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그의 고백
조용한 공기가 피부에 눅진하게 눌어붙었다.
가볍게 시작한 입맞춤이 깊어지고, 맞닿았던 순간이 길어지기 시작할 때쯤, 호흡이 뒤섞였다.
엘로니아의 머릿속이 온통 혼잡함으로 뒤엉켰다.
눈을 감아도 어둠은 그를 더 선명하게 그려냈다.
울컥거리는 목울대와 일렁이는 어깨. 손바닥 아래로 그의 촘촘하게 짜인 근육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엘로니아는 생소한 감각에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밭은 숨을 불규칙적으로 내뱉는 그녀에게 카르벨이 속삭였다.
“숨 쉬어, 엘로니아.”
“카르벨…….”
“그렇게 부르면 조금 위험한데.”
목 깊숙한 곳에서부터 낮게 갈라지듯 들리는 음성이 그가 한계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다정한 말투와 달리 깊게 들이마시는 숨이 목덜미를 간지럽게 만들었다.
그는 엘로니아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면 상기된 그녀의 뺨 위로 잘게 입을 맞췄다.
꼭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응, 그래.”
웅얼거리듯 부르는 말에도 그는 하나하나 다정히 답을 건넸다.
그럴 때면 엘로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응석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에게 기대고 싶었다.
카르벨의 모든 행동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땀으로 젖은 그의 머리카락이 엘로니아의 이마를 간질였다.
호흡을 어떻게 들이쉬고 내쉬는지조차 잊은 것 같았다.
잿빛 눈동자가 오롯하게 그녀만 바라볼 때, 저도 모르게 더 그를 욕심냈다.
이렇게 한 사람의 감정을 벅차도록 받아본 게 처음이라서, 텅 비었는지도 몰라서 괜찮다고 자부했던 순간들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카르벨은 그런 그녀의 욕심을 가감 없이 채워주었다.
바닥이 없는 것처럼 끊임없이 새어나가면 다시 채워주기를 반복했다.
원한다면 언제든 손을 내밀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지 않아도 맞춘 것처럼 그의 투박하고 커다란 손이 엘로니아의 손을 얽어냈다.
데일 것처럼 뜨거워 숨을 터트리자, 그의 눈매가 번들거리는 욕망과 집착으로 접혀 들었다.
어둠을 등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고개를 숙인 그가 열기 띤 음성으로 속삭였다.
“사랑해, 엘로니아.”
아, 원래 이런 말이었구나.
힘겹게 내뱉는 그저 뻔하디뻔한 말이 마음을 울렸다.
책으로도 보고, 연기를 하면서도 읊조려본 정말 뻔한 그 말.
그 말을 내뱉는 그의 들뜬 표정도, 나지막한 음성도, 상체를 지탱하느라 힘이 들어간 어깨와 팔도, 어두운 제 방 안의 풍경 속 그 모든 것도 흔들리듯 엘로니아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엘로니아는 조르듯 팔을 뻗었다.
스스로 엉켜주는 카르벨을 향해 그녀는 다시 물었다.
“다시 말해주세요.”
“사랑해.”
열기 탓인지 흔들리는 시야 탓인지 취한 듯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엘로니아는 그저 그를 감싸 안은 팔에 더 힘을 줄 뿐이었다.
밤이 깊어지도록 그의 고백은 끝이 나지 않았다.
***
동틀 무렵. 푸르스름한 공기가 엘로니아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카르벨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추위를 타는지 본능적으로 움츠리는 모양새에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따뜻한 체온을 찾아 엘로니아가 그에게로 붙어왔다.
침대에 기대듯 앉아 있던 카르벨은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귀엽다. 그녀가 제게 마음 한편을 주었다는 것 자체로도 잠들기 힘들었다.
계속 묻고 싶었다.
“엘로니아.”
“응…….”
“내가 좋은가.”
“으응…….”
