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좁은 길
마차 부품을 모아둔 것이 아까워, 엘로니아는 이프리트와 함께 다른 과거를 여러 번 확인하기로 했다.
걱정되었는지, 카르벨까지 쫓아왔다.
“대충 갈피는 잡혔어. 더 하지 않아도 돼, 엘로니아.”
“기껏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왜요.”
엘로니아는 괜찮다는 의미로 대기하고 있던 이프리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프리트도 우려가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대상의 얼굴만 확인하시면 끊겠습니다.]
여러 가지의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보기 힘겨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상의 범위가 늘어나기까지 했다.
‘이전에 점을 본다던 어르신 한 분만 살아남았던 것 같은데…….’
결국, 빈민가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일찍이 나온 이들만 살아남은 것이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누구보다 힘겹게 살았던지라 엘로니아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라고 빈민가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입고, 사랑을 받아도 모자랄 시기의 나이대였다.
하물며, 과거에서 보이는 아이 중, 일을 하지 않는 아이가 없었다.
하다못해 호객행위라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용서 못 해.’
이제는 아셀리, 그녀가 용서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내에 수많은 과거를 보게 된 탓에 엘로니아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토기가 치밀었으나 그녀는 두 손을 꽉 쥐어 참았다.
고집스러운 그녀를 지켜보는 카르벨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녀가 보고 상황을 알려준다면 일이 훨씬 수월하게 풀릴 수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녀가 마차를 확인해준 뒤, 갈피를 잡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좀 더 돌아가더라도, 카르벨은 그녀가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원인이 모두 자신 탓인 듯해 그는 들이쉬는 숨이 버거웠다.
“엘로니아.”
점점 식은땀이 흐르는 그녀를 보다 못한 카르벨은 성큼, 일정 거리를 지키던 공간으로 들어갔다.
이프리트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했으니, 과거를 끊어내기에는 이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었다.
‘이프리트가 날 싫어해 줘서 다행이군.’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 엘로니아의 초점이 그에게 맞춰졌다.
“아, 거의 다 봤는데.”
“그만해.”
“괜찮아요. 이프리트가 배려해줬거든요.”
방긋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편이 안쓰러움으로 묵직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마차 부품 따위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전대 헤일튼 공작 부부가 마차 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그 동선을 파악하며 사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그녀를 괴롭게 만들기 위한 일이 아니었다.
카르벨은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쥔 엘로니아의 손을 보고는 곧장 겉옷을 벗었다.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자, 엘로니아는 놀란 듯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한쪽 팔로 엘로니아의 어깨를 꽉 붙잡고는 멀찍이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을 향해 외쳤다.
“엘로니아가 쉴 수 있게 방을 따뜻하게 정비하고, 차를 준비하도록!”
얼떨결에 그의 부축을 받게 된 엘로니아는 제가 제법 지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를 보겠다고 큰소리를 쳐놓고 이런 꼴을 보이니 민망했다.
엘로니아가 고개를 들지 못하자, 카르벨의 낮고 단단한 음성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대가 말했지. 조금 기대도 된다고.”
“아, 그랬죠.”
조금 오래전에 했던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엘로니아가 눈을 깜빡이며 생경한 듯 답하자, 카르벨이 곧장 말을 이었다.
“그대로 돌려주지. 그대가 다 짊어질 필요 없어.”
“그래도…….”
“죽은 아이들이 안타까운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게 그대 탓은 아니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이유도 없고.”
카르벨은 무언가 마땅치 않은 듯 복도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는 화를 억누른 듯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니 몸을 상하면서까지 감당하지 마.”
“그냥 버틸 만했어요.”
“그게 문제야. 그거 알아, 엘로니아?”
모르겠다는 듯이 엘로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진이 빠진 탓인지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이자, 그가 단단히 잡아주며 답했다.
“나보고 기대라 해놓고, 그대는 늘 혼자 해결하려고 했다는 거.”
“…….”
