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방으로 와 주세요
라티에 왕국의 집무실.
커다란 창으로 비치는 따사로운 햇살과 집무실에 놓인 형형색색의 꽃 덕에 주변의 분위기는 한결 산뜻했다.
하지만 정작 리프리는 평소와 달리 심각한 모습이었다.
한 손에 서신을 쥔 그의 눈이 느리게 글자를 반복해서 곱씹었다.
“좋아하는 걸 알려달라고.”
간단한 내용이었다.
최근 잘 지내냐는 안부로 시작해, 카르벨의 취향을 묻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
그보다 리프리의 시선이 고정된 부분은 그 뒤에 이어진 문장이었다.
<……해서, 에스피디 제국에 오실 계획은 없으신지요? 최근 아셀리 전하와 서재를 복구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함께 차라도 한 잔 나누었으면 합니다.>
서재를 복구한다면 반드시 알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혈통집.’
정령사이니 모를 리도 없을 터.
‘알면서도 형님이 좋아하시는 걸 묻는다고?’
리프리는 작게 인상을 쓰며 책상 위에 놓인 다른 서신을 집어 들었다.
보낸 이 없이 받는 이만 적힌 서신은 흔한 가문의 인장조차 찍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리프리는 이 서신을 보낸 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정령사와 그 사람이 손을 잡은 것 같습니다. 데브니 남작이 수감 중이라 탐문한 결과, 가족과 연을 끊는 조건으로 모종의 거래가 있었나 봅니다. 리프리 저하께서 오셔서 따로 폐하께 말씀을 올리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셀리였다. 그전에도 꾸준히 상황에 관한 안부와 함께 서신을 보내고는 했는데, 요즘 들어 그 기간이 짧아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나 보네.”
인장이 없는 서신은 외부에 공개하지 말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
그래서 태우려던 찰나.
똑똑. 노크가 들려왔다.
“저하, 왕비 전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아, 지금 간다고 전해주게.”
리프리는 다급하게 서랍을 열어 서신을 깊숙이 넣은 뒤, 굳게 닫았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마법으로 잠금까지 마치자,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리프리. 여전히 보기 힘들구나.”
“어머니.”
오델리아 왕비가 활짝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뻗었다.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리프리는 가볍게 그녀를 마주 안으며 인사했다.
“오전부터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어미가 자식을 보는 데 이유가 필요하니. 날도 좋은데 집무실에 콕 박혀 있지 말고 산책이라도 하는 게 어떠니.”
“일이 많아요.”
“좀 쉬엄쉬엄해야지.”
그녀는 안쓰럽다는 듯이 리프리를 응시했다.
그와 똑같은 백금발에 백옥 같은 피부. 웃을 때 해사한 모습까지.
어렴풋이 어린 시절의 기억 속 전대 헤일튼 공작 부인과 똑 닮은 외형이었다.
리프리는 괜히 찔리는 마음에 힐끔, 서신을 숨긴 서랍을 확인하며 말했다.
“안 그래도 곧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조만간 에스피디 제국에 한 번 방문해야 할 듯해서요.”
“자주 가는구나. 카르벨을 보러 가니?”
“겸사겸사요.”
“어릴 때는 참 사이가 좋았는데. 다시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구나.”
오델리아 왕비의 진심 어린 답에 리프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의 관계는 틀어진 지 오래였다.
어머니도 느낄 만큼 서먹한 관계였으나, 그 이유를 단지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세월 탓으로 넘겨짚고 있었다.
리프리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되물었다.
“어머니. 이모님 말인데요. 라티에로 돌아오신 적 없으셨죠?”
“그래. 내가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 갑자기 어느 날 카르벨까지 낳았대서 깜짝 놀랐다니까.”
“그럼 형님을 낳으시는 건 보신 적 없으신 거네요.”
“산후 관리도 따로 별장에서 했다고 했었나. 그랬지.”
과거를 떠올리는 오델리아 왕비의 얼굴에 씁쓸함이 돌았다.
