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지독하게 차분한
몸이 무거웠다. 거대한 무언가에 눌려 숨을 쉬기 힘들었다.
이전과 달리 사방이 어두웠다. 바닥이 보이지 않으니 공간 자체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살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코끝에 매캐한 향이 폐부를 찌르듯 꽉 채웠다.
순간 목이 턱 막힌 엘로니아는 켁켁, 하며 기침을 터트렸다. 여전히 타는 듯한 향이 숨을 쉬기 버겁게 만들었다.
엘로니아는 답답한 가슴을 움켜쥐며 생각했다.
‘대체 무슨 향이야?’
아니, 그보다 향이 느껴졌던가?
정령들은 그저 과거를 빠르게 보여 줄 뿐이었다. 엘로니아는 밀려 들어오는 기억을 그저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만큼, 후각이나 통각과 같은 감각들은 모두 배제되어 있었다.
이렇게 현실 같은 후각은 처음이었다.
‘이전과 달라. 뭐지?’
엘로니아는 어둠 속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 멀찍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부르셨어요.”
앳된 음성이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울렸다.
멀리 어린 아셀리의 모습이 보였다. 꼭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겨우 데뷔탕트 정도를 치렀을까. 매번 당당하게 미소를 지었던 것과 달리, 아셀리는 다소 날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를 마주 보고 선 이는 로엘 황태자였다. 초상화 속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도 아셀리보다 윗사람이라고, 제법 어른스러운 티가 났다. 그래 봤자 갓 성인을 넘었으려나.
로엘 황태자는 피로한지 제 눈을 가벼이 눌렀다. 입을 연 그의 음성이 지친 듯 덤덤했다.
“어젯밤, 왜 서재에 안 나왔지?”
“제가 반드시 나가야 할 이유가 있나요?”
“이런 식으로 피할 생각이야?”
그의 질문에 아셀리가 코웃음을 쳤다.
“피하다뇨,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와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럼 이곳에서 얘기할까?”
순간 아셀리의 몸이 움찔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로엘 황태자는 말을 이었다.
“복도를 걸어 다니는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겠지. 이쯤이면 시종장이 하녀들을 소집할 시간이던가.”
노려보면 상대가 죽을 거라고 믿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커다란 눈을 힘껏 치켜뜨고 있었다.
둘의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좋을 수 없는 관계였다.
‘아픈 황후 폐하를 두고 어느 날 갑자기 황비 전하와 동생이 생겼으니.’
조금 놀랍기도 했다.
초상화나 간간이 정령이 보여 주던 기억 속에서 로엘 황태자는 협박이나 괴롭히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분명 렌디먼 폐하를 닮아 온화한 성정이라 들었는데…….’
사이 좋은 형제가 몇이나 되겠는가. 엘로니아, 그녀조차도 동생 에릭스와 남처럼 살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든 로엘 황태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엘로니아는 힘겨운 호흡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이런 식으로 피해서는 안 돼, 아셀리.’
연민과 동정, 안쓰럽다는 시선은 오롯하게 아셀리를 향하고 있었다.
비록 천한 태생이라는 소리를 듣기는 하나, 그 누구도 아셀리를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그녀를 로엘 황태자는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그의 말에 아셀리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짧은 침묵 끝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약속한 시간은, 내일 새벽이야.”
“반드시 나와.”
로엘 황태자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약속을 주지시킨 뒤, 미련 없이 그 방을 나왔다.
문이 열리고, 그는 복도를 망설임 없이 가로질렀다. 엘로니아가 방금까지 걸었던 그곳이었다.
로엘 황태자의 뒷모습을 칠흑 같은 어둠이 덮었다.
텁텁한 향이 다시 숨을 막았다. 쿨럭, 기침을 토해 내자 검은 연기가 만든 어둠은 다시금 로엘 황태자를 보여 주었다.
“새벽에는 잠시 혼자 서재를 썼으면 하는데.”
“경비를 물릴 수는 없습니다, 전하.”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그럼 경비는 최소한으로 하겠습니다.”
빠른 속도로 로엘 황태자의 행적이 스치듯 지나갔다.
경비를 물리고, 마법사들에게는 다른 지시를 내려 서재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마치 서재에 아셀리와 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이지 않을 것처럼.
얼마나 많은 이들을 만났는지,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것도 어느 순간부터는 버거웠다.
인원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검은 연기 탓에 시야가 흐려졌다.
