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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200화 (200/234)


 

93. 일시적인 휴전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리프리는 당황한 듯 닫힌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갔다.

아무래도 서로 감정이 좋지 못한 사이다 보니, 괜히 꼬아서 들었을까 봐 걱정되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참다못한 엘로니아가 도움이라도 되고자 입을 열려던 순간.

“……얼마 전에 아셀리 전하께서 보낸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리프리가 힘겹게 운을 떼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지금 이 선택을 하는 게 맞는지 의문스럽다는 듯 혼란스러워 보였다.

“비주기적으로 연락은 주고받았지만, 만남은 잦지 않았습니다. 한데 이번에는 독촉하시더군요.”

“에스피디 제국으로 갑작스럽게 방문한 이유가 그 때문이군.”

특별한 행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렌디먼 황제의 병세도 최근에 알았으니 확실히 이례적인 방문이기는 했다.

리프리의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고민하던 카르벨이 조용히 되물었다.

“서신이 언제 도착했지.”

“이 주일 전입니다.”

가만히 듣던 엘로니아는 익숙한 기간에 잠시 눈을 깜빡였다.

“제가 서신을 보낸 시기와 비슷하네요?”

“하루 이틀 정도의 차이로 받았습니다.”

그제야 리프리에게서 조만간 들를 일이 있다던 답신이 떠올랐다.

시기를 가늠해보던 엘로니아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카르벨도 이를 느꼈는지, 나지막한 음성으로 혼잣말인 듯 답을 하는 듯 말을 꺼냈다.

“엘로니아가 연회에서 정령을 입증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이군.”

“맞아요!”

아무리 봐도 진짜 정령사라는 사실을 들은 뒤, 급하게 도움을 요청한 듯했다.

흠, 하고 짧게 침음을 삼킨 카르벨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훑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톡톡, 가볍게 소파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는 의문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단순히 저하께서 그 문제로 헤일튼 공작가에 공식적으로 방문하셨을 리는 없으실 테고.”

“그것은 제가 함부로 입에 올리기 힘들군요.”

“누군가 렌디먼 황제 폐하를 해하려고 하기라도 했습니까.”

순간 덜컹, 놀란 듯 리프리가 몸이 크게 움찔했다.

덕분에 테이블 위에 있던 다 식은 찻잔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차가 튀어 그의 하얀 옷자락에 옅은 붉은색 자국을 남겼다.

이 정도로 동요하는 그를 처음 본지라 엘로니아도 덩달아 놀라고 말았다.

무언가에 의지하기 위해 더듬더듬 팔을 뻗은 그녀는 본능적으로 카르벨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

어째서인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카르벨이 미소를 삼키는 듯 손을 들어 자신의 입가를 가린 채 반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 저래?’

협상을 해야 할 당사자들이 서로 엉뚱한 곳만 보고 있었다.

멀뚱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쯤, 먼저 정신을 차린 리프리가 심각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런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그는 두 손을 깍지 껴서 고개까지 숙이고 있었다.

그 나름대로 퍽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고 온 모양이었다.

아니, 그보다 그 추측이 맞는 거였냐고요.

엘로니아는 오히려 아셀리의 대범함에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그래도 타국의 왕자에게 반역죄로 몰릴 수 있을 법한 일을 언급한다니.

엘로니아의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리프리가 다급하게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정확하게 그리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증거는 없습니다.”

“……의외군요. 그런 상황에서 제일 먼저 헤일튼 공작저를 찾았다는 것이.”

“형님께서 아셀리 전하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제국의 황태녀입니다. 가문의 번영을 위해 어떤 고발을 할 줄 아시고.”

“형님이라면 애초에 아셀리 전하와 합이 맞을 리가 없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답이었다.

‘……그 부분은 인정.’

실제로 아셀리는 혼자 주도하려는 면이 강했고, 그러다 보면 당연히 총사령관인 카르벨의 권한과 맞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굳이 혈통집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아셀리와 성격적으로 맞지 않는 편이었다.

카르벨은 리프리가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냉정한 분석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인정하던 엘로니아는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카르벨의 잿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꼿꼿하게 자세를 고쳐 앉으며 외쳤다.

“맞습니다! 아주 정확하게 보고 계시네요!”

대단하다는 의미에서 두 주먹을 쥐어 보이며 칭찬을 건넸다.

카르벨은 허를 찔린 듯 웃음을 짧게 내뱉었다.

분명 리프리의 미세한 경계심과 그를 신뢰하지 않는 기색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그는 이런 부분을 숨길 만큼 노련한 사내가 아니었으니 카르벨이 느낀 것이 맞을 터.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제일 먼저 헤일튼 가를 찾아왔다는 사실이 기묘하게만 느껴졌다.

그동안 서로 등을 지고 살아온 지 오래였다.

그나마 있던 인연조차도 라티에 왕국에서 강제적으로 이어준 것과 다름없었다.

카르벨은 믿기지 않아 재차 되물었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

“……저는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은 다 보여드렸습니다.”

리프리의 물색 눈동자가 후련한 듯 보였다.

그는 크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형님이 하시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보입니다.”

“……거래를 위해 정보를 드렸을 뿐.”

사실상 리프리 역시 렌디먼 황제가 걱정되어서 찾아왔을 터.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카르벨, 그 하나라는 사실을.

비록 선대 헤일튼 공작 부부와의 얽힌 일로 인해 완벽하게 믿지 못했을 뿐.

카르벨은 시선을 돌려 옆에 앉아있는 엘로니아를 짧게 응시했다.

시선을 느낀 그녀가 어색한 듯 옆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왜, 왜 그렇게 봐요. 제가 리프리 저하의 말에 동의해서 그래요?”

