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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204화 (204/234)

97. 전대 헤일튼 공작의 계획

엘로니아에게 있어 로엘 황태자는 생전 가까이서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정령이 보여 주는 과거 속 그는 어린 시절이 더 많았다.

그 때문인지 어린 모습이 더 눈에 익숙하기도 했다.

엘로니아는 믿기지 않아 가볍게 고개를 휘저은 뒤, 다시 초상화를 노려보았다.

아주 어린 아기의 이목구비라면 아직 또렷해지기 전이니 착각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 눈도 감고 볼살 통통하고, 머리색도 같은데 헷갈릴 수…….’

가만히 초상화를 들여다보던 엘로니아는 제 머리를 움켜잡았다.

‘없어! 없다고!’

그러기에는 머리 가르마를 비롯해 로엘 황태자가 황후의 품에 안겨있을 적과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았다.

이제는 당황스러움이 앞서기 시작했다.

‘그럼 카르벨은 어떻게 된 거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훔쳐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그가 로엘 황태자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록 입매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묘하게 가라앉은 묵직한 분위기가 위험하게만 느껴졌다.

예상과 달리 표정이 좋지 못하자, 눈치를 보던 노인이 애니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변명했다.

“아이고, 제가 말씀을 안 드렸네요. 애가 그린 것치고 솜씨가 좋다는 뜻이었습니다.”

“잠시 집을 둘러보아도 되나.”

“저희가 뭘 속이거나 그런 건 없습니다, 나으리. 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다. 정말 방금 제가 말한 것을 듣고 그렸을 뿐입니다!”

노인은 불편한 몸을 더욱 구부정하게 숙이며 카르벨의 흉흉한 눈빛에 고개를 조아렸다.

본질적으로 그가 가진 위압감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불안한 눈빛을 읽은 엘로니아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잠시 벽에 걸린 그림을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 그림이요……?”

“네. 너무 잘 그려서 찬찬히 좀 살펴보고, 괜찮으면 후원을 할까 해서요.”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으나, 카르벨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말을 맞췄다.

“확실히 재능이 있군.”

“그렇죠? 역시 카르벨이 보는 눈이 있다니까요.”

“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특히 머리카락의 디테일이 훌륭하군.”

“그뿐인가요. 피부결까지 옅은 명암이 들어간 게 어린아이의 실력이라고 믿을 수 없어요.”

마치 처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다는 듯이 화기애애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고 갔다.

입양아가 로엘 황태자라는 사실을 맞닥트린 탓에 미처 말하지 못했던 칭찬이었다.

그 누가 보더라도 애니의 재능에 감탄을 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제야 노인은 언제 의심을 품었냐는 듯 기민하게 애니의 등을 떠밀었다.

불편한 듯 절뚝거리는 그는 애니를 이끌고 좁은 집을 나서며 오히려 너그럽게 말했다.

“편히 보십시오. 벽에 걸려 있는 모든 그림이 애니가 직접 이야기만 듣고 그린 겁니다.”

삐거덕거리는 문이 허술하게 닫혔다.

카르벨은 능숙하게 바닥에 널린 낡은 천을 들어 문틈을 막았다.

안 그래도 괜한 이야기가 퍼져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녀의 우려가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해결해 버린 그를 보며 엘로니아는 놀란 듯 되물었다.

“안 그래도 보안이 너무 안 되는 듯해서 걱정했는데.”

“그대는 꼼꼼한 성격이니까.”

그는 문을 막아서듯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편한 대로 해.”

“……고마워요.”

본인도 혼란스러울 터.

괜찮은 척하는 그를 보며 엘로니아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뒤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닉스. 잠깐만 도와줄 수 있어?”

예상대로 조용했다.

예전이었다면 나타날지 확신할 수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건 못 참을 걸.’

닉스가 좋아하는 것들은 그녀가 줄줄 꿰고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고 비장하게 다시금 허공에 대고 읊조렸다.

