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82화 (182/234)

75. 결투

엘로니아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샴페인도 술이라고 순간 미세하게 어지럼증이 돌았다.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자 카르벨이 바짝 뒤로 붙어 그녀를 부축했다.

똑바로 서기 위해 몸을 비틀었으나, 꽉 붙들린 허리 탓에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평소라면 벗어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제 머릿속을 몸이 한 박자씩 느리게 따라가는 듯했다.

이를 보던 제론이 슬며시 웃으며 카르벨을 향해 말했다.

“정령사님께서 불편해 보이시는데요.”

“아니에요! 그저 조금 어지러워서…….”

엘로니아는 힘차게 부정했다.

저 나름대로 목소리에 힘을 주었으나 정작 뱉어진 음성은 살짝 어눌했다.

카르벨은 조금 더 굳은 음성으로 답했다.

“약혼까지 한 영애를 이렇게 되도록 두셨다니. 신사의 의무를 잊으셨군요, 제론 가드윈.”

“정령사님의 의견을 존중했을 뿐입니다만.”

“방임을 존중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군요.”

그들의 대화가 조금 시끄럽게 들렸다.

그만 마시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홀로 정령사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입궁할 때면 그녀와 의견을 함께해 줄 제 편이 필요하기도 했다.

‘척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

지금이야 카르벨이 일당백을 하고 있다지만, 파혼 후까지 지지해달라고 부탁할 만큼 엘로니아는 염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술기운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리자 엘로니아는 짧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빠르게 잡아낸 제론이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보란 듯 답했다.

“보십시오. 약혼자가 이리 집착을 하니 정령사께서 피곤해하시지 않습니까, 헤일튼 공.”

그녀의 허리에 둘린 카르벨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무어라 반박이라도 할 줄 알았으나, 카르벨은 웃는 낯으로 의중을 알 수 없게 입을 다물었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제론이 말을 덧붙였다.

“본래 사람이란 게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능력이 있다면 다른 한쪽은 뒤를 받쳐줘야 하는 법이지요.”

“다른 이들이 오해하기 좋은 말이로군요.”

“오해일까요? 다들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론이 주변을 둘러보며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헤일튼가 정도의 규모라면 안주인이 필요하지요. 정령사님께서는 안팎으로 공사다망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아뇨, 저 그렇게 바쁜 편은 아니…….”

어째 돌아가는 꼴이 이상하다.

엘로니아가 다급하게 반박하려 들자, 제론은 그보다 빨리 입을 열었다.

“정령사님에게 어울리는 이는, 정령사님을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울 수 있는 이가 아니겠습니까. 헤일튼 공처럼 바쁘신 분이 아니라.”

“재밌군.”

비웃음이 섞인 음성이 조용히 목울대에서 울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르벨이 이를 세워 제 장갑의 끄트머리를 물었다.

가벼이 당기자 손쉽게 벗겨진 장갑을 그는 그대로 제론의 앞으로 던졌다.

탁, 소리가 나며 홀의 바닥에 내팽개쳐진 장갑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장갑을 던지는 것은 결투를 신청한다는 의미였다.

이를 주우면 결투를 받아들이겠다는 행위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기사라면 응당 결투 신청은 피하지 않는 법.

하지만 상대는 카르벨 헤일튼,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제론이었다.

그를 보며 카르벨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살벌하게 말했다.

“받지 않으십니까.”

“화, 황궁에서 결투를 신청하시다니. 무례합니다.”

“장소야 옮기면 그만입니다만. 약혼녀와 가문을 모욕하는 이를 두고 가만히 있는다는 것이 더 무례하지 않겠습니까.”

설마 진짜 칼부림이라도 나는 건가?

순간적으로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엘로니아의 눈이 휘둥그레 해져 카르벨의 품에 안긴 채 제론과 그 사이를 종횡무진 오갔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검이 오고 가면 다칠 확률이 배로 올라가지 않는가.

‘설마 나 때문은 아니, 아니지?’

엘로니아는 부리나케 외쳤다.