서로 치고받고 어릴 적 다투기도 했지만, 결국 가족이라서 금세 화해하고는 했다.
평생을 함께한 사람이 어느 순간 사라졌으니 시간이 흘렀다고 한들, 마음속 추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리프리 역시 복잡한 심경이었다.
‘형님은 무슨 생각이지.’
카르벨은 늘 전대 헤일튼 공작 부인이 그를 낳기 전, 라티에 왕국으로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사이가 좋았던 오델리아 왕비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아셀리의 서신이 진실처럼 들렸다.
순간 엘로니아의 얼굴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금 순진하고, 어떻게 보면 직설적이라 할 말은 다 하는 듯했던 그녀.
‘대범하게 거짓말을 할 성격은 아니야.’
아셀리는 처음, 그녀가 정령사가 아니라 확신했지만 리프리는 아니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이들끼리는 미세한 기운이 느껴진다.
미약하고, 늘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엘로니아에게는 마법을 사용하는 이들 특유의 파동이 존재했다.
“갑자기 또 이런 건 왜 묻는 거니. 카르벨과 싸운 거야?”
“그렇지 않아요.”
“잘 지내렴. 안 그래도 어릴 때부터 아등바등 살아온 아이라 늘 마음이 쓰여.”
적통을 입증하기 쉽지 않은 터라 힘겹기는 했어도 그게 어릴 때부터라고 표현할 정도였던가.
거의 성인식이 다 되어서 승계한 작위였다.
지금에서야 어린 나이라고 치부할 만큼 오래전의 일이라지만, 꼭 그녀가 하는 말은 훨씬 더 오래전을 뜻하는 것 같았다.
오델리아 왕비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리프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잠깐 에스피디 제국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
<조용한 곳을 좋아합니다. 사람이 많은 곳보다는 혼자 있는 편을 선호했던 것 같습니다. 현재는 정확하지 않으니 참고만 해주세요. 조만간 에스피디에 방문하겠습니다.
- 리프리 라티에>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한 서신에 엘로니아는 멋쩍은 듯 입맛을 다셨다.
“정말 오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서고 이야기를 꺼내서일까. 직접 방문한다고 하니 조금 긴장되었다.
엘로니아는 적당히 서신을 접어 침대 옆 서랍장에 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면 어쩌자는 거야.”
아무도 없는 곳에 메모만 달랑 둘 수는 없는 노릇.
“에이미. 오늘 저녁에 내 방으로 다과를 가져다주겠니?”
“네, 걱정 마세요! 매일 마님을 위한 케이크는 상시 구비 중이거든요!”
“아, 오늘은 카르벨도 오니까 너무 달지 않은 걸로 부탁해. 혹시 카르벨이 자주 찾는 게 있다면 준비해주면 좋고.”
매번 달달한 음식을 좋아하는 님프에게 맞추다 보니, 엘로니아가 찾는 다과는 카르벨의 입맛과 거리가 있었다.
카르벨을 한 번도 초대한 적이 없는 터라 엘로니아는 나름 조심스럽게 한 말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에이미의 반응은 초연했다.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오히려 더 신이 나 보이기까지 했다.
방문이 닫히자 벽 너머로 저들끼리 신이 나 재잘거리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주인님이 방에 들어가시는 걸 허락해주시나 봐!”
“잘됐다! 그럼 이제 아침마다 눈치 안 봐도 되는 거야?”
“그러겠네, 다행이다. 마님 없으면 너무 무서워서 뭐 하나 편히 못 하겠어.”
우르르, 흩어지는 발소리를 듣게 된 엘로니아만이 전혀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할 뿐이었다.
***
“오늘 저녁, 마님이 주인님을 방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엘로니아가?”
카르벨은 처음 받은 엘로니아의 초대에 조금 놀란 듯 집사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이 아닌 듯, 그는 다시 한번 강조해서 답했다.
“예, 드릴 말씀이 있다며 초대하셨습니다.”