정작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엘로니아의 잠꼬대 같은 대답에도 그는 기분 좋은 듯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정작 깨어 있을 때는 죽어도 아니라고 할 그녀를 알아서 하는 질문이었다.
그조차도 사랑스럽지만, 엘로니아는 영 부끄러워하는 듯싶었다.
카르벨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지쳐 잠든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거절하라는 말에 기꺼이 품을 내어준 그녀가 믿기지 않았다. 꼭 달콤한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다시 깨어나면 혈통집에 적혀 있다던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경멸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 앞에서 내색하지 않고 웃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일 수도 있는데.
걱정을 한편에 밀어놓은 그는 확인을 받듯 엘로니아를 향해 물었다.
“정말 헤일튼 공작가의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나.”
“응…….”
다른 이들이 무어라 떠들든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등을 보인다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집요해졌다. 그녀의 반응 하나하나에 온 세포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카르벨은 조용히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힘이 없어 축 늘어졌지만 그의 단단한 손이 그녀의 손을 받쳤다.
반지가 없는 휑한 손가락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일전에 맞춘 건 버리라고 해야겠군.’
적당히 대외적으로 보이기 위해 맞췄던 반지이니 이제는 필요 없다.
무언가 크게 증표라도 박아놔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누워 있는 그녀를 들여다보며 상체를 기울인 카르벨은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짓누르며 조용히 읊조렸다.
“엘로니아.”
“카르벨…….”
“응. 엘로니아. 여기 있네.”
고른 숨소리는 더 이상 답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카르벨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자신에게 말을 하듯 작은 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떠나지 않을 거지.”
눈 뜨고 있는 엘로니아에게는 절대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었다.
***
몽롱하게 의식이 들었다.
보통 이맘때쯤이면 에이미가 와서 큰 소리로 그녀를 깨워야 정상인데, 오늘따라 고요했다.
‘그러고 보니 해도 없는 것 같고…….’
늘 정신이 들면 중천에서 쨍하게 햇볕을 내리쬐던 침실이 묘하게 침침했다.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자, 그녀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서류가 보였다.
“서류가 공중에 떠 있네……?”
옆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엘로니아는 서류가 햇볕을 막아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카르벨이 든 채로.
“이제야 나를 봐주는군.”
헉, 숨을 들이켠 엘로니아는 재빠르게 자신의 복색을 살폈다.
어젯밤이 떠오른 그녀는 이불을 둘둘 말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어째서인지 그는 완벽하게 볼로타이부터 베스트까지 챙겨 입은 상태였다.
적당히 걷어붙인 소매. 그리고 그 아래 고스란히 드러난 갓 생긴 자잘한 상처들까지.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손만 뻗어 그의 소매를 내려보고자 했다.
가까스로 손가락을 쭉 펴서 소매에 닿기 직전.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피하며 말했다.
“시종은 다 물렸어. 곤히 자길래.”
“그냥 깨우시지…….”
어물쩍 대답하는 엘로니아의 눈은 이미 그의 소매에 집중되어 있었다.
에이미라도 들어왔다가 저 꼴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지 뻔했다.
아무리 에이미와 친근한 관계라지만 이런 이야기를 나눌 자신은 없었다.
‘닉스랑 님프가 보기라도 하면!’
아이들의 정서상 죽어도 안 된다.
그녀가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 카르벨은 대수롭지 않게 엘로니아의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슈미즈 끈을 올려주며 말했다.
“아침부터 그렇게 보면 조금 곤란해.”
“그렇죠, 곤란하죠.”
“이해해주는군.”
건성으로 대답하며 그의 팔을 따라 고개가 움직이던 엘로니아는 틈을 찾아 와락 달려들었다.
그러나 카르벨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받아들며 웃었다.
“허점이 너무 많아, 엘로니아. 기습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
고개를 내려 엘로니아의 콧잔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는 씨익 입매를 늘려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해야지. 알겠어?”
