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94화 (194/234)

87. 닫힌 문

렌디먼 황제의 말을 들은 카르벨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갔다.

“주치의는 뭐라 했습니까.”

“나이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던가.”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유난이구먼. 공작이 그리 살벌하게 보니 정령사께서도 겁을 먹지 않았나.”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좋지 않았는지, 카르벨과 대화를 하던 렌디먼 황제가 넌지시 엘로니아를 향해 눈짓했다.

엘로니아는 재빠르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따스한 미소로 그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카르벨 공이 누군가를 곁에 두어서 다행일세.”

진심인 듯, 그가 하는 말에는 애정이 서려 있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그녀를 두고 렌디먼 황제는 편안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황후가 그리 간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전대 공작 부부도 사고를 당하지 않았던가. 내 탓인 듯해 늘 마음이 쓰였네.”

“고모님은 원체 몸이 약하셨습니다. 어찌 폐하의 탓이겠습니까.”

적당히 둘러대는 카르벨의 말에 렌디먼 황제는 쓰게 웃었다.

“그뿐이던가. 카르벨 공이 어찌나 홀로 강경한지, 곁을 내보이지 않아 누가 따르겠나 걱정했소.”

“……제 기사단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기사들이야 검술만 보고 달려드는 이들 아니던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차는 렌디먼 황제의 안색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볼 때와 달리 적당한 편안함으로 대하는 그가 얼마나 카르벨을 생각하고 아꼈는지가 보이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카르벨이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부분까지 그는 알고 있던 눈치였다.

그런 사람조차도 아셀리의 진면모를 모르고 곁에 두고 있다니.

얼마나 본색을 잘 감추고 살았는지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하긴, 내가 정령사라고 밝혀진 것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도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최근의 연회에서도 멀쩡하던 그였다. 아셀리가 어떤 식으로 수작을 부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간 부녀지간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아셀리는 누구보다 렌디먼 황제의 말을 잘 따랐고, 겉으로는 사이좋은 부녀지간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족 하나 없는 그녀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렌디먼 황제뿐이었다.

‘방계가 아닌 황녀에게 황위권을 승계하겠다 하신 것도 폐하였는데…….’

누구보다 아셀리의 능력을 높게 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조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버릴 수 있다니.

편안하게 침상에 앉아 있는 렌디먼 황제를 보던 엘로니아는 조용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나마 일찍 눈치를 채서 다행이었다.

각자 복잡한 생각을 숨긴 채 웃고 있는 방 안으로 똑똑. 정중한 노크가 울렸다.

“대화 중 죄송합니다. 주치의께서 안정을 취하려면 알현은 당분간 삼가라고 하셔서요.”

“알겠네.”

보좌관의 말에 카르벨은 마지못해 답을 남겼다.

***

“원인은 파악이 되었나.”

침소에서 나오자마자 카르벨은 보좌관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직입니다. 주치의는 우선 전날 드셨던 차와 로티 열매로 만든 케이크 간의 상성이 맞지 않아 탈이 나신 게 아닌가 합니다만…….”

“동석한 자가 있는가.”

“없습니다. 차와 케이크도 폐하께서 지시하신 것이고요.”

엘로니아는 카르벨의 옆에 서서 손가락으로 그의 팔을 콕콕 찌르며 눈치를 주었다.

힐끔, 곁눈질로 살피는 카르벨에게 그녀는 입을 벙긋했다.

‘최근 드신 건 없는지도 물어봐요.’

카르벨은 눈치 빠르게 알아듣고는 보좌관에게 재차 물었다.

“최근 드신 것은 따로 없던가.”

“예에…….”

캐묻는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보좌관의 눈초리가 의뭉스럽게 변했다.

이에 카르벨은 싱긋 웃는 미소로 모른 척 답했다.

“알겠네. 답변해주어 고맙군.”

