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걱정했어요?
“아, 역시 정령이었구나.”
검은 연기가 안 그래도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여태껏 님프나 노움 같은 정령들은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어 조금 다르다는 것은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닉스가 이렇게 말할 줄이야.
그는 포르르, 엘로니아의 앞으로 날아와 그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더 작게 틈을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중급 정령이야. 나보다 아주 조금, 요만큼! 더 강한데, 재수 없어.]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어?”
[이미 만났잖아.]
“그 검은 연기를 말하는 거야?”
[아니. 이상하다? 공작의 서재에서 만나지 않았어?]
아, 그 이상한 책!
생각해 보니, 서재에서 그 책을 본 뒤로 검은 연기가 꾸준히 나타났던 것 같았다.
엘로니아는 고맙다는 의미로 닉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눈물을 닦은 님프가 두 팔을 뻗어 제게 달려들었다.
덩달아 노움도 그 뒤를 따라왔다.
엘로니아는 졸지에 아이를 보육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안심시켜야만 했다.
그러던 중,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끼익, 육중한 문이 열렸다. 익숙해진 시야에는 검은 그림자만 간신히 보였다.
평소 시녀들은 반드시 등을 들고 다녔다.
더군다나 공작 부인의 방에 들어오며 노크를 생략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방문객은 아닌 듯했다.
‘도둑인가?’
엘로니아는 더듬더듬, 천천히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촛대를 쥐었다.
여차하면 머리를 세차게 날리고, 노움에게 벽돌이라도 구해다 던져 달라고 할 속셈이었다.
검은 그림자 속에서 번뜩, 이채가 서렸다.
그리고 달빛이 내린 침대까지 한 발짝, 인영이 다가온 순간 얼굴이 드러났다.
“카르벨?”
조금 젖은 듯한 머리와 셔츠. 조금은 편안해 보이는 그가 입을 열었다.
“정신이 드나.”
“세상에. 아니, 무슨 남의 방을 이렇게 슬금슬금 들어와요. 놀랐잖아요.”
“그래서, 촛대로 날 날려 버리려고?”
엘로니아는 멋쩍게 촛대를 옆에 있는 협탁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모른 척 목을 가다듬으며 답했다.
“카르벨인 줄 알았으면 안 그랬죠. 거기다 이런 새벽에 잠도 안 주무시고.”
시간이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헤일튼 공작저가 이 정도로 고요하다는 것은 대부분의 고용인들이 잠에 들었다는 뜻이었다.
성큼, 다가온 카르벨은 가만히 엘로니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몸은. 괜찮은가.”
“아, 괜찮아요.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아 좋은데요?”
“……데브니 남작 때문인가.”
“에릭스 때문에 신경을 좀 쓰기는 했죠. 그래도 카르벨이 잘 해결해 주어 다행이에요.”
“……그대가 원한다면 죄를 참작할 방법을 찾아보겠네.”
참작? 참작이라고?
마음 같아서는 어디 먼 시골 저택에 박아 둬도 모자랄 판국에, 참작? 있어서는 안 될 일이며, 큰일 날 소리였다.
나오자마자 뻐겨 댈 데브니 남작의 얼굴이 눈앞에 훤했다.
엘로니아는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왜요? 횡령만으로 증거가 부족하대요?”
“그대가 싫어하는 것 같길래.”
“무슨 소리예요. 그런 놈을 키우겠다고 들인 학비가 좀 아깝기는 하지만, 통쾌하고 좋았어요.”
엘로니아의 말에도 카르벨은 전혀 안 믿는 눈치였다.
어째서인지 진실을 찾는 듯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그녀를 훑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눈에 힘을 주며 답했다.
“거짓말 아니에요. 제가 정령사이기는 해도, 마음까지 자연을 닮은 건 아니라서요.”
그 말에 카르벨의 굳은 얼굴이 슬며시 풀리는 듯했다.
묘했다. 평소에는 여유가 느껴지던 그가 오늘따라 초조해 보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마지막에 정신을 잃기 전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 카르벨은 정령을 못 보지, 참.’
저야 검은 연기를 전부 보았다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기절이었을 터다.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걱정……, 했어요?”
그의 얼굴이 어두웠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어둠 속의 그를 한층 더 위협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나마 늘 미세하게 짓고 있던 미소까지 거둬들이니, 그 격차가 더 크게 느껴졌다.
무언가 조금 위험했다.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엘로니아는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카르벨, 괜찮아요?”
단호하게 말을 꺼낸다고 했는데,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아무래도 저도 모르게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가 무서운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던가.
엘로니아가 그를 끌어당기자, 순순히 그의 몸이 기울었다.
엘로니아는 양팔로 그를 받친 채 자신을 향해 상체를 기울인 그를 보며 말했다.
“아버지 때문에 쓰러진 거 아니에요. 내가 진짜 정령사라는 거 잊었어요?”
그의 시선이 진득하게 그녀의 얼굴에 눌러 붙었다. 잿빛 눈동자는 눈앞에 먹잇감을 둔 맹수처럼 천천히 그녀의 얼굴 위를 돌아다녔다.
한참 만에 그가 생뚱맞은 질문을 건넸다.
“알고 있었나. 내가 내무부에 에릭스의 추천서를 써 준 사실 말이야.”
“아……. 사실 키레일 씨에게 들었어요.”
“그 연금술사.”
묘하게 음성이 가라앉았으나, 엘로니아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근데, 어차피 카르벨이 제 아버지를 믿을 사람도 아니고. 처음부터 무슨 의미가 있겠거니 했어요.”
“뭘 믿고.”
“일단 카르벨의 입장에서 저희 아버지가 별로 쓸모가 없……죠?”
이번 일에 에릭스가 제법 큰 역할을 한 걸 보면 그건 아닌가.