“서, 서로 마음에 두고 있는데 그런 게 문제인가요? 저택의 일은 저와 카르벨이 양분해도 될 일입니다!”

“마음에 두고 있으시다면서 아직까지 혼인식을 올리지 않으신 것도 이례적이죠.”

“그건, 제가 황궁에 익숙해질 시간도 필요했고, 헤일튼가와 같은 유서 깊은 가문에 대해 공부할 것이 많아 그랬지요!”

“아셀리 전하와 혼담까지 오고 가던 카르벨 공께서 어느 날 사랑에 빠졌다며 갑작스럽게 데려온 약혼녀를, 여태 그냥 두었다? 그럴 수 있죠.”

제론은 하,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것치고 혼인식이 더디니 드리는 말입니다. 실제로 공식적인 폐하의 명을 제외하고는 바깥에서 함께 모습을 내비치시는 일도 거의 없지 않습니까.”

“카르벨의 일이 바빠서…….”

“마음이 변했다 하여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 정령사님을 생각해서 드린 말씀입니다만.”

“변하지 않았어요!”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라!

엘로니아는 답답함에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말보다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눈에 힘을 주며 카르벨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슬며시 몸이 기운 그가 당황한 듯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는 복화술로 이를 악문 채 작게 속삭였다.

“카르벨, 입 꽉 다물어요.”

“이유는.”

“제가 살짝 취해서 지금 간이 부은 것 같거든요. 기왕 돌아버린 김에 이 소문도 싹 정리하자고요.”

살짝 어눌해진 말투 탓에 엘로니아의 말은 썩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엘로니아는 검이 오고 가는 것보다는 이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제론의 말대로 황실에서의 결투 신청은 그리 예의 좋은 모습이라 보기 힘들었으니까.

누군가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죽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과연 그 누가 서로 싫증이 났지만, 약혼했다는 이유로 버틴다고 생각하겠는가.

엘로니아는 질끈 눈을 감고 그대로 카르벨에게 입을 맞추었다.

따스한 촉감이 가볍게 닿았다.

언 듯이 잠깐 굳었던 카르벨이 곧 응답하듯 그녀에게 몸을 붙여왔다.

장갑을 끼지 않은 카르벨의 맨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쌌다.

‘어라…….’

엘로니아는 분명 적당히 하고 떨어질 생각이었다.

단지 다른 이들에게 자신들의 사이가 괜찮다고 증명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카르벨의 고개가 기울었다.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리고 그의 뜨거운 숨결이 들어왔다.

“카르…….”

엘로니아가 놀라 뒤로 몸을 물리려 하자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먼저 시작한 건 그대야.”

엘로니아가 무어라 덧붙이기도 전, 그녀의 말은 그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가볍게 시작한 입맞춤이 점점 짙어졌다.

호흡이 가빠지고, 맞닿은 곳곳에 열기가 올랐다.

도망치려 할수록 잡아끄는 힘이 강해졌다.

웅성거리던 시끄러운 홀 안의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어느새 모든 감각이 그 하나만을 예민하게 좇았다.

술기운 탓에 힘이 풀리려는 그녀를 그는 가뿐히 지탱했다.

먼저 입을 맞춘 것은 그녀인데, 어째서인지 점차 몰리는 것도 그녀였다.

엘로니아가 모자란 숨을 찾아 그의 가슴 언저리를 움켜쥐었을 때가 되어서야 그는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얼굴에 오른 열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더웠다.

그런 엘로니아를 보며 카르벨은 고개를 기울여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곧장 고개를 들어 넋이 나간 듯 얼어붙은 제론을 향해 말했다.

“누가 그러던가. 파혼을 원한다고. 보다시피 약혼녀가 여러모로 많은 이들이 찾는지라, 밖보다는 안이 편해서 그랬던 것을.”

그제야 엘로니아는 들리지 않았던 이들의 음성이 서서히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뒤늦게 긴장이 풀린 듯 다리에 힘이 빠질 것 같았다.

