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203화 (203/234)

96. 갓난아기의 초상화

다그닥, 울퉁불퉁한 길을 힘겹게 가던 마차 안.

창문 너머로 지저분한 골목과 희한하다는 듯 마차를 구경하는 길거리의 아이들이 보였다.

엘로니아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주소가 가리키는 방향은 빈민가에서도 구석진 곳이었다.

볼수록 엘로니아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갓난아기를 떼어놓았다고 했는데……. 카르벨의 친부모님을 말하는 걸까?’

분명 전대 헤일튼 공작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로엘 황태자와 카르벨이 있던 것으로 보아, 다른 가능성은 떠오르지 않았다.

군말 없이 곧장 마차에 함께 올라주었던 카르벨은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엘로니아의 옆에 앉아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물었어도 엘로니아가 섣불리 할 수 있는 말은 없었기에 차라리 침묵이 편했다.

그런 그가 나지막하게 되물었다.

“표정이 안 좋군.”

“어, 그랬나요?”

그가 톡톡, 자신의 눈가 부근을 가리키며 우려스럽게 말했다.

“눈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어서. 기분 안 좋을 때 습관이잖아.”

그런 작은 부분까지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던 터라 엘로니아는 멋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빤히 들여다보는 시선을 차마 피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봐요?”

“내가 그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건, 기다리고 있는 거야.”

“……네?”

갑작스러운 말에 엘로니아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엘로니아의 눈매를 엄지로 가볍게 쓸며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대가 나를 온전히 믿어줄 때까지.”

그제야 깨달은 엘로니아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반박이라고 해봐야, 그의 친부모일 수도 있다는 소식밖에 더 전하겠는가.

하지만 말을 해야만 했다.

망설이던 찰나. 그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나는 생각보다 유약하지 않아, 엘로니아.”

“카르벨…….”

그는 톡, 그녀의 뺨을 작게 건드리며 애써 가벼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짐짓 고민된다는 투로 턱을 문지르며 심각하게 되물었다.

“혼자 생각하고 끌어안는 건 그대의 습관인 것 같은데, 지금부터 연습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엘로니아는 저도 모르게 나온 나쁜 습관을 카르벨의 입을 통해 다시 깨달았다.

그가 여러 차례 했던 말이었다.

늘 후통보만 해왔던 엘로니아의 입장에서는 일어나지도 않을, 불확실한 일을 먼저 그에게 의논하는 일이 상당히 어렵게 느껴졌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카르벨의 눈에 잠시 이채가 서린 듯했다.

곧 그의 낮은 음성이 재차 질문을 건넸다.

“해도 돼. 내가 감당할게.”

그녀의 손을 커다란 손이 꽉 감싸 쥐었다.

말을 해야만 했다. 그게 지금이 아니더라도 결국 그에게 해야 했을 말이었다.

엘로니아는 입을 뻐끔거리다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있잖아요, 카르벨. 제가 아까 말한 주소요.”

경청하듯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엘로니아는 조마조마하게 말을 이었다.

“그……. 카르벨의 친부모가 계신 곳일 수도 있어요.”

“……그렇군.”

각오했던 것보다 담백한 답이 돌아왔다.

카르벨은 오히려 조금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태연히 말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라 생각했지.”

“괜찮아요?”

“어차피 그대가 날 믿어주는 한, 무슨 문제가 있겠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순간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생각이란 하면 할수록 자꾸 최악의 가정을 하게 된다.

엘로니아 역시 여러 가지 상황을 떠올렸었다.

그리 심각하게 마음 앓이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막상 그의 반응을 보고 나니 우습게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카르벨의 말이 맞네.’

그녀 혼자 재단하고 그가 감당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렇게 물어보면 될 것을.

“그러네요. 어차피 카르벨은 변하는 게 없는데.”

엘로니아는 순간 풀린 긴장감과 편안해진 마음에 슬쩍 고개를 기울여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잠시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하지만 곧 팔을 뻗어 엘로니아를 감싸 안아주었다.

조금, 아주 조금은 그에게 기대도 될 것 같았다.

순간 다그닥, 마차가 천천히 멈췄다.

곧 앞에서 마부의 음성이 들려왔다.