개똥도 약에 쓴다더니, 딱 에릭스와 데브니 남작이 그 꼴이었다.
확신으로 시작했던 말이 의문으로 끝나자 그가 나직하게 되물었다.
“그런 이유로 나를 신뢰해?”
“신뢰 못 할 건 또 뭐예요. 적어도 우리 아버지보다 만 배 낫지. 적어도 계약은 지켜 주잖아요.”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선에 그녀가 슬며시 고개를 숙이자, 그의 이마가 툭,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는 듯이 말을 이었다.
“계약……. 그게 중요한 건가.”
“당연하죠. 원래 세상에서 도장과 사인이 제일 무서운 거라고 했어요!”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깨에 스친 숨결이 간지러워 그녀가 움츠리자, 그가 말을 이었다.
“알았어. 그게 중요하다면, 내가 친히 마련해 보지.”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네글리제 위로 느껴지는 감각이 낯설었다.
엘로니아는 작게 몸을 비틀자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또 이상한 거 시키려는 건 아니죠?”
“글쎄. 오늘 왜 쓰러졌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럴 수도 있고.”
천천히 그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이제야 평소 알던 카르벨의 모습인 듯했다.
“앞으로 주치의를 부르는 주기를 좀 짧게 해야겠어.”
“그럴 필요까지는…….”
“나는 몸이 허약한 연기를 하라고 요구했지, 한계까지 일을 하라 한 적이 없다.”
생각해 보면, 그는 가족을 일찍이 잃은 사람이었다.
본인 말로는 크게 미련이 없는 듯했으나, 설마 그럴 리가.
제가 쓰러진 게 나름대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엘로니아가 속으로 납득하고 있을 때, 그가 물었다.
“힘이 들면 말해. 다른 요구는 잘하면서, 왜 그런 건 내게 부탁을 하지 않는 거지?”
“약속한 거니까요. 제가 할 몫이잖아요.”
본래 엘로니아의 역할은 가짜 정령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의 일이나, 다른 것들은 처음부터 합의된 내용이 아니었다.
적어도 제 할 몫을 잘해 냈을 때, 무언가를 부탁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녀가 평생을 지내 온 세상은 무언가를 거저 주는 법이 없었다.
노동에 대한 값을 받고, 그 노동을 잘해 냈을 때 다른 무언가를 더 요구할 수 있었다.
무작정 부탁하며 민폐를 끼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미 충분히 그에게 많이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카르벨의 시선이 못마땅한 듯 험상궂었다.
엘로니아는 혹여 그가 제대로 따지고 들기라도 할까 싶어 빠르게 말을 돌렸다.
“그, 그보다 내가 대단한 것을 알아냈어요. 황궁에서 제가 뭘 본 줄 알아요?”
“계속 함께였는데. 그대가 본 것이라면 나도 보았겠지.”
“로엘 황태자 전하의 황실 서고 화재 전날. 이 정도면 카르벨도 못 본 내용이겠죠?”
그의 놀란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낸 엘로니아는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어 보였다.
* * *
“아니, 난 글쎄, 그냥 시킨 대로 했을 뿐이라니까요!”
에릭스의 외침에 조사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같이 그들은 자신은 시키는 일만 했다는 투였다.
조사관은 서류를 탕탕, 내리치며 물었다.
“그래서 그 시켰다는 사람이 내무대신이었다가, 카르벨 공작이었다가, 정령사님이었다가. 말이 하나도 안 맞는데 무슨 소립니까, 대체.”
“사, 사람이 당황하면 좀 헷갈릴 수도 있지! 조사를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만만해요?”
하아. 조사관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의 시선이 옆에 나란히 앉은 데브니 남작에게로 향했다.
에릭스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지, 이쪽은 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나마 간간이 입을 열 때면.
“엘로니아나 아셀리 황녀님을 불러 주오.”
이런 식으로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해 왔다.
답답함이 밀려들 무렵, 똑똑. 누군가 조사실에 노크를 했다.
곧 동료가 잠시 그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아, 전에 넘겼던 자료 말일세. 그게 지금 반송이 되어서 자네가 한번 봐야 할 것 같은데.”
“어라, 그래? 알았어. 지금 가지.”
조사관은 데브니 남작과 에릭스를 향해 부리부리하게 눈을 뜨며 엄포를 놓았다.
“금방 다녀올 터이니 잘 생각해 보세요. 자백하는 쪽이 훨씬 살기 편할 겁니다.”
데브니 남작은 그런 그를 건성으로 훑어볼 뿐이었다.
쾅. 문이 닫히고, 옆에서 에릭스의 초조한 음성이 넘어왔다.
“아버지. 괜찮을까요? 장부까지 들어갔다는데 어떡해요?”
“기다려 봐라.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잖느냐.”
“여기서 뭘 해요! 보석금 낼 돈도 없으시면서!”
그 순간. 달칵. 문이 열렸다.
칙칙한 조사실과 어울리지 않는 찬란한 금발, 평소보다는 덜 화려하지만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만들었을 차분한 실크 드레스를 입은 아셀리가 조용히 들어왔다.
“아, 아셀리 전하!”
놀란 에릭스가 몸을 일으켜 예를 갖췄다. 이에 데브니 남작은 씨익, 웃으며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전하, 오셨습니까?”
“나를 찾는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일은 유감이네요.”
냉정하게 자르는 말투에서 경계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데브니 남작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를 여기서 꺼내 주신다면, 제가 좋은 정보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엘로니아 양이 가짜 정령사라는 정보라면, 됐습니다.”
이 말을 아예 처음 들은 듯 에릭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데브니 남작은 언제 그랬냐는 듯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글쎄요. 그 소문의 근원지가 저로 되어 있던데. 사실 우리 사랑스러운 전하께서 내신 것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