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77화 (177/234)

70. 따뜻한 위로

정말 데브니 남작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유일하게 아는 것이라고는 엘로니아가 정령사가 아니라는 것 정도.

이마저도 발설할 생각이 없었다.

이는 자신의 최후의 보루이자 제 한평생을 책임질지도 모를 중요한 정보였다.

그래서 같잖은 정보로라도 협박을 하려고 했을 뿐인데, 그게 죄란 말인가.

이전까지는 겉으로라도 예의를 차리던 아셀리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카르벨 공에게 엘로니아를 빌미로 용서를 빌어보면…….’

도와줄 리 없다.

이 함정을 판 사람이 바로 카르벨 헤일튼 공작이니까.

이미 몇 번이고 그와 엘로니아에게 서신을 보냈다.

가족 없이 사는 게 어디 마음 편하겠냐고. 앞으로 잘 지낼 테니, 도와달라고. 반성했으니 잘 살아 보겠다고.

물론 이곳에서 나가기 위해 급작스럽게 만들어낸 반성이었다.

엘로니아는 정에 약하고 무른 구석이 있었다.

제 부모를 이렇게 내버려 둘 애가 아니었다.

그래야만 했는데.

‘왜 답이 없어! 대체 왜!’

어째서인지 답장 한 통이 오지 않았다.

서신을 보기는 했는지조차도 모호하니 거절인지 아닌지 의중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아셀리의 구두가 지하 바닥과 맞닿아 일정한 간격으로 딱, 딱, 소리를 냈다.

더 이상 선택권이 없었다.

이건 엘로니아가 답장이 늦은 탓이다.

데브니 남작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엘로, 엘로니아가……. 사실은…….”

***

[찾으시는 건 있으십니까.]

이프리트의 질문에 엘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빈민가 골목의 한 어귀.

로브를 뒤집어쓴 그녀는 더럽고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길바닥을 훑었다.

“아무래도 이렇게는 못 알아내는 모양이네.”

정령사는 장소와 물건 등 특정한 어느 하나를 매개체로 삼았다.

즉, 과거에 있던 일을 보고 싶다면 과거의 장소나 그곳에 있던 물건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마차 사고 장소에서 알 수 있는 내용이란 그저 사고 장면에 불과했다.

그 마차를 매수한 이를 보고 싶다면 사고 장소가 아닌 매수 장소나 물건이 필요했다.

‘혹시나 해서 와봤지만 역시나네.’

엘로니아는 바깥까지 나와 고생한 이프리트에게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나 때문에 나오기까지 했는데, 고생시켜서 미안해.”

[괜찮습니다. 정령의 후손께서 원하신다면 그 무엇이든.]

담담한 말이었으나 이프리트는 다른 정령들과 달리 과할 정도로 예절을 지켰다.

엘로니아의 옆으로 빈민가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일부는 낯선 외부인이 신기한 듯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으나, 무작정 불쾌하게 여기는 이도 있는 듯했다.

날것의 시선에 엘로니아는 로브를 더욱 깊게 썼다.

‘카르벨이랑 같이 올 걸 그랬나.’

이프리트가 그를 꺼리는 탓에 동행할 수 없었다.

넓은 곳이면 모를까, 마차부터 진득하게 타고 온다면 이프리트의 붉은 얼굴빛이 창백해질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카르벨은 엘로니아 혼자는 죽어도 못 보내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는 이프리트와 대화를 하게 해 달라 요청했지만, 엘로니아가 카르벨의 이름을 꺼낼라치면 이미 이프리트가 멀찍이 도망가는 바람에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다.

‘카르벨도 잘 보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데. 이프리트는 너무 사람을 가리네.’

최근 마차 사고를 조사하면서 누구보다 바빠진 건 카르벨이었다.

공식적인 업무는 업무대로, 거기에 황실 서고 재건에 개인적인 마차 사고까지 더해지니 하루 두 시간 정도만 간신히 눈을 붙이는 모양새였다.

이런 그에게 다른 스트레스를 더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엘로니아는 호위 몇을 붙여 은밀하게 사고 지역으로 왔을 뿐이었다.

어차피 확인만 하고 금방 돌아갈 터라 위험할 일도 아니었다.

