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빨간 벽돌집
엘로니아는 농담기 하나 없는 그의 담백한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혼자서도 괜찮다니까요. 오늘은 닉스도 있어요.”
슬쩍 손바닥을 펼쳐 닉스를 가리켰다.
[인간, 퍼즐 고마웠어!]
조금 유해진 닉스가 태연하게 손을 들어 받지 못할 인사까지 건넸다.
카르벨은 조금 씁쓸한 듯 입매를 늘리며 차분하게 답했다.
“정령도 충분히 대단한 걸 알지만, 가끔은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있는 법이야.”
“열쇠로 문을 열어주는 일 같은 거요?”
“그런 것도 포함해서.”
눈이 마주치자 카르벨은 그제야 싱긋 미소를 지어주며 슬쩍 몸을 틀었다.
엘로니아는 속으로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카르벨의 말이 맞아. 같이 해야 하는 일인데.’
전대 헤일튼 공작과 관련된 일이라면 응당 카르벨과 대화를 나눠봐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그의 말의 속뜻이 엘로니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지라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 괴리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엘로니아는 눈에 힘을 주며 답했다.
“미안해요. 다음에는 꼭 보고할게요.”
“보고를 하라는 게 아니라.”
카르벨은 그녀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 삶의 일부를 나눠줄 수는 없냐는 뜻이야.”
“……네?”
“궁금해. 그대가 뭘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늘 오전에는 일어나서 제일 먼저 뭘 했는지.”
“너무 사소하잖아요. 별거 없는 일상인데.”
“그 별거 없는 걸 나눠줘. 이런 것들 포함해서.”
그는 똑똑, 이미 열려 있는 문을 가볍게 두들기며 고개를 까닥했다.
마치 지금 이 일 역시 마찬가지라는 듯이 그가 말을 이었다.
“그대와 같이 나누고 싶은 게 많거든.”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렇구나.’
‘같이’라는 단어가 참 생소하게 들렸다.
엘로니아는 그 단어를 다시금 혀로 굴려 발음해보았다.
닉스가 부추기는 말에 너무도 당연하게 혼자 달려온 그녀였다.
혼자 결정하고, 혼자 헤쳐나가는 일에 너무 익숙한 탓이었다.
의논할 대상도 없었고, 부탁이나 일상을 설명할 누군가도 없었기에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보통은 이런 걸 다 말하는구나.’
생각해 보면 카르벨은 이따금 자신이 어느 시간에 무얼 하는지, 어디를 가는지를 말하곤 했다.
그리 위중한 일도 아니었고, 심지어 그녀와 하등 상관없는 일인데도 그랬다.
그녀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듯 내어준 공간을 가만히 보던 엘로니아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딱히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카르벨은 아무렇지 않은 눈치였다.
그런 그들 틈으로 끼어든 닉스가 엘로니아의 검지를 붙잡고는 낑낑거렸다.
[빨리, 빨리. 싸움 구경!]
“아, 알았어. 지금 들어가.”
엘로니아는 못이기는 척 전대 헤일튼 공작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치되어 있던 탓에 먼지가 좀 쌓이기는 했어도, 주기적으로 관리를 했는지 생각보다 깨끗했다.
조금 오래되어 보이지만 세월이 가져다주는 고풍스러움이 느껴지는 테이블과 말라서 더는 쓸 수 없을 듯한 잉크병.
빛이 바랜 듯 보이는 커튼과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책들까지.
엘로니아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카르벨 역시 새삼스러운 듯 탄식처럼 말을 내뱉었다.
“오랜만이군.”
“카르벨도 자주 들어왔었어요?”
“어릴 적에 아주 잠깐. 방에 잘 못 들어오게 하셨거든.”
“어, 왜요? 원래 가주의 방은 들어가면 안 되나요?”
데브니 남작의 방은 아주 활짝 열려 있었다.
