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97화 (197/234)

90. 기회를 붙잡아라

안 그래도 조용하던 집무실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혹여 카르벨이 검이라도 뽑아 들지 않을까 걱정이 된 엘로니아는 눈대중으로 공격이 가능한 물건의 위치를 파악했다.

‘촛대는 멀리 있고, 설마하니 화분을 던지지는 않겠지?’

그래도 혹시 몰라 발로 스윽, 밀어 최대한 카르벨과 멀찍이 떨어트리기 위해 노력했다.

슬금슬금, 소리가 나지 않게 예민하게 발끝을 세워 화분을 움직이고 있을 때.

“무슨 기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카르벨의 친절한 음성이 조용한 공기를 깨트렸다.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카르벨의 검지가 톡톡, 느리게 움직였다.

정작 본인은 모르는 듯했다.

카르벨은 여전히 여상하게 미소를 띤 채 대화를 이어갔다.

“지금 헤일튼 가의 가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으니, 헤일튼 공작가의 사람이 맞겠군요. 저하께서 제게 헤일튼 공이라 부르는 이상.”

감정 하나 없는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단호하게 들렸다.

사실상 헤일튼 공이라는 말을 제외하고 카르벨을 부를 말이 없었다.

리프리의 질문이 표면적인 가주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접객실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교묘한 말이 못마땅했는지, 표정 하나 없던 리프리의 입매가 작게 움찔했다.

반듯하게 앉아 있던 상체가 카르벨을 향해 미세하게 기울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꽤 화가 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셀리 전하와의 관계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라면, 헤일튼 공의 답변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그러니 확실히 답하십시오.”

“리프리 저하.”

나직한 음성이 그를 불렀다.

카르벨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여유롭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래도 되는 거야?’

이미 혈통집을 통해 사실을 알고 있는 엘로니아의 입장에서는 좌불안석 불안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리프리가 어떻게 나올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만약 헤일튼 공작가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아셀리에게 곧이곧대로 일러바치려나.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느 쪽으로든 사실상 카르벨의 답이 최선이었다.

단지 명확한 답이 되지 못하니 리프리의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울 뿐.

수세에 몰린 사람은 분명 카르벨인데, 어째서인지 리프리보다 그가 훨씬 편안해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카르벨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차분히 답을 이었다.

“아셀리 전하는 고려하지 않은, 헤일튼 공작가의 가주로서 드린 답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에 대해 아니라고 답변하신 것으로 알아듣겠습니다.”

리프리는 더는 미련이 없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렇게 보낸다고?’

옆에서 앉아 있던 엘로니아는 어쩔 줄 몰라 몸을 들썩였다.

카르벨의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당겼으나,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리프리가 집무실 문고리를 잡기 전.

카르벨이 그를 불렀다.

“저하께서 제게 어떤 이득을 제시할 수 있는지부터 언급하는 게 원하는 협상의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지금 제게 협상을 하라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나가려던 리프리가 몸을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카르벨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며 느긋하게 답했다.

“아뇨. 그저 오래 봐 온 사람으로 드리는 자그마한 조언이라고 여겨주시죠.”

“……새겨듣겠습니다.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간단한 답을 남긴 리프리는 미련 없이 접객실을 나가버렸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엘로니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저렇게 보내도 괜찮아요? 이대로 아셀리 전하에게 가면 어떡해요!”

“그럼 저하의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렌디먼 황제에게까지 손을 뻗는 사람이다.

그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리프리가 전하는 말을 듣고 그저 넘길 리 없었다.

엘로니아는 미련이 남아 리프리가 나간 문을 끈덕지게 응시했다.

그러자 카르벨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정히 말을 이었다.

“너무 문만 보는데. 질투 나려고 해.”

“질투할 게 없어서 문을 질투해요?”

“문은 적어도 대상이 누구인지 보이기라도 하잖아.”

카르벨은 이 상황에서도 태평하기만 했다.

엘로니아는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가만히 웃는 얼굴로 시선을 감내하던 그가, 마침내 두 손을 들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군.”

그는 상체를 일으켜 두 팔꿈치를 허벅지에 얹으며 고개를 틀었다.

꼭 들여다보듯 엘로니아를 바라본 카르벨이 달래듯 말을 이었다.

“리프리 저하는 내가 오래 봐 왔어. 고작 이 정도로 아셀리 전하에게 가서 말을 할 사람은 아니다.”

“정말 리프리 저하를 다 안다고 확신해요?”

“물론.”

“리프리 저하는 카르벨이 조용한 곳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시잖아요. 그런 변수가 있을지 몰라요.”

그는 고심하는 듯 작게 침음을 삼켰다.

하지만 여전히 답은 같았다.

“리프리 저하는 사람을 속일 줄 몰라. 그래서 남들이 속이는 걸 이해하지 못하지.”

“그런 분이신 것 같았어요.”

“그래. 그대도 알 정도면 평생 봐 온 나는 어떻겠어.”

“오,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으니 변했을 수도!”

“사람은 잘 변하지 않아.”

사뭇 진지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엘로니아도 알잖아.”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처음 리프리를 본 순간부터 엘로니아도 알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는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었으나, 리프리와의 갈등이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했다.

조금 더, 좋게 풀어갈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확 아셀리 전하에 대한 폭로라도!’

아니다. 서로 간의 확신 없이 하는 폭로는 비방일 뿐이었다.

엘로니아는 그가 나간 자리를 다시금 확인하듯 응시했다.

