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과보호
‘밤새……?’
엘로니아는 문득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들어왔던 그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시종들마저 모두 잠든 늦은 시간이었다. 에이미조차도 얼굴을 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일어나자마자 카르벨이 들어왔을 때부터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야 깨달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엘로니아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되물었다.
“내 상태가 그 정도로 안 좋았어?”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그저 수면 부족으로 주무시는 거라 했는데…….”
에이미는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분명 그렇게 전달 들었어도 카르벨이 남은 모양이었다.
에이미는 말을 해두고도 안절부절못했다. 엘로니아가 혹여 부담스럽다고 그들을 물리면 어쩌나 싶은 눈치였다.
엘로니아가 거절한다면 물러나야 했으나, 뒤에서는 혼이 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카르벨은 기준에 엄격한 편이었고, 직접 지시한 일을 그냥 넘길 만큼 허술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그녀는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공작님께서 마님을 어찌나 아끼시는지 몰라요! 입궁하고 돌아오실 적에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마님을 안고 들어오셨다니까요?”
“그럼 그때부터 쭉 옆에 계셨던 거야?”
“네…….”
저 나름대로 카르벨이 그만큼 걱정했으니, 당분간만 이렇게 지내달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정작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아야 할 엘로니아가 덤덤하니 기가 팍 죽은 듯했지만 말이다.
‘이런 것도 연기야?’
묘한 기분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건가.
제 설정을 너무 충실하게 지키니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내색하지 않은 채 에이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알려줘서 고마워. 카르벨에게는 꼭 비밀로 할게.”
“가, 감사합니다.”
화색을 띤 에이미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대기하고 있던 제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저렇게 바짝 기합이 든 상태일듯했다.
엘로니아는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렇게 시종들이 지키고 선 이상, 정령을 마음대로 부르는 것은 힘들 듯했다.
부르려고 한다면야, 정령사로 임명도 받았겠다,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모양새가 좋지는 않지.’
아무도 정령을 보지 못하니 그 모습이 얼마나 기괴하겠는가.
오히려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떨어트린다는 사실까지 엘로니아는 알고 있었다.
누적된 경험으로 학습한 결과였다.
갑자기 아무도 없는 곳에 말을 걸고, 손짓한다면 그녀조차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을지 모를 일이었다.
엘로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부리나케 에이미가 다시 다가왔다.
“뭐 필요하신 일이라도 있으세요?”
“카르벨의 서재에 갈까 해.”
“주, 주인님의 서재요……?”
“그냥 좀 찾아볼 게 있어서. 카르벨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혹여 말이라도 전할까 봐 겁을 집어먹은 에이미에게 그녀는 친절하게 답을 건넸다.
그렇게 방문을 열고 나오자.
“어디로 가십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부리나케 헤일튼가의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다가왔다.
엘로니아는 순식간에 모여드는 인파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그냥 서재에 갈 생각이에요!”
“서재로 모시겠습니다.”
고작 서재다. 걸어 봤자 헤일튼 공작저 내였으며, 길어 봤자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장소였지만 기사들은 각을 맞춰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엘로니아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너무 과보호잖아!’
***
서재에 들어서는 순간, 오래된 종이 냄새가 은은하게 코끝을 맴돌았다.
엘로니아는 천천히 서재 안을 걸어 다녔다.
또각또각, 그녀의 신발 소리가 텅 빈 서재 안에 울렸다.
망설임 없이 옮긴 걸음이 멈춘 곳은 이미 엘로니아에게도 익숙한 장소였다.
“여기였지?”
그녀의 키보다 큰 책장. 머리 두어 개는 훌쩍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책 하나.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도 찾을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책이 그녀를 부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전에는 그저 이런 기분뿐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달랐다.
“와, 닉스가 싫어할 만하네…….”
검은 연기와 비슷한 무언가가 책 주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은근한 탄내가 느껴지는 듯했다.
“이거 만져도 되는 거야?”
다른 정령과 다른 생김새에 엘로니아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닉스가 직접 언급한 정령이었다. 적어도 이상한 건 아니라는 생각에 그녀는 꿀꺽 침을 삼켰다.
측면에 있던 사다리를 낑낑거리며 끌어온 그녀는 성큼성큼, 용기를 내 올라갔다.
손을 뻗자, 검은 연기가 마치 그녀를 피하는 듯이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안녕, 나는 엘로니아야.”
놀라지 않게 미리 인사까지 건넸다.
나이는 외형과 다르겠다만, 일단 그녀가 본 정령들 대부분은 어린 모습이었으니까.
잘 보여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그녀는 공손하게 꾸벅 인사까지 남기며 말을 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책을 꺼내려는 순간.
훅, 검은 연기가 한꺼번에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놀란 엘로니아의 등이 뒤로 기울었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는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꺅!”
질끈, 눈을 감았다. 어째서인지 당연하게도 느껴져야 할 고통이 뒤따르지 않았다.
그 대신 탄내가 조금 더 짙게 맡아졌다.
‘어라. 원래 정령이 냄새가 났던가……?’
엘로니아는 의문을 품은 채 슬쩍 한쪽 눈을 떴다.
그런 그녀의 앞에 주황빛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듯 살랑거렸다.
칼같이 잘린 단발, 조금 무심한 듯한 눈동자.
[정령사인가.]
기력이 없는 듯, 힘이 빠진 음성.
정령이었다. 하지만 여태 본 이들과 달리 데뷔탕트를 막 거친, 1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외형이었다.
이를 깨달은 엘로니아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기력 없는 눈동자가 끔뻑이며 말을 이었다.