엘로니아도 손쉽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단지 돈이 없는 탓에 정리할 시종도 없어 방은 정신없을 정도로 어지러웠고, 그래서 들어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헤일튼 공작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건 아니지만, 모르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지금까지도 모르겠으니.”
그의 대수롭지 않은 듯한 말투에서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엘로니아는 기민하게 방을 살폈다.
닉스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이곳저곳을 빠른 속도로 날아다녔다.
[이게 뭐야! 오오!]
순간 그가 눈을 빛내며 책장으로 달려들었다.
엘로니아는 잔뜩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그를 보며 되물었다.
“왜, 뭐야? 뭐라도 찾았어?”
[아니. 책장 뒤에 있는 창문에서 보니까 정원 뒤편이 보이길래.]
“……그렇구나.”
그걸 왜 그렇게 놀란 듯이 말하는 건데…….
엘로니아는 차마 카르벨이 기대할까 싶어 내색하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던 닉스는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허공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집중했다.
[으으음. 재밌는 거 없나. 생각보다 방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는걸.]
둥실둥실 떠다니던 그가 갑작스럽게 팍!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엘로니아에게 다가와 뺨을 팔로 감싸며 신이 난 듯 외쳤다.
[이거다, 이거! 싸움 구경이다!]
곧 그가 뺨에 입을 맞췄고, 엘로니아의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다시 시야가 트였을 때, 이전보다 조금 더 말끔하게 정돈된 방이 보였다.
여전히 컴컴했고, 마치 누가 들을세라 커튼부터 방문까지 꼼꼼히 닫혀 있었다.
‘뭐 이렇게 음침해…….’
엘로니아는 불길한 듯 주변을 훑었다.
닉스가 싸움 구경이라고 칭한 것치고는 너무 고요했다.
전대 헤일튼 공작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가만히 창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똑똑. 노크가 들렸다.
“들어갈게요.”
고운 음성과 함께 전대 헤일튼 공작 부인이 들어왔다.
일전에 보던 것과 달리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황후 폐하와 다투셨다고요.”
“방법이 없었소.”
“당신은 정말 부모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네요. 이번만큼은 저도 폐하의 편을 들 수밖에 없어요.”
퍽 단호한 말에 전대 헤일튼 공작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피곤한 듯 쓸어내렸다.
그 습관이 꼭 카르벨과 언뜻 보면 닮아 있어서 신기했다.
‘살아온 환경이 비슷해서 그런가. 이런 건 닮나 보네.’
숨을 죽인 채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어차피 그들이 엘로니아를 볼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과거가 펼쳐지면 이상하게도 큰 소리를 내기 힘들었다.
공작 부인이 짐짓 엄하게 그를 타일렀다.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건 어때요.”
“그럼 저 아이는 어쩌고.”
그가 고갯짓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엘로니아는 슬금슬금 옆으로 이동하며 천천히 창문으로 다가갔다.
헤일튼 공작저에 있을 만한 아이는 카르벨뿐일 터.
알면서도 꼭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헤일튼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니. 폐하께서도 나중에 내게 감사할 걸세.”
“당신 정말…….”
“부인. 무희가 낳은 아이를 보았나.”
“……아뇨.”
“금발에 자줏빛 눈동자. 제 어미를 똑 닮았더군.”
가만히 대화를 듣던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게 뭐가 문제예요? 제 어미를 닮았겠죠.”
“한데, 최근 들어 입궁할 방법에 대해 찾는 모양이더군. 주변에서 황제 폐하의 자식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어.”
“…….”
“당신도 사교계에서 들어서 알고 있잖아.”
워낙 소문이 빠른 동네였다.
엘로니아도 티타임에서 몇 번 겪어본지라 모르지 않았다.
물론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는 소식도 많았다.
그렇기에 더욱 날것으로 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창문에 다다른 엘로니아는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전대 헤일튼 공작 부부의 대화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가 이번 일로 쓰러지셨잖아요.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은 분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예요.”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는데, 해독제를 찾는 게 쉽지 않아. 그나마 여기까지 늦춘 것도 기적이다.”