“닉스, 이번엔 출생의 비밀이야. 엄청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 몽글몽글 물방울이 모였다.

비눗방울이 터지듯 나타난 닉스는 눈을 반짝이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출생의 비밀!]

“쉿, 쉿. 비밀이니까 조용히 해야 해.”

엘로니아가 빠르게 검지를 입가에 갖다 대자, 어차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도 닉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자그마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그는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잔뜩 기대감 서린 음성으로 되물었다.

[여기서 엄청난 일이 있는 거구나? 알았어. 이 닉스 님만 믿으라고!]

마치 엄청난 비밀 작전이라도 펼치듯 주변을 스윽, 훑은 그가 옆으로 살금살금 걸어왔다.

그러고는 엘로니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빨간 벽돌, 좁다란 집.

일렁이는 시야 속, 아이의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곧 아이를 품에 안은 전대 헤일튼 공작의 얼굴이 보였다.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하지 않으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르네.”

그의 품에는 로엘 황태자가 안겨 있었다.

열에 앓고 있는지, 뽀얀 얼굴에 온통 열꽃이 올라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처음 보는 부부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허름한 복색에 삐쩍 마른 체구.

집 안도 엘로니아가 처음 보던 때와 크게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낡아 있었다.

어디서 미음을 구해오기는 했는지, 로엘 황태자에게 먹이려다 실패한 듯 보이는 잔해가 유일한 먹거리였다.

부부는 선뜻 답을 하지 못한 채 손가락만 꼼질거렸다.

그런 그들에게 전대 헤일튼 공작이 단호히 말했다.

“그대들도 이렇게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아이가 사는 것보다는, 편한 곳에서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사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하, 하지만……. 만일 들키기라도 한다면 저희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겁니다.”

“그래서 그대들이 안전하게 있을 만한 곳을 내 마련해두었네.”

전대 헤일튼 공작이 품에서 고급스러운 양피지를 꺼내 그들에게 내밀었다.

부부는 망설이는 기색으로 주춤주춤, 그 양피지를 받았다.

전대 헤일튼 공작은 계속 우는 아이를 능숙하게 어르고 달래며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한평생 먹고사는 걱정은 하지 말게. 내 도와주는 이가 있으니.”

모친으로 보이는 이의 눈가에 발갛게 열이 올랐다.

곧 후드득, 눈물을 흘린 그녀는 이미 먹을 수 없게 된 미음을 한 번 보고, 전대 헤일튼 공작의 품에 안긴 로엘을 한 번 바라보았다.

차마 결단을 못 내리는 그녀를 두고 남자는 발간 코를 훌쩍이며 단호히 되물었다.

마지막으로 확답을 받고 싶다는 듯이 말이다.

“아이는 정말, 정말 더 좋게 지낼 수 있는 건가요?”

“물론. 좋은 교육과 좋은 의사를 곁에 두고 모든 이들이 모시면서 살 걸세.”

“……하지만 높으신 분들이 계신 곳은 위험한 곳이라고 들었…….”

남자는 말을 꺼내놓고 아차 싶었는지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전대 헤일튼 공작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품에 안긴 로엘 황태자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위험하지. 그래도 내 최선을 다해 아이를 지키겠네. 이는 헤일튼 가를 걸고 다짐하겠네.”

“……그럼, 그럼 부디 부탁드립니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자 여자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부부는 미련이 남은 듯 두 팔을 뻗으며 마지막 부탁을 건넸다.

“한 번만. 한 번만 안아 보면 안 되겠습니까, 각하.”

“물론. 주기적으로 그대들에게 편지도 보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아이를 품에 꽉 틀어 안았다.

부모와 헤어지는지도 모르는 아기는 그저 괴로운 듯 울기만 했다.