“결혼해달라고 한 말이 문제라면 잊어. 그 때문에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펠런 백작 부인이라도 불러서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현재 제국 내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엘로니아가 지닌 인맥 중 손에 꼽힐 사람이 카르벨이었다.
‘애초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하고.’
정작 큰소리를 내놓고 엘로니아는 입을 다물었다.
카르벨은 인내심 좋게 독촉하지 않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누군가에게 제 속내를 털어놓는 일은 아직 어색했다.
정령들에게조차도 잘해주고 싶을 뿐이지, 제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니까.
별것도 아닌데 한마디를 뱉는 게 쉽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저를 내려다보는 잿빛 시선을 느끼며 하릴없이 손톱을 문질렀다.
그런 그녀에게 카르벨이 따뜻하게 말했다.
“힘든 걸 힘들다고 말하는 건 약한 게 아니야, 엘로니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로니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카르벨의 커다란 손이 다시금 그녀의 어깨에 둘린 겉옷을 추슬러주었다.
알싸한 향이 감돌았다.
평소 듣기 힘들 정도로 누그러진 음성이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 약하면 뭐 어떠한가. 원한다면 내가 그대의 배경이 되어주고, 검이 되어주면 돼.”
“뭐예요.”
엘로니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음 어딘가 무너져 내린 듯했다.
‘생각해 보니 힘들다고 해본 적이 없구나.’
왜 카르벨이 늘 마음에 쓰였나 했는데, 아마도 그녀 자신을 투영해서가 아닐까.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기대 본 적 없고, 누군가에게 제 비밀을 털어놓을 곳 하나 없이 고립된 삶.
힘들다고 말을 하기에는 세상 모두가 힘들게 살고 있었다.
그래서 참아냈다.
대부분은 남의 한탄을 듣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카르벨은 조용히 방문을 열어 그녀를 들여보냈다.
마치 선이라도 그어진 것처럼 카르벨은 방문을 넘어오지 않았다.
살포시 떠밀려 들어온 방은 에이미가 급히 정리했는지 평소보다 따뜻했다.
“그럼 쉬어. 나머지는 내게 맡기고, 그 작은 정령이라도 부르는 편이 좋지 않겠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엘로니아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며 그를 마주 보았다.
“차 한잔하고 갈래요?”
“…….”
“닉스는 지금쯤 노움이랑 바닷가재 잡으러 갔을 거예요.”
며칠 전부터 가재 노래를 불렀던 정령들을 떠올리며 엘로니아는 살포시 웃었다.
카르벨은 놀란 듯 잠시 그녀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답이 없자 거절을 당했다는 생각에 엘로니아는 괜히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기껏 용기를 내서 말했는데!’
거짓말쟁이. 뭐, 다 말하라더니 반응이 시원치 않다.
엘로니아는 다급하게 방의 문고리를 잡으며 닫을 듯 말했다.
“싫으시면 마시고요. 들어가세요!”
빠른 속도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순간 턱. 잘 닦인 구두가 방문 사이에 끼어들었다.
다시 열린 문에는 카르벨이 싱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영광입니다, 레이디.”
조금 환히 웃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
다음 날. 황궁에서 다시 한번 화재가 났던 서고의 공간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에 대한 답신이 돌아왔다.
[불허합니다.]
아셀리의 직인이 찍힌 종이는 거절을 내포하고 있었다.
사유는 간단했다.
“일전의 화재 현장을 본 이후로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당분간은 손님을 받지 않겠다는군.”
카르벨은 건성으로 서신을 읽으며 혀를 찼다.
적당히 그럴싸한 변명이었다.
“그럼 어떡해요? 못 들어가요?”
“갈 수는 있지.”
“황궁인데요?”
카르벨은 아주 태연하게 종이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팔락이며 떨어지는 서신을 두고 그는 말했다.
“황궁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네?”
“정식으로 방문이 안 된다면, 몰래 가면 되는 것이지.”
