은 물론, 리프리조차 의아한 시선을 건넬 때.
엘로니아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건 모르지만, 만약에 열린다면요. 그대들이 했던 잘못을 여기서 덮고 넘어가는 조건이에요. 만약,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엘로니아는 매우 실망한 듯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카르벨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다시 검을 들어 보였다.
“그냥 죽이는 편이 낫겠군.”
핑계야 붙일 게 많았다.
귀족을 음해하고 해하려 한 죄.
방계가 가문을 삼키기 위해 황실과 손을 잡은 죄.
타국의 왕족을 앞에 두고, 몸을 해하려 한 죄.
정령사를 모욕하려 한 죄 등.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방계 친족들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입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당연히 그리하겠습니다!”
“감사해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엘로니아는 어느 때보다 활짝 웃으며 밝게 답했다.
그제야 카르벨도 한결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변화를 모두 지켜보던 방계 친족들은 묘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정령사님도……. 묘하게 카르벨 공과 성격이 닮으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