[아직도 정령사가 있구나.]
주변을 살피자, 검은 연기가 마치 수풀처럼 엘로니아가 떨어지지 않도록 받치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가 일어나기 좋게 일으켜주기까지 했다.
연기의 도움으로 똑바로 선 엘로니아는 당황과 더불어 인사를 건넸다.
“그, 어……. 정령?”
[응. 이프리트. 불의 정령이야.]
“내가 다른 정령을 좀 아는데, 조금 다르네?”
[닉스를 말하는 건가.]
덤덤한 시선이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불의 정령이라 상당히 호전적인 성격을 예상했는데, 어째서인지 닉스보다 잠잠했다.
엘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프리트는 귀찮은 듯 바닥을 보며 답했다.
[그 아이는 힘이 약해서 그래.]
“아…….”
매번 저 잘난 맛에 사는 닉스가 피한다 싶더니. 아무래도 그들은 힘에 따라 외형이 다른 모양이었다.
엘로니아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널브러진 책을 주웠다.
탁탁, 먼지까지 털고 나니 오래된 책의 겉표지가 조금 더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본 듯한 표지와 제목이었다.
엘로니아는 건성으로 책장을 넘겼다. 군데군데 그을린 자국과 탄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엘로니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낯익은 이 책의 정체를 떠올리려 할 때.
이프리트가 먼저 답을 내주었다.
[황실 서고에 있던 책이야.]
“그래! 내가 서고 리스트에서 본 것 같았어!”
엘로니아는 손가락을 튕기며 그의 말에 공감했다.
전부 불타 사라진 줄 알았더니, 이렇게 몇 권은 남은 모양이었다.
‘근데, 이게 왜 카르벨의 서재에 있는 거지?’
의문이 들 무렵. 벌컥, 서재의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님!”
“주치의, 주치의는 어디 있지?”
기사들과 함께 헐레벌떡 뛰어온 듯한 주치의가 뒤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당황해 손을 저었다.
“아, 아니야! 그냥 놀라서 소리친 거야!”
“서재에서 놀랄 일이 무엇입니까?”
“사다리에서 발을 잘못 딛는 바람에…….”
“사다리에서 떨어지셨다고요?!”
기사가 사색이 된 얼굴로 주치의를 서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래도 말을 잘못한 모양이다.
이뿐이던가.
뒤에서부터 시종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 주인님.”
“큰일인가.”
“사다리에서 떨어지신 듯합니다. 지금 주치의에게 진단을 받고 계십니다.”
누군가의 보고가 작게 들렸다.
곧 바닷물이 갈라지듯 시종들이 비켜서고, 그 틈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다리가 부러졌다고.”
급하게 온 듯한 카르벨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다급하게 왔는지를 대신 알려주고 있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와전되면 상처 하나 없이 넘어진 일이 다리가 부러진 게 되는 거지?
엘로니아는 이 황당한 상황에 넋이 나간 채 그들을 멍하니 지켜봤다.
그녀의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프리트는 미미하게 창백해지는 듯했다.
몰려드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점점 질려가는 표정을 보아하니 낯을 심하게 가리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만 보이는 현상일 뿐이었다.
아무도 정령을 보지 못하니 그저 괜찮다는 말을 꺼내려고 엘로니아가 입을 벙긋하던 찰나.
카르벨의 눈매가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
“많이 다친 건가. 턱이 빠진 모양이군.”
“확인하겠습니다.”
주치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양해를 구했다.
주치의의 퉁퉁한 손이 그녀의 턱을 만지려던 차에 엘로니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다리 멀쩡하고, 턱 안 빠졌고, 그냥 놀라서 소리친 것뿐이에요!”
우다다, 쏟아내는 그녀의 말에 일순간 서재에 적막이 감돌았다.
씩씩, 숨을 몰아쉰 엘로니아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한 번 쓰러진 걸로 다들 너무 유난이에요. 저 엄청 건강하거든요? 이런 진료는 안 받아도 될 만큼!”
발을 탕탕 구르며 자신의 건강함을 자랑하던 엘로니아의 옆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마님이 저택에 들어오실 적부터 몸이 허약하다 하여…….”
주치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
그제야 엘로니아는 그녀가 처음부터 몸이 약하다는 핑계로 입궁을 미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눈짓으로 주변을 훑은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난간에 얌전히 앉았다.
다소곳하게 두 손까지 무릎에 포갠 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가, 갑자기 조금 아픈 것도 같네요. 조용히 진단받고 싶으니 다들 나가주시겠어요……?”
엘로니아의 말에 카르벨이 시종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자 언제 몰려들었냐는 듯, 주치의를 제외하고는 모든 이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요함이 돌아온 서재 안.
엘로니아가 주치의에게 발목을 보이는 동안, 카르벨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옆을 지켰다.
까닥, 까닥. 팔짱을 낀 그의 검지가 일정한 속도로 움직였다.
과할 정도로 꼼꼼하게 그녀를 살핀 주치의는 확신에 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조금 삐끗하신 듯하나 신체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카르벨의 까닥이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고갯짓을 하자, 주치의는 인사를 건넨 뒤 서재를 빠른 걸음으로 나가버렸다.
엘로니아는 뚱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올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다쳤다고 해서.”
“이게 무슨 다친 거예요. 피를 본 것도 아니고……. 아우, 정말.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민망해 죽겠어요.”
밀려드는 창피함에 제 볼을 가볍게 쓸어내린 엘로니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안심한 듯 숨을 내쉬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진심으로 걱정했는지, 딱딱한 표정에서부터 긴장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