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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95화 (195/234)

88. 최근의 차이

제법 심각할 수도 있는 주제에도 황후는 태연했다.

거짓으로 꾸며내는 모습이라기에는 정말로 평온해 보였다.

그녀는 아직 어린 로엘의 여린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훑으며 답했다.

“들었습니다.”

그녀의 손길을 느꼈는지, 로엘 황태자가 몸을 뒤척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대범하게 목소리를 내던 헤일튼 공작의 어깨가 일순간 움찔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 사이, 황후는 익숙하게 로엘 황태자를 안아 들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런 그녀의 노력과 달리, 아이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를 감당하기에는 그녀의 체력이 약한 탓이었다.

눈을 뜨면 어설프게나마 뛰어다니고, 언젠가는 곧 가정교사가 붙어 황궁의 주인이 되기 위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터.

이미 황후의 체력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었다.

그녀는 하도 마른 탓에 유독 더 크게 느껴지는 드레스 위로 부른 배를 만졌다.

“동생이 태어나면 로엘도 이제 의젓해지겠죠.”

“몸도 안 좋으신데 괜찮습니까.”

“그 정도 버틸 힘은 있습니다.”

고집스러운 황후의 답에 헤일튼 공작은 입을 달싹이다 닫았다.

대신 그는 손수 황후의 품에 안겨 있던 로엘 황태자를 조심스럽게 넘겨받아 침대 옆에 바르게 눕히며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 무희가 딸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것도 폐하를 아주 쏙 닮은 딸을요.”

“그런가요.”

“로엘 전하와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오라버니가 폐하도 모르고 계신 걸 어떻게 알고 계신 건가요.”

부드러운 음성과 달리 질문에는 뼈가 있었다.

그제야 엘로니아는 그녀 역시 헤일튼 공작가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체감했다.

날카로운 질문에 헤일튼 공작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답했다.

“폐하의 침소에서 나온 그날 이후로 꾸준히 사람을 시켜 동향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곧 폐하께도 소식을 전할 겁니다.”

“괜한 인력 낭비를 하셨군요.”

“소문이 나서 좋을 것이 없으니 제가 직접 알아봤습니다. 폐하께서 그러실 분이 아닌데 처음으로 침소에 들인 무희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을 줄 알고 그리 태평하십니까.”

그 대화를 듣고 나서야 엘로니아는 꽤 오래전부터 헤일튼 공작 부부가 빈민가에 기부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 것치고 아셀리 전하가 황궁에 들어오고 나서까지 이어졌던 것 같은데…….’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일까?

엘로니아는 조금 더 가까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황후는 아예 못 들은 척 자신과 똑 닮은 로엘 황태자의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기라서 그런지 그녀가 기억하던 온화한 로엘의 모습과 사뭇 다른 느낌이라 신기하기까지 했다.

답을 하지 않는 황후를 본 헤일튼 공작은 물러서지 않고 꿋꿋하게 다시 말했다.

“로엘 전하와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진즉 황궁으로 찾아왔겠죠.”

“그때는 이미 늦은 겁니다. 소문에는 하녀 출신의 친구들에게 황궁에 연락을 넣는 방법을 물었다고 합니다.”

하녀?

엘로니아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이맛살을 찌푸렸다.

황비가 황궁으로 들어오기로 마음을 먹은 건 이미 노파를 통해 확인했다.

그 이전부터 찬찬히 단계를 밟아온 걸까.

순간 좀 전에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하녀가 떠올랐다.

헤일튼 공작은 물론, 황후까지 누구에게 화를 낼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 겁을 먹을 이유가 있던가.

엘로니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황후가 들고 있던 찻잔으로 향했다.

적당히 붉고 맑은 차는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펠런 백작 때와는 차가 좀 다른 것 같은데.’

하지만 병색이 짙은 황후의 얼굴은 꼭 이전의 펠런 백작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셀리와 후작 영애는 친분이 두터웠다.