“각하. 이 앞으로는 마차가 지나갈 수 없는 길입니다.”

“내려서 가야겠군. 여기서 대기하고 있게.”

“예.”

간단하게 마부에게 지시를 내린 카르벨은 아쉬운 듯 엘로니아의 손을 붙잡고 가뿐하게 마차에서 내리며 에스코트했다.

마부는 내리는 그녀를 보며 카르벨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게, 이런 빈민가는 주소가 명확하지 않아서요. 이 부근이기는 한데…….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됐다. 직접 찾아보지.”

“아무리 그래도 빈민가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소매치기도 많을 터이고…….”

“뭐가 걱정인가. 베어내면 그만일 것을.”

카르벨의 덤덤한 말에 마부가 조금 겁에 질린 듯 입을 다물었다.

실상 찾아가는 이가 카르벨의 친부모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의 동행은 삼가는 게 옳았다.

하지만 굳이 저렇게 겁을 줄 것까지야…….

엘로니아가 곁눈질로 그를 노려보자, 카르벨이 조용히 말을 바꾸었다.

“베어낼 일이 없도록 해야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싱긋 웃는 그를 보며 엘로니아는 다짐시키듯 단호히 일렀다.

“유혈사태는 안 돼요. 어린애들도 있다고요.”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아주 뻔뻔하게 미소를 지은 그는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차에서 내린 이후로부터 빈민가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일부는 대놓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

“거 불쌍한 거지들에게 적선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가만히 거지를 들여다보던 카르벨은 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 내밀었다.

약간은 조롱조로 말을 뱉었던 거지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하게 변했다.

주변에 있던 이들까지 덩달아 순식간에 그들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금화에 고정되어 있었다.

카르벨이 손만 움직이면 고개가 따라 움직일 것 같았다.

“금화! 금화다!”

거지는 달려들 듯 손을 뻗었다.

카르벨은 정적이면서도 빠른 동작으로 그의 손을 피했다.

워낙 큰 체격 탓에 아무도 머리 위로 올려진 금화에 손이 닿을 수 없었다.

그런 이들을 보며 카르벨은 상냥하게 질문을 건넸다.

“작은 구두 수선가게. 혹시 어디 있는지 아나. 알려주면 금화를 주겠네.”

“구, 구두 수선가게요? 이런데 구두 수선을 맡길 사람이 어디 있다고. 없습니다.”

“확실한가.”

“예, 물론이죠.”

“여기서 얼마나 지냈지.”

“한 4년 됐습죠.”

그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사라지기라도 한 걸까.

엘로니아는 조금 실망한 듯 카르벨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빈민가의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저요! 예전에 구두 수선가게가 있던 곳을 압니다!”

낑낑거리며 인파를 헤치고 온 소녀는 생각보다 어린 아이였다.

소녀가 나서자 거지는 혹여 금화를 빼앗길까 봐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네가 뭘 알아, 어린 게!”

“저희 할머니가 여기서 오래 지내셔서 알거든요? 예전에 수선방 할아버지랑 바늘을 가지고 탑도 쌓았다고 했어요!”

생각보다 디테일한 증언이었다.

엘로니아는 빠르게 그 소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수선 가게는 어디 있는지 아니?”

“아, 아뇨……. 하지만 할아버지가 어디 계신지는 알아요!”

소녀는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몸이 안 좋으셔서 수선을 그만두신 지 오래되셨거든요.”

“우리에게 안내해줄 수 있어?”

“그럼 금화를 주시는 건가요?”

소녀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빈민가에서 지내기에는 생각보다 영특해 보이는 아이였다.

카르벨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에 금화를 쥐여주며 말했다.

“안내하면 금화를 더 주지.”

“와!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소녀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들며 빠른 속도로 골목을 달려 나갔다.

구불구불한 골목은 전반적으로 습하고 우중충했다.

햇볕조차 위에 널린 천 쪼가리들이 막고 있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곳을 소녀는 익숙한 듯 폴짝폴짝 잘도 뛰어다녔다.

그사이 엘로니아는 부지런히 빨간 벽돌이 있는 곳을 찾았다.

“어, 저기 빨간 벽돌집……!”

엘로니아가 허름한 집 한 채를 찾기 무섭게 소녀는 그 집의 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할아버지, 애니예요!”

