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내 옆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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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벨의 굳은 입매는 평소보다 힘을 줘 꽉 다물려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선도 엘로니아를 살짝 비켜나가 있었다.
이프리트를 곁눈질로 살피니, 그는 어느새 서재 2층 계단 끝까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무기력한 무표정 속에서 낯선 카르벨을 경계하는 기색이 만연했다.
‘사람을 정말……. 싫어하는구나…….’
세간에서는 정령사를 자연과 친밀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프리트를 보니 그 이유를 확연히 알 것 같았다.
되도록 카르벨을 빨리 내보내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듯했다.
엘로니아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 멀쩡한 거 확인하셨으니 이제 괜찮죠?”
“…….”
“카르벨? 제 말 들려요?”
엘로니아의 말은 허공에 흩어 사라졌다. 카르벨은 전혀 듣고 있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녀는 슬쩍 상체를 기울여 카르벨의 시야 안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눈동자의 초점이 또렷해졌다. 엘로니아는 조금 민망한 듯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 괜찮아요.”
“……알아. 주치의에게 들었다.”
“근데 카르벨이 괜찮지 않은 것 같아서요.”
그는 곤란한 듯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답했다.
“그냥 잠깐……. 다른 생각이 들어서. 그대 눈에 보일 정도일 줄이야. 사과하지.”
“다른 생각이요?”
엘로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설명해 줄 생각이 없는지, 카르벨은 능숙하게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엘로니아의 고개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기울었다.
빤히 그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이제 진짜 정령사라는 사실도 알고 있겠다, 뭐든지 수용할 자신이 있다는 믿음도 보여주었겠다, 숨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녀의 잔뜩 기대하는 시선을 느꼈는지, 카르벨은 짧게 침음을 흘린 뒤 크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군가 갑자기 떠나가는 일은 내키지 않아서.”
“갑자기요?”
“그래. 보고나 통보 없이.”
이제는 죽을 사람도 미리 자기 사망 보고서를 올리고 가라는 뜻인가.
계획을 꼼꼼하게 설계하던 그의 성격이 이런 부분에서도 빛을 발하는 모양이었다.
엘로니아는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래서 시녀들과 기사들을 곁에 둔 거예요? 어차피 그래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잖아요.”
“원래 사람 일은 예측할 수 없는 거니까.”
그는 손등으로 툭, 엘로니아의 코를 가볍게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언제 그리 초조했었냐는 듯, 카르벨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춘 그가 다시금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어언 일로 오셨지?”
엘로니아는 그가 간지럽게 스치고 지나간 자리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놀라지 말고 들어요,”
“그래.”
엘로니아는 슬쩍 떨어트릴 뻔했던 책을 그에게 스윽, 내밀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거요. 화재로 없어진 황실 서고에 있던 책 맞죠?”
“……맞아. 용케 찾아냈군.”
“여기서 정령이 나왔어요.”
그녀의 자신만만한 답 이후로 긴 침묵이 지속되었다.
정령이라는 말에 멀찍이 있던 이프리트는 벌써 2층 서고를 내려가 1층까지 물러나 있었다. 저대로 더 두면 조만간 정말 다른 곳으로 사라질 기세였다.
카르벨은 정색한 채 되물었다.
“정령이라고?”
“네. 인사시켜 드릴게요!”
엘로니아는 그의 뒤를 가리켰다. 곧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카르벨이 고개를 돌렸다.
1층 어느 한 곳을 본 그는 나직하게 되물었다.
“1층에…… 정령이 있다고.”
“네. 사람을 좀 싫어하는 것 같은데, 앞으로 황실 서고에 관해서 도움을 받으려면 안면을 좀 터 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황실 서고가 화재로 사라지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불의 정령이니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을지도 모른다.
황실 서고를 재건하는 일을 하는 동안, 카르벨과 의견을 나눌 일이 많을 터.
기왕이면 조금 편하게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려면 우선, 이프리트가 카르벨에게 익숙해져야 했다.
카르벨 역시 보이지 않는 존재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를 받아들이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정령이라 하면 딱 잘라서 거부하던 그가 웬일인지 순순히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
“……그렇게 알려주어도 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처음으로 정령이 보인다는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엘로니아는 들뜬 음성으로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2층 서재 난간에 바짝 선 그녀는 이프리트가 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이프리트가 낯을 좀 가리는 것 같아서요. 그냥 인사만 해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정작 인사를 받아야 하는 이프리트는 질색하는 얼굴로 그들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슬슬 뒷걸음질 치는 그를 본 엘로니아가 다급하게 카르벨의 붙잡은 팔을 흔들었다.
“빨리요, 빨리. 웃으면서 인사하시는 거 잘하잖아요. 연회에서 항상 하는 것처럼!”
정령이란 본래 자기들이 원할 때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사람을 저렇게까지 싫어하는 이프리트라면, 지금 떠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카르벨의 인사는 들려오지 않았다.
진짜 정령사라고 인정해 준다고 해놓고, 역시 안 믿는 게 분명하다. 그럴 거면 말이나 하지 말지.
엘로니아는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거칠게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잔뜩 쏘아붙이려고 했던 말을 차마 뱉을 수 없었다.