***

리프리가 집무실에서 나오자마자 헤일튼가의 시종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개중에는 오랫동안 봐 온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돌아가십니까.”

“마차를 대기시켜주게.”

“알겠습니다.”

라티에 왕국에서 함께 온 기사의 질문에 리프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벨은 역시 그와 맞지 않는다.

답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하고 보는 리프리에게 그는 너무도 맞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오히려 화가 날 정도였다.

“웃는 얼굴 하고는.”

어릴 적에 보였던 모습과 확연히 다른 가식적인 미소에 리프리는 조용히 자신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마차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리프리 저하!”

뒤에서 그를 부르는 청량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시원한 공기가 박하 향처럼 퍼지듯 화악 다가왔다.

“저하, 잠시만요! 일정이 많이 바쁘신가요?”

“엘로니아 양.”

헉헉,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지 숨을 몰아쉬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리프리는 마법으로 조금 편하게 해주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아니. 형님의 편에 선 자다.’

잠시 망설이듯 손을 움찔했다.

그 짧은 머뭇거림을 본 엘로니아가 잠시 눈을 깜빡이다 활짝 웃으며 물었다.

“가신 줄 알고 뛰었더니……. 지금 당장 라티에 왕국으로 돌아가시나요?”

황궁에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때마침 렌디먼 황제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도 들었으니, 국교의 예의상 얼굴이라도 비춰야 했다.

더불어 아셀리도 만나볼 생각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며칠간은 에스피디 제국령 근처에 있을 예정입니다.”

“그럼 지금 당장 가야 하거나, 만나야 하거나, 해야 할 일이 있나요?”

“……당장은 아닙니다만 있기는 합니다.”

“좋아요. 당장이 아니면 됐어요.”

엘로니아는 뿌듯하게 어깨를 펴며 웃었다.

“공식적으로 방문하셨는데, 이렇게 바로 돌아가시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본래 라티에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행차하셨을 때는 하루 묵는 게 예의라고 배웠습니다.”

먹혀라, 먹혀라!

웃는 얼굴 뒤의 엘로니아는 초조함으로 덜덜덜 떨고 있었다.

처음 헤일튼 공작저에 들어와서 달달 외웠던 책 속에 있던 예의 중 하나였다.

본래 예의란 게 그렇다. 법으로 규정된 것은 없으나, 암묵적으로 모두가 그렇게 지켜주는 것.

라티에 왕족들은 대대로 마법사들이 많았고, 그 탓에 여기저기 이동이 쉬웠다.

그 탓에 혹여 문제라도 생기면 동선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해서 만들어진 예절이라 배웠다.

‘비록 지금은 거의 유명무실한 예절이지만.’

하지만 우직한 리프리라면 이 방법이 먹힐 거라 생각했다.

애써 더 환히 웃는 엘로니아를 두고 리프리는 잠시 생각하는 듯 그대로 굳어 있었다.

한참 만에 그가 답을 건넸다.

“맞습니다만, 법으로 규정된 사항은 아닙니다.”

“그래도 계셔야죠! 예의잖아요, 오래전부터 이어온 예! 의!”

“예의, 말이죠.”

“아니, 그. 음, 네. 제 정령 중에 자그마한 아이들이 있거든요? 마법사라고 아주 신기해하더라고요!”

거짓말이다.

닉스는 마법사를 놈들이라고 칭할 정도로 낮잡아봤으며, 님프와 노움은 엘로니아나 케이크 따위를 제외하고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를 붙잡으려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런 아이들이 이렇게 오래전부터 지켜왔던 예의가 무시되는 걸 보면 뭘 보고 자라겠어요!”

정령이 보이지 않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나중에 닉스와 아이들을 앞에 두고 싹싹 빌어야지.

엘로니아의 요구가 먹혔는지, 리프리는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정령사님의 입장에서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렇게 어린 정령도 있었군요.”

휴, 다행이다!

혹여 그가 그대로 떠나면 어쩌나 하던 마음이 훅 놓였다.

속으로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낸 엘로니아는 뻔뻔하게 다시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신 김에 저랑 티타임도 좀 즐기시고 그러셔야죠. 여전히 휴식은 잘 안 하시는 편이시고요?”

“괜찮습니다. 하루 정도 묵으면 그게 휴식이겠군요.”

하루. 기껏 하루다.

분명 아셀리에 대해 말을 꺼냈을 때, 리프리도 무언가 마음 놓고 그녀를 믿기에 걸리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렌디먼 황제까지 병상에 누워 있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거의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리프리 저하가 원하는 답은 드릴 수 없지만…….’

적어도 카르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초석 정도는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단지, 리프리가 공작가의 태생이 아닌 카르벨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게 문제였다.

‘카르벨이든 리프리 저하든 둘 중 한 분이라도 고집을 좀 꺾으면 좋겠는데…….’

카르벨이 리프리의 비위를 맞추며 거짓말을 한 잘못을 빌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한들, 리프리가 혈통을 속인 그를 용서할 것 같지도 않았다.

집사에게 다시 묵을 손님방을 안내받는 리프리의 뒷모습을 보며 엘로니아는 속으로 곤란한 숨을 삼켰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잠깐 뒤를 돌은 리프리를 향해 엘로니아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따가 손님방으로 찾아뵐게요. 괜찮으시면 말동무라도 되어주세요!”

“제가 말동무가 되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말수가 없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엘로니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답했다.

“무, 물론이죠!”

어떻게든 이어가 보면 된다. 어떻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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