곧 안에서 괄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크를 하랬지!”

“지금 했잖아요!”

“이게 노크냐? 침범이지, 이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이 같으니라고!”

“흥. 제게 감사하실 걸요. 손님을 데려왔거든요!”

“뭐?”

애니라는 이름의 소녀는 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나으리, 여기예요! 할아버지가 예전에 구두 수선 가게를 하셨어요.”

그녀의 안내와 동시에 구부정한 허리에 나무막대를 짚은 노인이 힘겹게 집에서 나왔다.

그는 엘로니아와 카르벨의 행색을 보고는 놀란 듯 되물었다.

“높으신 분들께서 이곳까지 무슨 일로…….”

“예전에 수선 가게를 하셨다고요. 혹시 빨간 벽돌집을 아시는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알다마다요.”

노인은 손으로 자신의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집입니다.”

예상보다 너무 나이가 많은 그를 보며 엘로니아는 당황해 주춤거렸다.

하지만 카르벨은 정작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되물었다.

“집주인이 그대인가.”

“뭐, 그렇게 된 지 오랩니다. 살던 부부가 아이를 잃고 얼마 뒤 사라졌으니. 어차피 빈 집. 내가 산 지 좀 됐소이다.”

“……부부에 대해 아는 게 있나.”

노인은 눈꺼풀을 씰룩이며 모른 척 느리게 답했다.

“그게 뭐……. 워낙 오래된 일인지라. 기억하기가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제대로 기억해낸다면 적당한 보상을 하지.”

그의 말에 갑자기 노인의 목소리에 생기가 넘쳐흘렀다.

“아, 그 뭐더라.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주 애가 잘생겼어요. 갓난쟁이가 코도 오뚝하고!”

그가 콜록, 기침을 내뱉자 소녀가 부리나케 그를 부축했다.

애니에게 기댄 노인은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근데 뭐, 아이가 아팠던가 어쨌던가. 열이 막 오르니까 급하게 새벽에 난리를 치더니 얼마 뒤 애가 안 보였습니다요.”

“애는 어떻게 되었는가.”

“죽었다고 듣기는 했는데……. 하여튼 그 뒤 망명을 했다던가, 어쨌다던가 그런 소문이 돌았던 것도 같습니다.”

기억을 쥐어짜느라 일그러진 노인의 눈꺼풀은 더 오래전을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시나요?”

엘로니아의 질문에 노인은 애니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꽤 친한 사이인지 짧게 안쓰러운 시선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엘로니아와 카르벨이 있는 쪽으로 슬쩍 소녀의 등을 밀며 말했다.

“아기가 다 거기서 거기죠. 이 애한테 초상화나 맡겨보시지 그러십니까.”

“초상화요……?”

“말만 듣고 대충 그려내는데, 애 솜씨가 기가 막힙니다.”

사실 정령으로 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엘로니아는 괴팍한 노인의 말속에 숨은 뜻을 깨달았다.

소녀의 재능을 귀족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니라.

혹여 운이 좋아 눈에 든다면 후원을 받아 제 이름을 떨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카르벨이 거절하려던 찰나. 엘로니아가 빠르게 먼저 답을 내뱉었다.

“좋아요! 지금 보여줄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얘, 뭐 하냐. 얼른 들어가지 않고.”

소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운 듯 눈동자를 굴렸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빠른 속도로 빨간 벽돌집으로 들어갔다.

좁고 누추한 곳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탄과 누런 종이 한 장을 가져와 애니에게 건넸다.

벽에는 곳곳에 애니가 그린 듯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곳에서 노인은 무어라 애니에게 몇 마디를 건넸고, 곧 애니의 손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확실히 출중한 실력이었다. 빈민가에서 썩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이, 이게 맞을까요?”

소녀가 머뭇거리며 종이를 건넸다.

그러자 노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이 얼굴이다! 아주 똑같아!”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애니는 멀찍이 서서 카르벨에게 조심스럽게 종이를 건넸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이 처음인 듯 긴장한 눈치였다.

엘로니아는 카르벨에게 바짝 붙어 종이 안에 그려진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

로엘 황태자의 어릴 적 초상화와 똑같은 얼굴의 아기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