“……알아요. 당신이 얼마나 황후 폐하를 아꼈는지. 알지만…….”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더 말릴 수 없는 탓이리라.
그런 그녀에게 전대 헤일튼 공작은 피식, 자조적인 미소를 흘리며 자신의 크라바트를 단단하게 고쳐 매었다.
“……일단, 빈민가에 한 번 더 가봐야겠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헤일튼 공작을 그녀가 막아섰다.
잔뜩 우려가 섞인 음성으로 그에게 말했다.
“여보. 나는 걱정돼요. 그 아이의 부모도 살아 있잖아요.”
“거금을 줘서 입막음은 했어. 주변을 탐문했는데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니 당신이 우려하는 일은 없을 거야.”
“사람이란 모르는 거고, 부모는 자식을 보고 싶어 할 거예요. 그것도 갓난아이를 품에서 떼어놓았는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엘로니아는 창문 너머의 정원을 훑었다.
당시 정원 뒤편은 아이들이 놀기 좋은 공간이었는지, 그네와 의자 등 현재와 달리 제법 잘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전하, 뭐 하세요?”
“카르벨. 이거 봐. 공작이 이번에 책을 빌려줬어.”
“……그런 게 재밌으십니까?”
카르벨과 로엘 황태자. 기껏해야 닉스의 나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 둘이 친밀하게 앉아 있었다.
‘뭐지……?’
엘로니아는 혼란스러웠다.
설마, 카르벨의 부모가 살아 있다는 건가.
분명 전대 헤일튼 공작이 가리킨 곳은 이 창문이었다.
‘……혈통집에도 입양이라고 되어 있었으니까.’
카르벨을 입양해서 하는 소리인 모양이었다.
심각한 헤일튼 공작의 방 안과 달리, 카르벨과 로엘은 평화로워 보였다.
“저는 책은 재미없더라고요. 검술은 바로바로 성과가 보이는데, 책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건 카르벨이 제대로 보지 않아서야. 잘 읽어보면 얼마나 재미있는데.”
“흠.”
어린 카르벨은 썩 동의하지 못하겠는지 이맛살을 찡긋거렸다.
달칵. 뒤에서 울린 소리에 지레 놀란 엘로니아의 어깨가 짧게 튀어 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전대 헤일튼 공작이 목이 타는지 물을 들이켜며 말했다.
“일단 아이 부모는 그쪽에서 냄새를 맡을지 모르니 멀리 타 국가로 보내는 게 좋겠어.”
“라티에 왕국은 어때요? 언니가 있으니 소식 받기도 좋고, 외국인도 많을 정도로 개방적이라 흠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대 별장은 어떠한가.”
“그것도 괜찮겠네요.”
공작은 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빈민가의 주소가 적혀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전대 공작 부인이 카르벨을 라티에 왕국으로 돌아가 낳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핑계겠지만, 그들이 손쉽게 타국으로 사람을 보내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곧장 나가려는 헤일튼 공작 부부의 모습을 본 엘로니아는 허겁지겁 그들의 곁으로 뛰어갔다.
슬쩍, 종이에 적힌 주소를 빠르게 외웠다.
“어……?”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마차 사고로 죽었던,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사고가 난 이유가 단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엘로니아는 머릿속으로 상세한 주소를 빠르게 읊조렸다.
곧 나갈 채비를 마친 전대 헤일튼 공작 부부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졌다.
열심히 주소를 외우던 엘로니아의 시야가 흐려지고, 곧 현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돌아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엘로니아는 잊지 않기 위해 소리쳤다.
“빨간 벽돌집에서 세 번째 골목, 자그마한 구두 수선가게 옆!”
놀란 카르벨의 얼굴이 보였다.
엘로니아는 그런 그에게 재차 외쳤다.
“지금 여기로 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