엘로니아가 빈민가를 빠져나가기 위해 바지런히 걸음을 옮길 때.

그녀의 귓가로 주변에 있던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우, 이게 무슨 냄새야? 뭐 태워 먹었냐?”

“뭔 개소리야.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아까 골목 어귀로 들어오는데 훅 탄내가 나던데. 네 놈 코가 막힌 거 아냐?”

“됐고, 야. 그 소문 들었냐? 정령사가 가짜라며?”

정령사라는 말에 엘로니아가 멈칫,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자신의 로브를 더 깊게 눌러썼다.

애초에 황궁에서만 모습을 드러낸 엘로니아를 그들이 알 리 없었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남자들은 상스러운 욕을 섞어가며 말을 이었다.

“또 헛소리하기는.”

“지켜봐. 조만간 크게 터진다더라. 오히려 쉬쉬하는 거 보면 뭐 찔리니까 그러는 거 아냐?”

“아, 하긴. 그래, 권위 높으신 분들이 딱 끼고 있으면 원래 진실도 거짓이 되는 거고 거짓도 진실이 되는 거지.”

“몰라. 에이씨, 황실 서고 재건한대서 중간에 뭐 떼어먹을 거 없나 했더니. 요즘 뭐 되는 일이 없네.”

퉤, 침을 뱉는 그들의 시선이 잠시 엘로니아를 향했다.

낯선 이가 듣고 있으니 한층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뭘 봐?”

엘로니아는 꾸벅 인사를 건넨 뒤 빠른 속도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정령사가 가짜라는 소문은 이전부터 꾸준히 있어 왔다.

그게 빈민가까지 내려올 줄은 몰랐지만.

엘로니아는 곧장 망설이지 않고 헤일튼 공작저로 돌아왔다.

마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에스코트 한 데드 경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일정을 이것으로 마치시면 각하께 보고를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 내가 시간이 나니까 직접 할게요. 괜찮죠?”

“그래 주시면 저야 너무 감사드리죠! 그럼 잘 좀 부탁드립니다!”

냉큼 고개를 숙이는 그를 뒤로한 채 엘로니아는 카르벨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시녀가 문을 두드렸다.

“엘로니아 양께서 오셨습니다.”

안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혹시 못 들었나 싶어 시녀가 조금 더 세게 문을 두드리려 하자 엘로니아는 가볍게 저지했다.

“주무시나 보다.”

“아, 그럼 그냥 이따가 방문했다고 말씀 전할까요?”

“그냥 집무실 안에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뭐.”

끼익, 작게 문을 열고 살금살금 들어가자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카르벨이 보였다.

옆에는 서류를 쌓아두고, 두 손은 깍지를 낀 채 자신의 배 위에 올려져 있었다.

슬그머니 꺾인 고개와 쭉 뻗은 다리는 자리가 부족한지 불편하게 꼬여 있었다.

요 며칠 고생을 했는지 얼굴이 상해 보였다.

‘쉬엄쉬엄하라니까. 뭐 하나 나타나면 뒤도 안 돌아보는 성격이라니까.’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그의 옆에 가 앉았다.

혼자는 못 보내겠다며 날뛸 때는 언제고 아주 잘만 자고 있다.

‘그것 봐. 내 말이 맞지? 이프리트랑 가면 될 걸, 따라올 필요까지는 없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또 막상 자고 있는 걸 보니 모순적이게도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헤어지기 싫달 때는 언제고. 완전히 속 편하네.’

제가 생각해도 제 마음이 너무 제멋대로라 엘로니아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카르벨의 옆으로 몸을 붙였다.

날렵한 콧날, 곧게 뻗은 눈매와 고집스러운 입매. 적당히 굵은 선에 잘생겼다는 말이 어울릴 법한 턱선.

타이트한 베스트에 목까지 크라바트를 꽉 감싼 게 그답기도 했다.

잘 때는 좀 편하면 좋을 텐데.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그의 팔을 붙잡아 흔들었다.

“카르벨. 들어가서 자요. 여기서 이러다가 입 돌아가요.”

그러기엔 집무실 온도가 적당히 따뜻했다.

만약 카르벨이 깨어 있다면 득달같이 그 부분을 지적했을 터.