“아니.”

카르벨은 눈에 그녀를 꼼꼼하게 담은 뒤, 정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잔뜩 날을 세운 리프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믿지 마십시오. 하지만 아셀리 전하에 대해서는 이번만큼은 공조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증거가 있으십니까.”

“들으시면 아주 놀랄 만한 일도 있습니다.”

리프리는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더니, 한참 만에 머뭇거리며 악수를 받았다.

“그럼 며칠 더 머무르겠습니다.”

그의 답이 얼마나 이례적인지 헤일튼 공작저 시종들이 듣는다면 놀랄 터.

어릴 때 이후로 한 번도 공작저에서 머무른 적이 없던 그였다.

카르벨은 입매를 늘리며 친절히 답을 건넸다.

“그러시죠.”

***

복도를 걸어가는 엘로니아는 종종걸음으로 카르벨의 옆에 착 달라붙어 조잘댔다.

“거봐요. 제가 그랬죠? 분명 리프리 저하라면 들어주실 거라고요.”

“그렇더군.”

“아셀리 전하가 큰일 하셨네요. 이번 일로 리프리 저하와의 관계에 금이 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우뚝, 그가 걸음을 멈추자 앞서 나가던 엘로니아도 덩달아 멈춰 섰다.

빙그르르 뒤를 돈 그녀는 조용히 되물었다.

“왜요?”

“엘로니아.”

“네?”

덤덤한 얼굴은 처음인지라 무슨 말을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강제로 화해시켜서 그런가? 아니면 여전히 리프리 저하가 안 믿어서?’

슬쩍 고개를 기울여 그와 눈을 맞춘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괜찮아요. 제가 선대 공작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꼭 알아낼 테니까.”

순간 그녀의 어깨 위로 카르벨의 고개가 내려앉았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평소처럼 낮은 음성이 조금 더 가라앉은 것처럼 들린다는 점을 빼면.

“엘로니아.”

“네. 말씀하세요. 듣고 있어요.”

“고마워.”

조용히 귓가에 울리는 인사가 조금 벅차게 들렸다.

수많은 보석이나 미사여구가 들어간 말보다 더 크게 마음 깊은 곳을 울렸다.

엘로니아는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일을 하기 위해 복도를 지나가려던 시종들이 어쩔 줄 몰라 멀찍이서 발만 동동 굴렀다.

이를 본 집사는 재빠르게 시종들의 목덜미를 잡아채고는 끌고 갔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한 손을 들어 경례하듯 들어 보였다.

‘시종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 평안한 시간 되시길!’

말은 없었지만 분명 그런 의미가 틀림없었다.

엘로니아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분명 내일 에이미가 엄청나게 물어보겠네…….’

하지만 그런 창피함을 감수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이 남자를 안아주고 싶었다.

아마도 많이 복잡할 것이다.

리프리에게 사실을 말하기는 했으나, 언제 다시 돌아설지 모르는 종이배나 다름없었다.

그가 헤일튼가의 적통이 아닌 이상, 갑작스럽게 사고로 떠난 선대 공작 부부에 대해 해명할 길이 없으니 말이다.

엘로니아는 황후의 과거에서 보았던 선대 공작의 지시를 떠올리며 속으로 읊조렸다.

‘분명 빈민가로 찾아간다고 하셨어.’

마차 사고 역시 빈민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아셀리에 대해 알아보려면, 아무래도 황후에 대해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엘로니아는 제 품에 고개를 묻은 카르벨을 벅차게 안으며 잠시 생각을 미뤘다.

‘조금 이따가…….’

지금은 그가 더 중요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엘로니아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소중한 건 만들고 싶지 않은데.’

기대하고 싶지 않고, 원하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평소 그의 성격을 꺾고 리프리에게 먼저 다가가기까지 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점점 마음이 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안 된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싶지 않았다.

감정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의 그녀는 어떠한가.

엘로니아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그의 등을 조금 세게 껴안았다.

“고마워할 거 없어요. 카르벨이 한 거잖아요.”

“아니.”

카르벨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엘로니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저 인사일 뿐이야. 이 정도는 받아도 돼, 엘로니아. 그대가 리프리 저하를 붙잡았고, 내 등을 떠밀지 않았나.”

“하지만…….”

엘로니아가 머뭇거리자 어째서인지 그의 눈이 짙어졌다.

“나는 받은 만큼 돌려준다. 알고 있지?”

“……그게 지금 여기서 왜 나와요?”

“돌려주려고.”

단호하게 말을 꺼낸 그의 입매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불안감에 주춤, 뒤로 물러서자 그는 장갑 위로 자신의 약지에 낀 반지를 슬슬 굴렸다.

분명 결혼반지가 있을 위치였다.

“내게 원하는 걸 그대에게 물어본다면 필요 없다고 하겠지.”

“정말 필요 없어서 그래요.”

“그럼 반지 정도는 새로 맞춰도 되겠지.”

아, 설마.

엘로니아가 사색이 되어 그를 올려보자, 그는 악당이라도 되는 것처럼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앞으로 끼고 다니겠다고 했잖아.”

“이, 있는 걸로 낄게요. 지금 카르벨이랑 같은 거!”

“나도 바꾸면 그만이야. 안 그래도 새로 하나 맞춰주려고 했거든. 사이즈도 이미 봐뒀고.”

그건 또 언제 알아낸 거야?

엘로니아는 경악으로 턱이 점점 벌어졌다.

그는 기대하라는 듯이 고개를 숙여 엘로니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기대해. 세상에서 제일 눈에 띄는 것으로 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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