차마 더 묻지는 못하고 입을 다문 보좌관을 두고 엘로니아도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태연하게 보좌관을 지나치는 카르벨을 따라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황제가 머무는 침소 근처는 황족을 제외하고는 허락을 받은 이만 오갈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황궁의 다른 곳과 달리 조금 한적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주변을 빠르게 훑은 엘로니아는 올 때와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여기로 가는 거 맞아요?”

그러나 그녀의 질문과 달리, 돌아온 답은 조금 진중했다.

“엘로니아. 부탁 하나만 해도 되나.”

“들어보고요.”

“이전에 그대가 정령으로 펠런 백작의 독차를 알아냈던 일을 기억해?”

화두를 꺼내자마자 엘로니아는 알 수 있었다.

만약 아셀리가 렌디먼 황제에게 독살을 시도한 것이라면, 정령으로 해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어, 근데……. 그게 제 의지만으로 되는 건 아니고요. 닉스가 허락을 해줘야 해요.”

이프리트는 엘로니아가 부탁한다면 사람이 많은 공간에 얽힌 일만 아니면 곧이곧대로 들어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닉스는 달랐다.

더군다나 남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거절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카르벨도 그 정도는 예상했던 모양인지, 순순히 답했다.

“거절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어.”

밑져야 본전이었다. 무엇보다 최근 닉스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 말을 꺼내 봐도 될 것 같았다.

엘로니아는 인적이 드문 복도 구석으로 슬슬 걸음을 옮기며 작게 말했다.

“제가 신호를 보내면, 무조건 닉스가 세상에서 제일 대단하다고 칭찬해주셔야 해요.”

엘로니아의 비장한 말에 덩달아 그의 눈꺼풀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무도 안 쓰는지 방인지 굳게 닫힌 문 앞에 선 엘로니아는 작게 속삭였다.

“닉스. 잠깐만 나와 줄 수 있어?”

안 그래도 조용한 복도가 한층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

엘로니아는 멋쩍음을 감수하며 아련하게 다시 속삭였다.

“닉스…….”

[그렇게 불러서 이 닉스 님이 나타나겠어? 좀 더 씩씩하고 웅장하게 불러야지!]

곧 허공에 송골송골 물이 뭉치기 시작하더니, 사람 형상이 나타났다.

닉스의 형태를 그려낸 물방울은 곧 평소 그의 모습을 그대로 내비쳤다.

[뭐야? 여기 황궁이잖아?]

“맞아. 그래서 큰 소리로 못 불렀어. 다음엔 배에 힘 딱 주고 땅에 있는 노움이 들릴 정도로 불러줄게.”

[오, 노움이 듣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안 그래도 사람이 없어 조용한 곳이었다.

황제의 침소 근처는 시녀나 기사들이 있어 이보다는 덜했으나, 워낙 조용하다 보니 고작 닉스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크게 울리는 터라 어쩔 수 없었다.

믿으라는 듯 미래를 기약하는 엘로니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닉스는 입매를 오물거리며 고민하는 듯했다.

그래도 구미가 당겼는지, 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며 엘로니아는 이전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부탁했다.

“괜찮으면, 혹시 황궁에서 몸에 안 좋은 음식이나 약이 오가는 정황이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엥, 뭐야. 정령사도 아니고 다른 인간? 싫어.]

“내가 기댈 사람……, 아니. 정령이 닉스밖에 없어서 그래.”

말을 꺼낸 즉시 엘로니아는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카르벨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얼른 칭찬을 곁들이라는 신호였다.

이에 카르벨은 친절한 미소를 곁들이며 조곤조곤히 말을 덧붙여주었다.

“이전에 펠런 백작가에서 큰 공을 올리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아아, 그랬지. 별것도 없는 티타임을 엘로니아가 엄청 기대했거든.]

그 정도로 기대했었나.

엘로니아는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입을 꾹 다물었다.

카르벨은 닉스의 말이 들리지도 않을 텐데, 마치 그의 답을 다 아는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이번 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흠……. 좋아!]

예상외로 흔쾌히 허락하는 닉스를 보고 놀란 사람은 오히려 엘로니아였다.

