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로엘 황태자
엘로니아는 저를 빤히 응시하는 아셀리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을 하고 나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전부터 거슬렸어.’
차라리 다른 향수였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필 카르벨만 맡을 수 있는 건 또 뭐람.
곧이어 아셀리의 차분한 음성이 답을 건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향수라뇨.”
“리아티코 향수를 쓰시는 거 아니셨나요? 다른 일반적인 향수보다 조금 진한 듯해서요.”
“……제가 좀 과하게 사용했나 보군요. 유의하겠습니다.”
아셀리는 정중하게 사과를 건넸다.
이렇게 나오니 또 제가 너무했나 싶은 기분이 들어 엘로니아도 그녀를 따라 어영부영 고개를 숙였다.
비록 카르벨이 일찍이 그녀의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또각, 또각. 아셀리의 구두 소리가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려왔다.
엘로니아는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로 걸어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발밑에 다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프리트구나!’
이제는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엘로니아가 반갑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녀에게 반응하듯 검은 연기가 일렁였다.
이 와중에도 검은 연기는 바로 옆에 있는 카르벨을 피해 빙 둘러 그녀의 발밑으로 모여들었다.
호기심에 슬쩍 그에게 가까이 발을 붙이니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카르벨이 없는 방향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연기가 슬그머니 엘로니아의 시야를 가렸다.
순식간에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가 보이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아무것도 없던 장소는 어느새 책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밤, 어두운 서고 안.
흐릿한 등불이 빼곡한 책장 사이를 비추고 있었다.
구석진 틈에서 어린 아셀리와 로엘 황태자가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싫어!”
“아셀리, 내 말 듣고 얼른 돌려줘.”
그녀의 품 안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엘로니아는 본능적으로 그 책이 카르벨이 말했던 ‘혈통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셀리가 보았다고 주장하며 그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이제는 아무도 볼 수 없는 바로 그 책 말이다.
로엘 황태자는 그것을 빼앗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등불을 든 아셀리는 위협적으로 그를 노려보며 외쳤다.
“다가오지 마.”
“아셀리! 그건 네가 봐서는 안 될 책이야!”
“나도 알아. 황실에서 날 미천하다고 금기시 여기는 거. 그래서 어쩔 건데?”
어린 그녀는 잔뜩 날이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한창 몸싸움을 벌이던 아셀리의 손에서 등불이 떨어졌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깨진 등불은 곧 여기저기 옮겨붙기 시작했다.
불길이 번지자 곧 서고 전체를 뒤덮을 만큼 화염이 치솟았다.
타닥타닥, 종이 타는 소리가 엘로니아의 귀에 생생하게 들렸다.
어두웠던 서고는 어느새 가장 환한 빛으로 뜨겁게 타올랐다.
아셀리는 이 와중에도 책을 품에 안고는 놓지 않았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듯 사방을 둘러보며 겁에 질려 읊조렸다.
“이, 이게 다…….”
“아셀리, 이리 와. 위험해!”
“그럼 책을 빼앗아 갈 거잖아!”
“가질 수 없는 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해, 아셀리. 그건 네 것이 아니야.”
“네가 뭘 알아.”
다툼으로 헝클어진 머리,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는 아셀리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엘로니아가 아는 아셀리의 모습과 괴리감이 컸다.
완벽하게 지키던 예절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험악한 말투와 행동까지. 모두 낯선 것들 뿐이었다.
불길이 거세지자 로엘 황태자는 당황한 듯, 아셀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든 이 장소를 벗어나고 싶은데, 움직이지 않는 그녀를 두고 차마 혼자 갈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로엘 황태자의 따스한 성정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했다.
끼기긱, 불에 타던 책장이 이윽고 그들 앞으로 쓰러졌다.
“헉.”
그저 제3 자의 시선으로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엘로니아조차도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쩌적, 갈라지듯 책이 그들 위로 쏟아졌다.
“아셀리!”
그런 상황에서도 로엘 황태자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
쿵, 책장이 그대로 그들 위로 쓰러졌다.
불길에 휩싸여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잔혹한 현장에 엘로니아는 차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불길은 더욱 거세졌고, 도저히 살아서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어, 어떡해.’
이미 지나간 과거였다. 엘로니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못내 안타까웠다.
그녀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쯤, 바닥에서 작은 인영이 꼼지락거리며 기어 나왔다.
군데군데 검은 무언가를 얼굴에 묻힌 아셀리는 책장과 책장이 넘어지며 생긴 작은 틈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듯했다.
하지만 그 틈에서 자그마한 소리가 이어 나왔다.
“아셀리…….”
로엘 황태자는 그 작은 틈으로 나올 수 없어서인지 그저 손만 뻗을 뿐이었다.
아셀리는 겁에 질린 눈으로 피에 젖은 채 쓰러져 있는 그를 응시했다.
그러기를 얼마. 아주 짧은 시간 머뭇거리던 아셀리의 얼굴에 미세한 희열이 퍼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지 못하는 로엘 황태자는 그저 어린 그녀에게 설명하듯 하나하나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셀리, 초소에 가면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내가 왜?”
순간 엘로니아의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아셀리는 죽어가는 이를 화재 속에서 보면서도 안타까움이나 미안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네가 없으면, 황실에 대를 이을 사람은 나 하나잖아?”
