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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88화 (188/234)

81. 좋아하는 것

흡. 본능적으로 엘로니아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들을 사람 하나 없는 과거였지만, 심장이 놀라 쿵쿵 뛰었다.

불안한 소리가 전신에 울리는 듯했다.

‘카르벨이 진짜 입양아였다고?’

막연히 아셀리의 거짓말일 거라 믿었거늘.

엘로니아가 질린 얼굴로 과거 속 그녀를 응시했다.

무슨 생각인지 안 그래도 날카로운 아셀리의 눈매가 한층 더 치솟더니, 급기야 혈통집을 끌어안고는 도망치려 했다.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탁 트인 듯 백색 소음이 인지되었다.

엘로니아는 덩그러니 황폐한 황실 서고에 혼자 서 있었다.

여전히 입을 틀어막은 채였다.

“말도 안 돼…….”

중얼거리는 그녀의 작은 음성도 텅 빈 공간에서는 크게 들렸다.

웅웅, 울리는 제 목소리를 들으며 엘로니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그녀는 힘겹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얘기해.”

모르고 사는 게 나은 걸까.

하지만 전대 헤일튼 공작 부부가 제 부모인지를 알고 싶다던 남자였다.

어느 쪽이 더 좋은 답인지 엘로니아는 알 수 없었다.

아셀리를 비롯해 방계 사촌들까지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아득바득 몸에 상처까지 입어가며 지킨 자리가 사실, 당신의 것이 아니라고.

당신이 운이 좋아서 헤일튼 공작가를 차지했다고 손가락질하는 게 진실이라고.

빈민가에서 입양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다고 설명할 자신이 엘로니아에게는 없었다.

엘로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돌려서 말하자. 아니면 별일 아니라면서 전해준다든가! 그것도 안 되면 위로라도…….’

될 리가 있나.

엘로니아의 입장에서는 제 부모가 사실 그녀를 입양했다고 한다면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부모님에게 애정이라고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드문드문 정령을 통해 보였던 과거에서 전대 헤일튼 공작 부부는 생각보다 좋은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 더 말하기 힘들어.’

애초에 궁금해한다고 말해주는 게 옳은 걸까?

때로는 모르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다고 한다.

복잡한 감정으로 엘로니아는 서고를 나섰다.

달칵, 문을 여니 앞에서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카르벨과 눈이 마주쳤다.

서늘하고 무표정하게 한적한 복도 어딘가를 응시하던 잿빛 시선이 그녀를 보자 부드럽게 휘었다.

“더 오래 있었으면 들어가서 확인할 뻔했어.”

“……아무도 없는 곳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려고요.”

“모르는 소리. 전에 쓰러졌잖아.”

아, 그랬지.

어떻게 그에게 혈통집에 대해 운을 띄워야 하나 고민하다 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의 얕은 머리로는 어떻게 포장을 해도 좋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평소보다 건조한 반응이 신경 쓰였는지, 카르벨이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표정이 좋지 않군.”

그의 엄지손가락이 가볍게 엘로니아의 미간을 쓸었다.

그제야 자신이 있는 힘껏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로니아가 다급히 표정을 풀었으나, 카르벨은 진지하게 되물었다.

“또 잔혹한 장면을 본 건가.”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말을 잇던 엘로니아는 빠르게 입술을 꽉 다물었다.

사람이 없는 곳이라지만 황실 서고도 엄연히 황궁이었다.

아셀리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자신의 사람을 심을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진실은 명확했으나, 아셀리에게 유리한 사실이라면 굳이 쥐여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말을 해도, 이곳에서는 아니야. 이런 분위기도 아니고.’

그녀도 조금 더 굳게 마음을 먹어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 유한 분위기에서, 시종들조차 없이 조용한 장소에서.

위로와 함께 건네기로 다짐했다.

엘로니아는 조금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요즘 갑자기 과거를 많이 봐서 조금 피곤한가 봐요.”

“돌아가지. 당분간은 과거고 마차고 신경 쓰지 않는 편이 좋겠어.”

카르벨의 눈꺼풀이 가볍게 우그러졌다.

걱정되었는지 에스코트를 위해 붙잡는 그의 손이 조심스러웠다.