전대 헤일튼 공작은 지금의 카르벨처럼 그저, 허술한 문에 기대어 그 모습을 괴로운 듯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이 흐른 뒤, 부부에게서 아기를 넘겨받은 그는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따로 사람을 보내지. 그들을 따라가면 될걸세.”

전대 헤일튼 공작은 그 말을 끝으로 집을 나섰다.

엘로니아는 빠른 속도로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나오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의원이 곧장 아이를 넘겨받았다.

전문가의 손길에 아기는 언제 울었냐는 듯 잠잠해졌다.

이를 본 전대 헤일튼 공작이 조용히 되물었다.

“건강은.”

“좋은 편은 아닙니다. 다행히도 초기라 의식주를 단단히 하시면 금방 쾌차하실 겁니다.”

“그래야지.”

헤일튼 공작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들릴 듯 말 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자조적이게 내뱉었다.

“그 독한 황궁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할 테니.”

피식, 헛웃음을 흘린 그는 다시 고개를 든 뒤 꼿꼿한 귀족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런 뒤 의사에게 조용히 물었다.

“황후 폐하는.”

“……최근 배 속의 황손 저하를 유산하신 것으로 마음이 많이 아프신 듯합니다. 로엘 전하를 잃은 걸 인정하지 못하신다고…….”

“그리 독을 마셨는데 아이가 멀쩡할 리 있나.”

대상이 없는 누군가를 향한 살기가 느껴졌다.

마치 적이라도 있는 듯 정면을 노려보는 전대 헤일튼 공작의 뒷모습이 천천히 멀어져갔다.

현실감이 들 무렵, 엘로니아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언젠가 정원에서 로엘 황태자에게 고개를 조아리던 공작 부부의 모습.

온화하게만 보였던 그가 큰 소리를 내며 그들에게 화를 내던 낯선 그 얼굴.

“그래서야.”

엘로니아가 중얼거리자 카르벨이 몸을 일으켰다.

걱정스러운 시선과 함께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로엘 전하는 알고 계셨을지도 몰라요.”

“……뭐?”

엘로니아는 놀라움이 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두서없는 말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본인이 황손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셨을 거예요.”

“…….”

그가 황후의 태생이 아닌, 빈민가에서 데려온 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걸 지시한 사람이 전대 헤일튼 공작이었기에 그렇게도 화를 낸 게 분명했다.

‘그래서 사과한 거야!’

부모와 강제로 떨어트려 놓고, 가짜 황태자로 모두를 속이며 지내는 삶을 만들어 둔 공작 부부가 미울 수밖에 없다.

리프리의 말대로라면 황후 폐하와 전대 헤일튼 공작이 크게 다툰 일이 있다고 했다.

만약 로엘 황태자를 바꿔치기하자는 말이 나왔다면, 유산까지 한 황후가 쉽게 받아들일 리가 있겠는가.

제대로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엘로니아를 보며 카르벨은 한층 더 차분한 음성으로 달래듯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괜찮아. 심호흡하고. 그대가 본 것들은 도망가지 않으니 천천히.”

“후, 하.”

그를 따라 호흡을 내뱉던 엘로니아는 그제야 진정할 수 있었다.

엘로니아는 여전히 그녀를 꽉 끌어안은 카르벨의 품에서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로엘 전하는 사실 전대 헤일튼 공작님께서 바꿔치기한 아이였던 거예요.”

“그런 것 같더군.”

“근데, 그럼 분명 혈통집에 적혀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입양아는 카르벨로 표기되어 있었다.

엘로니아가 고개를 들어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르벨은 오히려 조금 덤덤한 듯했다. 마치 그녀가 할 말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설마……. 로엘 전하를 입양하고, 카르벨과 바꾼 건가요?”

공식적으로 빈민가의 로엘이 입양된 것은 헤일튼 공작저.

그리고 공작이 그 아기를 카르벨과 바꾸었다면.

“혈통집에는 나만 입양아로 표기되겠군.”

카르벨은 피식,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녀의 질문에 답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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