여전히 답이 없는 것을 보면 정말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엘로니아는 슬쩍 카르벨을 살폈다.

그는 눈을 감아도 고매했고 기품이 느껴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사람처럼 흐트러진 모습도 그가 의도한 것처럼 보였다.

전대 헤일튼 공작 부부는 사고사가 아니었다.

모든 지표가 가리키는 게 그러했다.

아무래도 남의 죽음은 아직 그녀에게 무거운 주제였다.

이름 모를 범인에 대한 분노라도 표현할 줄 알았는데, 카르벨은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더 자신을 채찍질하며 달리는 듯했다.

“그러다 몸 상하는데.”

엘로니아는 빳빳한 크라바트가 계속 눈에 거슬렸다.

잘 때라도 좀 편하게 잤으면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뻗은 그녀는 조심스럽게 목을 감싼 크라바트를 끌어당겼다.

살짝 느슨해지려던 찰나. 강한 힘이 엘로니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순간 놀란 그녀가 엉겁결에 그에게 가까이 붙자, 카르벨은 이를 놓치지 않고 제 품에 가뒀다.

“카, 카르벨?”

고개를 들어 살폈으나 마치 그는 여전히 자는 사람처럼 평온했다.

하지만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하게 조여 맨 팔이 그가 잠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카르벨. 일어난 거 다 알아요.”

“잠깐 깬 거야.”

거짓은 아니었는지 깊게 잠긴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그는 보란 듯 기울었던 고개를 엘로니아가 있는 방향으로 돌렸다.

그녀가 바스락거리자 카르벨은 오히려 팔을 감싼 손을 깍지를 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며 중얼거렸다.

“걱정할 때는 언제고. 꼭 눈을 뜨면 빠져나가려고 하지.”

“진짜 입 돌아간다니까요. 멀쩡한 방을 두고 왜 여기서 자요.”

“잠깐 눈 붙인다는 게.”

그는 조금 크게 숨을 들이쉬며 소파에 등을 묻었다.

반쯤 누운 듯한 그의 옆에 붙어 있던 엘로니아의 귀에 그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심장이 낮게 뛰었다.

그리 춥지 않은 날씨였는데, 그의 품이 너무 아늑해서 곤란했다.

엘로니아가 숨을 죽이고 있자, 카르벨이 혼잣말처럼 졸음이 섞인 말을 덧붙였다.

“방에 들어가면, 그대가 찾아오지 않을 거잖아.”

“……그게 전부예요?”

“난 그대 방에 꽤 자주 갔는데. 내 방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그의 말이 사실이라 엘로니아는 할 말이 없었다.

너무했나 싶은 마음에 엘로니아가 자그마한 소리로 반박했다.

“내 방도 그렇게 많이 온 건 아니잖아요.”

“글쎄. 그렇다고 하자.”

“사실이잖아요. 아니에요? 나 몰래 들어왔어요?”

“그대가 알면 도망갈까 봐 안 알려 줄 생각이야. 궁금하면 옆에서 알아보든지. 그럼 한 30년쯤 지나서 알려 줄게.”

“너무 길잖아요.”

“아니다. 애는 한둘 정도 낳았을 때로 할까. 첫째 결혼시키면 알려 줄게.”

반쯤 잠에 취해도 여전히 얄궂은 구석이 있는 남자다.

그런데도 밉지 않다는 게 참 희한했다.

미세한 열기, 조용한 공간.

가족, 일 그 무엇도 생각이 나지 않는 이 공간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그녀에게 카르벨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머리 하나 기댄다고 바스러질 어깨 아니야. 그냥 편히 해.”

“그래도…….”

“잠이 잘 안 와서 그래. 그러니까 옆에 잠깐만 있어 줘.”

망설이던 엘로니아는 어색하게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처음으로 품에 안겼으나, 생각보다 편했고, 또 생각보다 불편했다.

엘로니아는 손끝이 간지러워 꼼지락거렸다.

제 허리를 덮은 커다란 손은 여전히 단단하게 그녀를 지탱했다.

엘로니아는 그냥, 이 모든 상황이 언제가 되고 기억이 날 것 같았다.

분명 위로하러 온 사람은 그녀였는데, 어째서인지 본인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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