엘로니아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카르벨, 뭐 좋아하는 거 없어요?”

카르벨의 시선이 진득하게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그 시선의 뜻을 알아챈 엘로니아는 새빨개진 얼굴로 다급히 외쳤다.

“취미라든가, 흥밋거리를 말하는 거예요!”

단호한 답에 실망한 듯 그의 눈동자에 비쳤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곧 무뚝뚝한 음성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딱히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럼 지금부터라도 좀 깊게 생각해 봐요. 음식도 좋고, 책이라든가, 하다못해 산책이나 계절을 좋아할 수도 있잖아요.”

“케이크 좋아해.”

“먹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는데요.”

“그럼 쇼핑. 돈 쓰는 게 취향이더군.”

“카르벨이 본인 물건을 그렇게 열심히 구매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럼 쇼핑해서 선물하는 게 취향인가 봐. 이제 알았네. 알려줘서 고마워.”

혈통집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조금 풀어주려고 했더니.

엘로니아는 뾰족해진 시선으로 가만히 그를 노려보았다.

“저 말고 카르벨이 좋아하는 거요. 카르벨이!”

카르벨은 고민하는 듯 연무장으로 향하며 침묵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황실 기사단원들과 웃으며 잠깐 검술을 봐주고, 번화가에 들려 난데없이 드레스를 맞추고, 꽃다발 선물을 그에게 받을 때까지도.

심지어 그 유명한 베이커리에서 케이크를 한가득 주문해 받아올 때도.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순간까지 잡담은 나눠도 그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덩그러니 제 방에 돌아온 엘로니아는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으아아! 이게 아니야!”

들고 있던 꽃다발을 침대 위로 던지자 침대 구석에서 퍼즐을 맞추던 닉스가 짜증을 내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정령사는 밖에서 신나게 놀고서 왜 저래?]

반면 님프는 신이 나 부케를 받듯 꽃다발을 주워 들고는 케이크 주변을 돌아다니며 꺄르르 웃었다.

엘로니아의 괴성에 놀란 에이미가 구두 박스를 들다 깜짝 놀라 물었다.

“치우면 안 되는 거였나요?!”

“미안. 에이미한테 한 말이 아니었어!”

엘로니아의 짧은 사과에 에이미는 고개를 갸웃한 뒤, 하녀까지 불러 오늘의 선물들을 부지런히 옮겼다.

엘로니아는 침대에 엎어져 중얼거렸다.

“카르벨이 뭘 좋아하는 거 같니, 닉스.”

[인상 쓰기?]

“그건 그냥 외모 아니야?”

[몰라. 알 게 뭐야. 나 살기도 바쁘다고.]

그는 건성으로 답하며 퍼즐 조각을 들고 고심했다.

아무래도 그는 퍼즐을 맞추는 삶이 매우 바쁜 모양이었다.

그를 가만히 보는 사이 님프는 꽃다발에서 꽃 한 송이를 꺼내어 엘로니아의 귀에 꽂아주었다.

엘로니아가 그녀를 따라 꽃송이를 만지작거리며 님프에게 화관을 만들어 주고 있을 때. 님프가 그녀의 책상을 가리켰다.

“아, 예전에 봤던 거?”

처음 헤일튼가에 들어와 귀족들의 상세 정보를 외울 때 보던 것들이었다.

당연히 카르벨도 포함되어 있었다.

“역시 님프는 천재야.”

엘로니아는 벌떡 일어나 카르벨 관련 내용을 찾았다.

그녀는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취미가 검술 연습? 검이라도 배워둘 걸 그랬나.”

대부분은 거짓 약혼에 끼워 맞추느라 조작된 정보였다.

아무래도 데드 경이나 함께 늘 붙어 다니는 그레이터라면 알지 않을까.

역시 주변 탐사가 우선이다.

엘로니아는 벌떡 일어나며 정령들에게 말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놀고 있어!”

그녀는 빠른 속도로 방을 나섰다.

가장 찾기 쉬운 사람은 데드였다. 일단 연무장에 가면 99.9%의 확률로 그가 있기 때문이다.

연무장에 고개를 내밀자마자 뭉쳐 있는 기사들 틈에서 듬직한 체구의 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엘로니아 님!”