아셀리는 작게 미소를 짓더니 불에 타는 서고의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쓰러지며 미처 갖고 나오지 못한 혈통집에 미련을 보일지언정, 로엘을 마치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검은 연기가 자욱해지고, 로엘 황태자의 눈이 서서히 감겨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셀리는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났다.
불길은 이제 더 이상 책장의 원형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졌다.
불에 탄 일부 자재가 떨어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과거는 끝을 맺었다.
허억, 숨을 들이켠 엘로니아는 잔혹한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빠르게 주변을 훑었으나, 과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장소일 뿐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녀를 본 카르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로니아. 표정이 좋지 않아.”
아셀리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인지 카르벨은 그녀의 굳은 표정의 원인을 리아티코 향수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난 아셀리 전하에게 향수 따위로 다른 생각, 품은 적 없어.”
하지만 그런 카르벨의 말은 엘로니아에게 와닿지 못했다.
엘로니아의 머릿속에는 그저 이프리트가 보여 준 과거에 대한 것만 가득했다.
‘로엘 황태자를 죽인 사람이 아셀리 전하였어?’
시작은 사고였으나, 끝은 아니었다.
마지막에 웃던 그녀의 얼굴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어떻게 그 앞에서 웃을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이도 아니고 아셀리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곧장 몸을 날렸던 로엘 황태자였다.
엘로니아는 안타까움에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게 또 화가 나 보인 모양이었다.
카르벨은 조금 더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고 해도, 쓰레기까지는 아니야. 믿어 줘.”
“절대 아셀리 전하는 안 돼요.”
엘로니아는 눈에 힘을 줘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저랑 파혼을 하더라도 아셀리 전하는 절대 안 돼요. 아시겠어요? 절대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럴 일 없어.”
“가까이 지내지도 마세요. 업무는…… 봐야 하니까, 되도록 멀찍이 떨어져서. 둘이 있지도 말고요.”
이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단둘이 티타임을 가지는 생각조차도 안 했을 것이다.
소름 끼치는 과거의 모습에 잘게 어깨를 떤 엘로니아는 단호한 목소리로 카르벨에게 단단히 일렀다.
“그레이터 씨나, 그래요. 연무장에 기사들 많잖아요? 그들이랑 꼭 동행하도록 해요. 아시겠죠?”
시선을 돌려 그를 마주 보자, 어째서인지 카르벨은 조금 놀란 듯한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로니아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이 살포시 접혔다.
어째서인지 카르벨은 조금 기쁜 듯이 보였다.
“그러지. 그대가 원한다면.”
***
빠른 걸음으로 제 방에 도착한 아셀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시녀 하나가 시중을 들기 위해 그녀의 뒤를 쫓아 들어왔다.
“전하, 필요하신 것이라도…….”
“나가 있어!”
고함에 놀란 듯 시녀가 겁에 질려 그녀를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아셀리는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늘 시녀들에게도 기품 있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셀리의 이런 모습을 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저 시녀가 입이 무거웠던가.’
소문이 나면 안 된다.
은밀하게 처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셀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최대한 침착하고 나긋나긋하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요, 요한나입니다, 전하.”
“그래, 요한나. 내가 불에 탄 서고에 다녀왔더니 심신이 피로해서 그런데, 혼자 있을 시간을 줄 수 있겠니?”
“아, 알겠습니다.”
그녀는 조마조마한 듯 눈치를 보다 뒷걸음질 쳐 그녀의 방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간신히 짓고 있던 미소가 곧장 사라졌다.
예민했던 것은 맞다. 갑작스럽게 황실 서고를 보자고 할 때부터 아무것도 없는 장소이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그래도 가짜 정령사니까.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나타날 정령사가 어찌 존재하겠는가.
그렇게 저를 다독이며 맡은 안내였거늘.
“리아티코 향을 어떻게 맡은 거지?”
아셀리는 제 입술을 짓씹었다.
분명 연금술사는 대상이 되는 한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맡지 못할 거라 했다.
‘카르벨이 알려 준 것인가?’
아니. 그는 그런 시시콜콜한 이유로 남에게 약한 모습을 드러낼 인간이 아니다.
꾸준히 향수를 쓰는 동안에도 그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던 이였다.
“진짜 정령사일 리 없어.”
그럴 리 없다. 그랬다면 자신이 로엘 황태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아셀리는 제 화장대를 빠르게 뒤엎었다.
구석진 곳에 숨겨둔 리아티코 향수병을 찾은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렸다.
쨍그랑.
갑작스러운 파열음에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똑똑 노크를 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실수로 향수병을 떨어트렸어. 와서 치워주겠니?”
그녀의 부름에 요한나가 다시 들어왔다.
조각난 향수병을 본 그녀가 빠른 속도로 조각을 치워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머, 어떡해요. 조각이라도 남았다가는 다치실 텐데…….”
“아끼는 향수인데, 다시 구해야겠어. 혹시 어떤 향인지 구분할 수 있겠니?”
아셀리의 질문에 요한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놓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으려고 노력하던 그녀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향수에 배움이 짧아 어떤 향인지 잘 구분하지 못하겠습니다. 알려 주시면 새로 구해오겠습니다.”
그래.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아셀리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래된 향수라서 향이 다 날아간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데브니 남작을 다시 만나 볼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