할 말이 있다는 답에 만년필을 쥔 카르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떤 종류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령을 황궁에서 입증한 뒤, 묘하게 거리를 두던 그녀였다.
‘파혼인가.’
보던 서류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정령사라는 사실을 믿은 뒤로, 이날이 언젠가 올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빠르게 다가올 줄은 몰랐지만.
그 멍청한 약속을 제 입으로 했으니 원망할 대상도 본인뿐이었다.
“……알았네. 시간을 말해주면 맞춰서 가겠다고 전해주게.”
“예, 각하.”
그 말을 들으면 무어라 답을 해주어야 할까.
이상적인 답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간 고마웠어. 필요하면 언제든 날 찾아. 괜찮다면, 가끔 얼굴을 보는 일은 불가능한가.
‘멍청하기 짝이 없군.’
우습게도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목이 막힌 듯 심장이 조여왔다.
답답함에 크라바트를 잡아 풀은 카르벨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옥 같았다.
혹여 시녀 중 그녀와 친분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들어올 때면, 다른 말을 전하러 온 게 아닐까 조바심까지 들었다.
‘왜 사람들이 술을 찾는지 알겠어.’
맨정신보다는 어디 하나 풀린 정신으로 듣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독하게도 느리게 지나가던 시간은 우습게도 가까워질수록 빠르게 다가왔다.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그녀의 방문 앞.
수백 번은 그 너머에 있을 그녀의 수면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냥 지나쳤던 그곳.
매번 이런저런 핑계를 삼아야만 넘을 수 있었던 문 앞에서 그는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에 엘로니아의 어깨가 화들짝 튀어 올랐다.
시간이 다가온 걸 알면서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엘로니아의 답에 문이 열리고, 평소보다 굳은 카르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날렵한 시선이 준비된 다과에 머물렀다.
엘로니아는 방긋 웃으며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아, 앉으세요. 말이 길어질 수도 있어서.”
“그래.”
짤막하게 답한 카르벨이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엘로니아는 그런 카르벨을 빤히 쳐다보았다.
반듯한 자세, 미려한 외모. 다시 다듬기라도 한 것인지 외형이 깔끔했다.
“일하고 오신 거 아니세요? 어떻게 이렇게 말끔하세요? 비법 있으면 같이 좀 알아요.”
“……그냥, 일이 좀 있어서 가볍게 갈아입었어.”
어쩐지.
엘로니아는 그제야 납득이 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달리 그는 유독 말수가 없었다.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 하여, 커튼도 치고 정령들도 내보냈다.
어차피 있어도 못 보겠지만, 주변에 휩쓸려 그녀도 덩달아 시끄러워질 수 있으니까.
엘로니아는 이미 몇 잔을 비웠는지 모를 차를 마시는 척하며 힐끔, 그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시종들은 다 물렸어요.”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조용하고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언제나처럼 올곧은 자세가 아닌, 긴장을 놓아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카르벨의 턱이 움찔했다.
“그래. 어쩐지 조용하더군.”
“다과를 즐기시지는 않는 것 같아서, 저랑 에이미가 대충 입에 맞으실만한 걸 골랐는데. 어떠세요?”
“즐기지 않아도, 싫어하지는 않아. 그대의 권유를 거절할 생각도 없고.”
다행이다!
엘로니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차를 들이켰다.
그런 그녀를 카르벨은 진득하게 응시했다.
“……그러니, 언제든지 초대해줘.”
“괜찮은 날이 있으면요.”
어차피 매일 같은 저택에서 보는데, 굳이 엄청나게 좋아하지도 않는 다과를 자주 할 일이 있나.
하지만 오늘은 그에게 중요한 말을 건네야 하니 적당히 넘겼다.
엘로니아는 심호흡을 하며 타이밍을 봤다.
달칵, 그가 찻잔을 놓고 조금 어둑어둑한 방을 둘러보는 모습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그…….”
하나, 카르벨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혈통집을 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