카르벨이 받쳐주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그레이트 홀 바닥에 주저앉는 추태를 부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그녀를 다정히 바라본 카르벨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결투 신청을 거둬들이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니 헤일튼가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언제든 주워 찾아오시면 반갑게 상대해드리죠.”

그 말을 끝으로 엘로니아는 카르벨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을 나왔다.

***

“카르벨, 잠깐만요.”

“말해. 듣고 있으니.”

엘로니아는 가볍게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는 카르벨이 낯설었다.

헤일튼 공작저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부터 그는 끈덕지게 그녀의 곁에 붙어 있었다.

술기운이 남아 있다고 한들, 걷지 못할 정도로 인사불성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카르벨은 마차에 오를 때도 마치 그녀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엘로니아를 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마중을 나온 시종부터 기사들까지 모두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가, 각하. 제가 모, 모실……. 으, 읍! 읍!”

“들어가십시오, 각하.”

눈치 없는 데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사가 그의 입에 손수건을 쑤셔 넣었다.

그레이터도 서류를 들고 오다말고 그대로 뒷걸음질 쳐 나왔던 문으로 들어갈 정도였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그들과 마주할 수 없어 엘로니아는 고개를 그의 품에 묻으며 제 방까지 함께 걸었다.

그 모습을 본 닉스는 잔뜩 화가 나 외치고 있었다.

[애가 술에 담가져서 올 때까지 뭘 한 거야, 이 망할 놈!]

허공에서 자그마한 손을 휘둘러봤자 카르벨에겐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그들의 주변을 빙빙 돌던 닉스는 엘로니아의 이마를 고사리 같은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내가, 어? 정령사 해장까지, 술까지 깨게 해줘야 하냐고! 대체 정령왕은 저런 놈은 안 잡아가고 뭐 하나 몰라! 왕이면 다야?!]

다지……. 왕이면 다야…….

닉스의 손길에 미진하게 남아 있던 술기운도 단번에 사라졌다.

하지만 미세하게 오른 열은 그대로였다.

술 탓에 오른 열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 원인은 바로 그녀의 앞에 있는 남자, 카르벨 탓이겠고.

“왜 입을 맞췄지.”

“그게, 음. 수, 술버릇인가? 술이 원수죠, 암요!”

“그럼 앞으로 다른 이들 앞에서는 한 잔도 용납하면 안 되겠군. 약혼녀가 생판 모르는 놈에게 입을 맞추면 안 되니.”

아니, 말이 또 그렇게 되나.

살벌한 그의 말에 엘로니아는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입술을 오물거리자, 그가 다시금 고개를 기울며 입을 맞춰왔다.

“연회에 자주 갈까. 제론인지 제보스인지가 하는 말이 거짓은 아닐 테니.”

“서고 재건 일로도 빠듯한데 뭐 하러요. 카르벨도 바쁘잖아요.”

“그대에게 낼 시간조차 없지는 않아.”

거짓말. 매번 밤을 꼬박 새우는 걸 알고 있는데.

엘로니아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지자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좋은지 그는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대단히 웃긴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도 그는 쉽게 웃음을 흘렸다.

‘원래 이렇게 웃음이 잦은 사람이었어?’

비록 입매가 늘어진 정도의 아주 은근한 미소였지만 생소했다.

짜증 나게도 그런 그가 잘생겼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가식적으로 웃어도 그렇게 사람들이 힐끔거렸는데. 즐거워 보이니 보는 사람도 좋기는 하네…….’

엘로니아의 눈에 그의 입술이 들어왔다.

동시에 그가 연회에서 했던 입맞춤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기껏 가라앉았던 얼굴의 열기가 순식간에 다시 올라왔다.

점점 벌게지는 얼굴에 그녀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카르벨의 어깨를 밀어냈다.

“이, 이제 괜찮으니까 가요. 닉스가 술도 깨게 해줬어요.”

“얼굴이 아직 발갛게 달아올랐는데.”

하지만 태연하게 핑계를 대는 그는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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