“이렇게 쉽게?”

[저 검은 인간이 나한테 퍼즐을 선물로 줬거든.]

“어, 언제?!”

[네 방에서 님프랑 놀고 있는데 보좌관이라는 사람이 갖고 왔어. 케이크랑 같이.]

그레이터가 가져온 모양이었다.

엘로니아는 믿기지 않아 눈을 끔뻑이며 재차 되물었다.

“닉스에게 주는 거래?”

[창틀에서 놀고 있었는데, 엉뚱하게 침대에다가 고개 숙이면서 우리한테 주는 거라던데?]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선물이지만, 덕분에 닉스의 호감을 샀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엘로니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카르벨의 눈동자도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닉스는 허공에서 스트레칭하듯 쭉쭉 팔을 펴며 물었다.

[최근 일을 보여주면 되는 거지?]

“응. 부탁할게.”

[걱정 마셔. 내가 누구냐!]

“귀엽고 깜찍하고 능력 좋은 닉스!”

어설프게 두 주먹을 꽉 쥐고 내뱉는 엘로니아의 말에 닉스는 흡족한 듯 씨익 미소를 지었다.

곧 닉스는 엘로니아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 순간 시원한 무언가가 퍼지는 듯하더니, 곧 시야가 어두워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엘로니아는 같은 장소에 서 있었다.

이전보다 주변이 깨끗하고, 굳게 잠겨 있던 방문은 현재와 달리 열려 있었다.

시녀나 기사들도 간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금 오래전의 과거인 듯했다.

그중에는 보안 때문인지 로브를 입은 마법사도 보였다.

‘잠깐만. 저 마법사, 로엘 전하가 황실 서고 때 물렸던 마법사 아니야?’

그 말인즉슨, 적어도 서고 화재 이전이라는 소리였다.

엘로니아는 작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닉스……. 최근이 아니잖아!’

영겁의 세월을 사는 정령과 인간의 ‘최근’이라는 기준이 퍽 많이 다른 모양이었다.

당황스러웠으나, 닉스가 보여줬을 때는 무언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터.

엘로니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에서 한 시녀가 덜덜 떨면서 트롤리를 끌며 나타났다.

엘로니아가 등을 지고 선 문 앞에 서더니,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어…….”

그런 그녀가 용기를 내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는 힘없는 목소리가 답을 내었다.

“누구지.”

“화, 황후 폐하. 차를 들였습니다.”

“아, 들게나.”

황후 폐하?

엘로니아는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팍,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살폈다.

현재에서는 굳게 잠겨 있는 방이 과거 황후가 지내던 침소인 모양이었다.

그 안에는 아름다운 흑발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인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저분이 황후.’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듯한 외모였다.

아름답기는 했으나, 마른 체격에 힘없는 미소까지.

확실히 병색이 짙어 보였다.

‘몸이 아프셨다더니…….’

그런 그녀의 품에는 작은 아이가 안겨 있었다.

아직 눈도 뜨기 전인 아이는 로엘 황태자인 것처럼 보였다.

시녀는 언제 떨었냐는 듯이 트롤리에서 찻잔을 들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조금 날카로운 듯한 목소리가 방 안 어디에서 단호하게 지적했다.

“곧 출산인데 차라니. 괜찮으시겠습니까, 폐하.”

차를 들고 들어가던 시녀는 테이블에 놓다 말고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황후는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다닥, 차를 놓고 꾸벅 인사를 건넨 시녀는 들어올 때보다 빠른 속도로 방을 나가버렸다.

황후는 찻잔을 들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님도 참. 그렇게 날카롭게 구실 것은 없잖아요.”

그런 그녀의 말에 구석진 곳에 서 있던 이가 한 걸음 걸어 나왔다.

“황태자 전하의 탄신일 날, 무희를 들였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굳은 얼굴로 말하는 이는 황후와 카르벨을 똑 닮은 전대 헤일튼 공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