엘로니아는 경악으로 입이 벌어졌다.
설마 황궁에 침입하자는 뜻인가?
드디어 하다 하다 역모죄로 모가지가 잘리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카르벨은 진심인 듯했다.
“내가 총사령관이라는 걸 잊지 마, 엘로니아.”
***
“어쩐 일이십니까, 카르벨 각하!”
“황실 기사단 연습에는 오랜만이십니다. 늘 데드 경만 오셨는데 말이죠.”
바글바글, 황실 기사단의 인장을 어깨에 단 이들이 무수히 인사를 건넸다.
카르벨의 옆에서 어쩔 줄 몰라 눈만 깜빡이던 엘로니아는 화들짝 놀라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엘로니아 데브니입니다.”
“정령사님, 데드 경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와, 진짜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넉살도 좋은지, 기사단원들은 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엘로니아는 방긋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며 복화술로 카르벨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 어떻게 화재 현장까지 가요?”
“근처야. 여기서 저기, 작은 골목 보이나.”
카르벨이 눈짓으로 가리킨 곳을 보자, 건물 사이에 난 작은 공간이 있었다.
엘로니아는 가늘어진 눈으로 가만히 그곳을 응시했다.
“저게 뭔데요?”
“지름길.”
그는 다른 기사들의 인사를 손을 들어 받아주며 태연하게 말을 덧붙였다.
“저기로 가면 긴 복도를 둘러 가지 않아도 돼. 곧장 서고가 나오지.”
“와, 정식으로 난 길도 아닌데. 어떻게 알고 계세요?”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보아하니 어지간히 황궁 지리를 잘 알지 않으면 알기 쉽지 않을 정도의 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좁은 틈인데다, 기사단의 연무장을 끼고 있어 일반 귀족들은 함부로 들어오기 애매한 장소이기도 했다.
‘헤일튼 공작가에서 자라면 저런 것도 알게 되는 건가?’
묘한 기분이었다.
한참 인사를 건네던 기사들은 급기야 그에게 대련을 요청했다.
하지만 카르벨은 따라 나온 데드 경을 던져줄 뿐이었다.
“오늘도 역시 데드 경이 대련을 봐줄 것이다.”
“제게 맡기십시오! 자, 다들 준비되었나!”
열정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푸는 데드 경의 목소리에 황실 기사단은 환호했다.
고작 대련 하나에 그들은 이미 정신이 팔린 듯했다.
그게 신기해 얼떨떨하게 바라보자, 카르벨은 슬쩍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원래 기사란 강한 자와 대련하며 배우는 것에 욕심이 나는 법이거든.”
그는 자연스럽게 기사단의 뒤로 빠져나왔다.
연무장을 조금 지나자 수많은 사람들의 음성이 희미하게 들렸다.
막상 건물 앞에 다가서니 담이 있었다.
카르벨은 주변을 살피더니 씨익 웃으며 까닥, 고갯짓을 했다.
그를 따라가자, 담과 담 사이에 딱 사람 하나가 지나갈 법한 공간이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뚫어둔 듯했다.
“여기 이런 공간이 있었네요?”
“어릴 때는 이쪽으로 많이 다녔지. 아버지가 연무장에서 기사들을 상대할 때면 말이야.”
“아, 역시. 어릴 때 다니시던 길이구나.”
서고를 많이 오간 걸까?
엘로니아는 그를 따라 도둑이 된 기분으로 슬금슬금 화재 현장으로 향했다.
좁은 건물 틈은 딱 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앞장서는 카르벨의 뒤를 따라가는 순간, 발밑에 까만 정령들이 통통 뛰어다녔다.
‘아, 이프리트랑 다니던 살라만더들이다.’
정령은 반가운지 엘로니아를 향해 통통 뛰어왔다. 순간, 스치듯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로엘 황태자와 카르벨.
한참 어린 두 사람이 즐거운 듯 이 공간을 지나 서고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