후작 영애가 아무런 지식도 없이 홀로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터.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더라도, 아셀리가 무언가의 힌트를 준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은 곧,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해보았다는 뜻일 수 있다.

‘설마 차에……?’

엘로니아는 다급하게 다가가 황후의 찻잔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

그녀는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황후는 느긋하게 차를 들이켰다.

뜨거운 차를 잘못 마셨는지, 그녀는 콜록, 잔기침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마르고 힘겨워 보이던 황후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 져갔다.

단호한 얼굴을 하던 헤일튼 공작의 표정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격식을 차리던 말투도 누이에게 건네듯 다급하게 바뀌었다.

“네가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폐하의 아이기라도 한다면 로엘은 버티기 힘들어질 수 있어.”

“그보다, 올케언니도 아들을 낳았다면서요? 저는 언제 보여주실 거예요?”

“말 돌리지 말고.”

대답을 회피하려던 황후는 단호한 헤일튼 공작의 답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본래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었다.

“저는 건강해요, 오라버니.”

“거짓말하지 마라. 주치의에게 들었다.”

일그러진 헤일튼 공작의 말에 일순 황후의 얼굴이 굳었다.

“말하지 말라고 그리 말했는데도 참.”

“어찌 된 게냐. 좋은 약초를 구했다고 하지 않았나.”

“효력이 없는가 봐요. 날이 갈수록 몸이 더 안 좋아지는 게 느껴져요.”

“……내 다른 약을 구해다 줄 테니, 당분간은 궁에서 먹는 것은 좀 삼가도록 해라.”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 자신의 오라버니를 올려다보았다.

궁에서 지내는 사람이, 궁에서 음식을 먹지 못하면 어떻게 지낸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설명 대신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헤일튼 공작가가 로엘의 배경이 되어줄 수 있지만, 혹여 그 아이와 함께 무희가 황비로 들어와 앉게 되면 내부적인 일까지 세세하게 개입하기는 힘들어.”

“…….”

“로엘 전하가 벌써 검을 보면 눈을 빛낸다. 재능이 있을지 누가 아느냐.”

검을 쥐어본 적도 없는 아이가 검에 대해 무얼 안다고.

커가면서 로엘 황태자는 책을 더 가까이했지만, 아이가 어릴 때 부모들은 전부 자신의 아이가 천재인 줄 안다고 들었다.

그리 검술로 제국에서 이름을 날린 헤일튼 공작도 별수 없는 팔불출인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나오니 황후도 한풀 꺾인 목소리로 답했다.

“……알았어요.”

“그럼 내 곧 공작저에서 사람을 보낼 터이니 그것을 받거라.”

“네, 오라버니.”

순순한 답에 그는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방을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찰나. 잠깐 멈춰선 그가 문 앞에서 황후를 향해 물었다.

“요 며칠 일정이 있느냐?”

“아, 곧 폐하께서 결혼 기념으로 연회를 열어주신다 했어요. 아무래도 얼굴은 비춰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알았다.”

그 말을 끝으로 헤일튼 공작은 방을 미련 없이 벗어났다.

엘로니아는 뛰다시피 그의 뒤를 쫓았다.

성큼성큼, 복도를 걷던 그는 황제의 침소가 있는 방향을 아주 짧게 노려보고는 헤일튼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듯한 보좌관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십니까.”

“그대가 알아봐야 할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헤일튼 공작은 고민하는 듯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가만히 정면을 노려보았다.

의문이 섞인 보좌관의 시선이 향할 때, 그가 말했다.

“황후 폐하의 음식에 누군가 독을 넣는 듯해. 바로 죽는 치명적인 종류는 아니고, 맛이나 색에 티가 나지 않고 천천히 건강을 갉아먹는 종류.”

“……알아보겠습니다.”

“해독약까지 알아볼 수 있다면 최대한 빨리.”

“예.”

마차에 오른 헤일튼 공작은 입술을 이로 잘게 씹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결혼기념일 연회라…….”