활짝 웃으며 반기던 그는 쿵쿵,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아니, 시간도 늦었는데 연무장엔 어쩐 일이세요? 각하라면 오후부터 연무장은 잘 안 나오시는데.”

“오늘은 카르벨 말고 데드 경에게 온 거예요.”

“저요?”

그는 곤란한 듯 주춤거렸다.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엘로니아가 멀뚱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 데드는 홀로 내면의 자신과 싸우는지 복잡한 얼굴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저는 각하를 배신하는 일 따위 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뭘 배신해요?”

“각하 몰래 뭐 부탁하시려는 거 아니세요?”

“아뇨. 그냥 카르벨이 뭘 좋아하나 해서요.”

그는 짧게 탄식을 내뱉은 뒤, 멋쩍었는지 큰 소리로 웃으며 옆에 있던 나무를 퍽퍽 때렸다.

그 소리가 워낙 큰데다, 단단한 기사의 손을 버티지 못한 나무가 조금 파이기까지 했다.

“하하, 아, 각하께서 좋아하시는 거라면. 당연히 엘로니아 님이시죠!”

엘로니아가 식은 눈으로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 지레 찔린 그는 헤일튼가의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야, 각하께서 뭘 좋아하시냐?”

“어……. 데드 단장님을 검술로 괴롭히기요.”

쑥덕대던 이들이 큰 소리로 답했다.

이를 들은 데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렇다는데요.”

아무래도 데드에게 물어보는 건 잘못된 선택인 듯했다.

어둑어둑, 슬슬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카르벨의 집무실 근처에서 잠복했다.

비록 시종들이 당황한 듯 눈치를 보았지만, 그렇다고 내쫓지는 않았다.

한참 만에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 문이 열리고, 그레이터가 나왔다.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엘로니아는 그를 납치하다시피 끌어당겼다.

놀란 듯 그가 끌려오며 물었다.

“엘로니아 님?”

“있잖아요, 카르벨에게 제가 물었다고 하지 말고요. 혹시 카르벨이 뭐 좋아하는지 알아요?”

“직접 물으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는 순수하게 눈을 끔뻑이며 답했다.

엘로니아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깜짝 놀랄 만한 걸 선물해주고 싶어서요!”

“어, 그런 거라면……. 글쎄요. 이전에 검집에 달려 있던 작은 고리가 떨어져서 버리셨던 기억이 나네요.”

선물이라 했더니 정말 쓸모있는 걸 알려주었다.

‘선물 주면서 혈통집 얘기를 꺼내면 좀 그렇지 않나?’

머릿속에 잘 메모해둔 엘로니아는 결국 소득 없이 제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자 여전히 퍼즐을 맞추고 있던 닉스가 힐끔, 그녀를 보며 말했다.

[기세 좋게 나갈 때는 언제고. 표정이 왜 그래?]

“혈통집 얘기를 못 꺼내겠어…….”

[그냥 가서 외쳐. 카르벨, 사실 당신 헤일튼 공작가 자식이 아니에요! 하고.]

그의 말에 옆에서 케이크를 먹던 님프의 포크가 툭, 떨어졌다.

처음 들었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엘로니아는 제 머리를 가볍게 쓸어올리며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될까.”

[아니면 그 뭐야. 허여멀건 놈 있잖아. 사촌인지 팔촌인지.]

“리프리 저하?”

[아, 그런 이름이었나? 퍼즐 잘 맞추는 걔. 어릴 때 친했잖아. 뭐 좀 알지 않겠어?]

아무래도 조금 껄끄러운 상대이기는 했다.

특히나 카르벨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그런 질문을…….

‘아니지. 아셀리 전하가 카르벨을 협박할 때 어떤 정보를 근거로 두 사람의 의견이 맞았는지 알아볼 필요는 있어.’

혈통집은 이미 불에 타 사라졌다.

아셀리의 주장만으로는 카르벨이 헤일튼가의 적자가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었다.

‘무슨 패를 들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해.’

두 사람이 비즈니스적인 소통 정도는 하는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 떠올린 엘로니아는 망설임 없이 편지지를 펼쳤다.

그리고 그 아래에 빠른 속도로 글을 적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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