난간에 기댄 그는 엘로니아의 생각과 달리 여유로운 모습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과 행동보다는 엘로니아,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늘 그에게 붙어 다니던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린아이를 지켜보는 것과 달랐다.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없지만, 엘로니아의 피부로 느껴지는 시선은 조금 더 온화하고 다정했다.
생소한 감각이라는 생각이 들기 전, 그는 능숙하게 고개를 돌려 뒤늦게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응시했다.
예를 갖춰 가벼운 묵례까지 손수 전한 그가 물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아, 네! 맞아요, 네.”
화들짝, 정신을 차린 엘로니아는 제 목적을 상기했다.
이프리트는 여전히 덤덤한 눈으로 카르벨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인사를 보았을 텐데도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이를 알 리 없는 카르벨이 당연한 질문을 건넸다.
“그대의 말대로 마음에 들어 하나.”
“그, 어……. 네!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요. 아마도…….”
엘로니아가 대충 얼버무리자 그는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원래부터 그대 곁에 있던 정령인가.”
“아뇨. 최근에 보이기 시작했어요. 어제 갑자기 쓰러진 것도 이프리트가 과거를 보여줘서거든요.”
“……어제 쓰러진 원인이 이 정령이었다고.”
미미하게 그의 말이 느려졌다. 아주 찰나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프리트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걸 본 이프리트는 질색하며 중얼거렸다.
[가식.]
아. 카르벨이 정령을 볼 수 없어서 다행이다.
엘로니아는 처음으로 그가 아무것도 듣고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정말 둘이 친해질 수 있는 걸까.
‘그냥 앞으로 말은 전하지 말자.’
어차피 둘은 대화가 안 통하니, 그녀만 침묵하면 될 일이다. 결과만 잘 나오면 되는 것 아닐까.
안면은 텄으니 앞으로 차차 둘 사이가 좋아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엘로니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순순히 그녀의 안내에 따라 인사까지 건네다니. 장족의 발전이지 않은가!
성취감에 엘로니아는 씨익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툭, 팔꿈치로 건드리며 물었다.
“이렇게 믿어 주실 거면서. 왜 그렇게 정령은 없다고 하셨어요.”
“지금도 1층에 정령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안 믿겨. 그대가 그렇다니 노력하는 것일 뿐.”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프리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황궁에서 보았을 때처럼 서서히 연기로 변하던 그는 엘로니아를 보고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카르벨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는 자취를 감췄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엘로니아는 카르벨을 흘겨보며 말했다.
“굳이 정령 앞에서 그런 말을 할 필요는 뭐예요.”
“사실인걸. 인사까지 했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군.”
그는 작게 헛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가볍게 휘저었다.
보이지도 않는 존재를 바로 믿기란 쉽지 않을 터. 엘로니아는 이해하면서도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나 안 믿으면서 가짜 정령사를 구하셨다는 게 제일 신기해요.”
“아셀리를 견제하려면 그 방법이 제일 효과적이었거든.”
느닷없이 흘러나온 그 이름에 엘로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카르벨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셀리 전하는 내가 헤일튼가의 태생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어.”
“그럼 왜 카르벨이랑 혼인을 하려고 한 거예요?”
“혼인하는 대가로 그 사실을 덮어주겠다는 거래를 제안했던 거지.”
헉. 엘로니아는 숨을 들이켰다.
‘남의 집안 사정을 걸고 협박까지 하는 분이었다고?’
왜 카르벨이 그녀와 정치적인 관계라고 표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셀리는 표면적으로 늘 그녀를 존중해주었다.
비록 카르벨에 대해 조금 안 좋은 감정이 있는 듯했으나, 약혼이 깨진 관계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겠나, 넌지시 생각하고는 했다.
대놓고 정령을 못 믿겠다는 사람들이나, 정령사라며 한껏 없는 말까지 끌어다 치장해주는 사람에 비하면 그녀는 담백했다.
아주 사이가 좋을 수는 없어도 정도는 지킨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카르벨이 평가하는 아셀리는 정반대였다.
엘로니아는 믿기지 않아 되물었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어요? 어차피 차기 황제가 될 분은 아셀리 전하 한 분이시잖아요.”
“귀족들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 여지조차 없애겠다는 거지. 완벽한 황제 자리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영혼도 팔 사람이다.”
냉정하다 못해 무서운 평가였다. 그 누가 아셀리에 대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카르벨은 못마땅한 듯 쯧, 작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엘로니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정령사를 데려다 내가 적통이라는 사실을 입증시키고자 했다. 그대가 있으면 방계 친척들도 입을 다물 테니.”
그제야 그가 왜 가짜 정령사를 부득부득 찾았는지를 깨달았다.
정작 본인은 그가 품고 있는 의구심을 완벽하게 풀어줄 수 없었지만. 정령들과 조금만 더 친해진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의기소침해진 그녀가 눈에 보였는지, 카르벨이 그녀의 한 손을 붙잡았다.
고개를 들자 마주 본 채로 그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까닥, 고갯짓했다.
“현 에스피디 제국에서 아셀리가 건드릴 수 없는 직위는 없으니까. 단 하나, 정령사만 빼고.”
정작 완벽한 아셀리와 비교하면 자신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 기분이라 엘로니아는 머쓱하게 멀쩡한 제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건드렸다.
하지만 카르벨은 그녀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이제 그대의 능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