그의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엘로니아는 어딘가에 빨려 나가듯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걱정스럽게 그녀의 옆에서 언제든 엘로니아가 쓰러지면 받을 준비라도 하듯 경계 태세를 하고 있던 카르벨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 대외적인 장소에서 인상을 찌푸리는 일이 없다시피 하던 그의 턱이 잔뜩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이 방금까지 보던 헤일튼 공작의 얼굴과 겹쳐졌다.

엘로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보자마자 탄식처럼 말을 내뱉었다.

“아, 역시 닮았어.”

“무엇이 닮았다는 거지.”

그의 질문에 화들짝, 놀란 엘로니아의 어깨가 작게 튀어 올랐다.

“벼, 별거 아니에요! 그 벽이, 과거랑 닮았다는 뜻이었어요. 하하!”

엘로니아는 괜히 멀쩡한 벽을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다급한 나머지 힘 조절이 되지 않아 벽을 친 손바닥이 얼얼해 찔끔 눈물이 났지만 가까스로 삼켰다.

‘대놓고 헤일튼 공작의 적자가 아니라고 했는데, 닮았다고 하면 놀리는 게 아니고 뭐겠어. 이놈의 입.’

엘로니아는 생각 없이 튀어 나간 말에 제 입을 마구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르벨은 그녀의 말이 이상하다는 듯 주변을 훑어보며 답했다.

“그야 이전에도 있던 건물이니까. 많이 생소했나 보군.”

엘로니아는 진동하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수롭지 않게 넘긴 카르벨은 조금 긴장이 풀린 듯 거칠게 자신의 눈가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왜 저러나 싶어 그녀가 눈만 끔뻑이자, 엘로니아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닉스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저 인간이 네가 과거를 보는 동안 아주 나를 들들 볶았어.]

‘보이지도 않는 닉스를 어떻게……?’

[엉뚱한 곳에 대고 왜 네가 빨리 안 오냐고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냐고 묻더라니까? 나 참. 내가 정령사를 어떻게 할 줄 알고?]

닉스는 곱씹을수록 기분이 나빴는지 팟, 튀어 오르듯 허공으로 잽싸게 날아올랐다.

[누가 보면 내가 엘로니아를 괴롭힌 줄 알겠어! 위대한 닉스 님을 지금 의심한 거잖아, 그치?]

“아, 아닐 거야.”

엘로니아는 슬쩍 손으로 카르벨의 옷깃을 잡아당겨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는 눈짓으로 닉스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왜 그렇게 긴장했어요? 닉스가 조금 놀랐나 봐요.”

좋게 말을 하라는 뜻에서 열심히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카르벨은 예상외의 답을 내놓았다.

“그대가 정령으로 과거를 볼 때면 마음이 편치 않아.”

[그것 봐. 날 못 믿은 거지?!]

길길이 날뛰는 닉스의 목소리 위로 카르벨의 낮은 저음이 흘러나왔다.

“전에도 쓰러진 적이 있으니까.”

그에게는 제법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 뒤로 묘하게 과거를 본다고 하면 말리던 게…….’

하필 그때도 장소가 황궁이었다.

엘로니아가 이해해달라는 뜻에서 닉스에게 설명을 덧붙이려던 찰나.

그보다 한발 앞서 닉스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건 나 아니었어.]

“……응?”

[쓰러졌을 때 보여준 건 내가 아니었다고. 엘로니아는 나랑 과거를 본 건 다 괜찮았잖아. 역시, 나밖에 없지? 내가 최고지?]

“……으응…….”

그게 그렇게 되는 거니.

엘로니아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닉스는 흡족한 듯 되물었다.

[휴, 오늘도 보람찬 일을 했다. 정말 정령으로 살기 힘들다니까.]

“근데 닉스. 미안한데…….”

[미안할 거 없다니까. 고작 최근의 과거를 보는 게 뭐 어렵다고.]

“응, 그래서 말인데……. 혹시 사람 기준으로 최근을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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