“소매 좀 내려주시면 안 돼요? 그럼 알 것 같아요.”
“왜? 별로 문제 될 것도 없는데.”
“아주, 아주 많거든요……. 우리는 일단 미성년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어른이고요…….”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사람은 아니고 정령이 있는데 말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나이는 그렇지 못했기에 엘로니아는 불퉁하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자, 결국 항복을 표시한 그는 자연스럽게 소매를 내렸다.
카르벨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자신의 허벅지에 앉혀 품에 안은 채 서류를 보여주며 말했다.
“자, 그대가 좋아하는 서류야.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니 적당히 보도록 해.”
“제가 언제 조, 좋아한다는 말을!”
“그럼, 날 이렇게 만들고 도망칠 생각이었어?”
이게 무슨 소리람?
엘로니아는 갑자기 자신이 굉장한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었다.
몸을 꿈틀거리며 도망가려고 했으나, 허리에 걸쳐진 그의 팔이 단단히 고정하는 바람에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재차 저으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니, 왜 상처받은 척을 해요!”
“상처받지 않았어. 찾으면 되거든.”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엘로니아가 혹여 도망치더라도,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또 슬그머니 오기가 생겼다.
“제가 진짜 오지 산골 마을로 도망치면 어쩌려고요?”
“평생을 찾으면 한 사람쯤 못 찾겠어? 살아만 있으면 다 돼.”
은근한 다짐이 엿보이는 말이었다.
그의 고집을 아는지라, 엘로니아는 그저 한숨을 내쉬며 조금 편히 그에게 기대었다.
어째서인지, 그가 조금 편안해졌다.
***
“오셨어요?”
황궁의 접객실. 아셀리는 환히 웃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리프리는 익숙하게 소파에 앉으며 답했다.
“갑자기 서신을 보내시니 매우 당황스럽더군요. 이런 식의 연락은 불편합니다.”
자존심이 강한 아셀리는 남이 자신을 낮잡아보는 것에 예민했다.
그 상대가 왕족이든 귀족이든 천민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늘 정중했던 리프리였으나, 오늘따라 답하는 목소리가 쌀쌀맞았다.
지금은 굽히고 가야 할 때.
아셀리는 생글거리며 그를 달랬다.
“그만큼 급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리프리 저하께서도 전대 헤일튼 공작 부부를 사랑하신 만큼, 가문 또한 아끼시잖아요.”
“……그것은 제 일입니다. 아셀리 전하께 정보를 공유해 드린 것은 사사로운 일에 사용하시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리프리는 의외로 강경하게 나왔다.
그 마음의 변화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카르벨의 편에 붙은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랬다면 헤일튼 공작저에 먼저 들렀겠지. 황실이 아니라.’
아셀리는 다시금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밝게 답했다.
“혹시 아나요. 제가 곧 황위를 물려받게 될지. 그렇게 된다면 제 통치하에 있는 가문이 벌인 일입니다. 사사로운 일이 아니죠.”
“……현 폐하께서 강건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정하다 못해 엄할 때는 엄하며, 인정이 많기는 해도 사사로운 감정에 일을 그르칠 사람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완벽한 황제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믿지 못할 만큼 판단력이 흐려진 이도 아니었다.
‘벌써 황위를 계승하신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다.’
리프리는 덤덤한 눈길로 마주 앉은 아셀리를 응시했다.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은 그녀는 태연하게 차를 마시며 말했다.
“나이가 있으시니까요.”
늘어진 입매와 온화한 목소리. 그 자체만 보면 흠잡을 곳 없는 황녀였다.
하지만 그 속이 문드러져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리프리는 조용히 기척을 살폈다.
마법으로 된 도구라거나, 다른 무언가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수를 쓴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하는 말이 어째서인지 불안했다.
“언제든 준비해서 나쁠 것 없잖아요.”
아셀리의 나긋나긋한 음성을 들으며 리프리는 조용히 제 눈앞에서 식어가는 차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