천천히 숨이 막혀 오고, 물속에 잠기는 듯 귀와 코가 먹먹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귓가에 들렸다.
“엘……, 니아…….”
순간 훅, 무언가 그녀를 끌어당기는 감각이 들었다. 곧이어 시야가 서서히 환해졌다.
기하학적인 무늬와 아치형의 황실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엘로니아, 숨을 쉬어.”
귓가에 조급한 카르벨의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무거운 몸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입이 안 움직여.’
지친 것처럼 축 처진 몸이 힘겨웠다. 이 사실을 인식하기 무섭게 그녀는 잠에 빠졌다.
* * *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걸음을 멈춘 엘로니아는 넋을 놓은 사람처럼 우뚝 멈춰 섰다.
“엘로니아?”
이름을 불렀으나 그녀는 답이 없었다. 카르벨은 본능적으로 성큼성큼, 엘로니아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신호라도 된 듯이 툭, 끈 떨어진 인형처럼 그녀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재빠르게 팔을 받쳤으나 여전히 엘로니아의 의식은 없는 듯했다. 되려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카르벨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꽉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눈을 감은 얼굴을 내려다보는 순간 쿵, 가슴 언저리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엘로니아를 품에 안은 카르벨은 그대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머릿속이 지독하게 차분했다.
동시에 자그마한 소리가 거슬렸다.
그의 앞에 고개를 숙인 채 눈치만 보는 시녀들도, 환한 황궁 복도도. 다른 이들의 숨소리, 제 발걸음 소리까지 거슬렸다.
카르벨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제일 먼저 눈에 띈 시녀 하나를 향해 지시했다.
“의원.”
“아, 그, 네. 알겠습니다.”
허겁지겁 사라지는 시종들 틈에서 엘로니아의 손이 움찔했다.
카르벨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자줏빛 눈동자가 당황스러운 듯 흔들렸다.
상황을 인지했다기보다는 지쳐 보였다.
황실 서고 재건을 맡고 넘치던 의욕은 그녀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데브니 남작 때문인가.’
엘로니아가 그들에게 큰 애정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싫다 해도 가족이 아니던가. 막상 기사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 흔들릴 수 있다.
‘처리하는 과정이 비인도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는 덤덤하게 걸음을 옮겨 복도를 벗어났다.
진짜 가족이란 무엇일까.
그가 부모라 굳게 믿었던 전대 공작과 더불어 친인척까지 모두 등을 돌렸기에, 얼마든지 내칠 수 있는 것이 가족이라 생각했다.
사실상, 서로 필요에 의해서 지내는 것이 아닐까.
의지할 사람과 보호해 줄 사람. 권력을 공고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훌륭한 혈통. 부를 유지할 수 있을 만한 배경.
귀족들이 대부분 조건을 보고 혼인하는 것만 해도 이를 반증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건 카르벨, 그만의 기준일 뿐이었다.
‘대부분은 가족에 큰 의미를 부여하니까.’
말은 싫다고 해도, 막상 횡령으로 끌려가는 데브니 남작과 에릭스를 보고 마음이 흔들렸을 수도 있다.
그게 그리 충격이었던가.
정원에는 이미 눈치 빠른 시종들이 불러 둔 헤일튼가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카르벨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여전히 그녀의 눈은 굳게 닫힌 채 열릴 줄 몰랐다.
카르벨은 숨을 죽인 채 적막함 속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그는 입을 열었다.
“헤일튼저로 돌아간다.”
* * *
머리에 순간 차가운 기운이 돌았다.
순식간에 잠이 깨는 기분이었다.
‘나 잠들었던 건가?’
최근 여러모로 신경이 예민했다.
에릭스의 이름을 들은 뒤로는 더욱 그랬다.
아무리 선을 긋는다고 해도, 가족의 이름이 계속 주변에서 들려오는 일이 자잘하게 신경을 갉아 먹은 듯했다.
그래도 마지막에 끌려가는 모습은 좀 통쾌했다.
‘그래. 기껏 아카데미에 보내 놨더니, 횡령? 회엥령? 내가 그러라고 비싼 돈 바쳐 가며 보낸 줄 알아?!’
거기까지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 분노에 힘입은 엘로니아는 눈을 번쩍 떴다.
세상이 캄캄했다. 벌써 새벽이 내려앉는 모양이었다.
눈을 깜빡이기를 잠시. 그녀의 귓가에서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님프. 정령사 안 죽었다고! 울지 마!]
[그러는 닉스야말로 코가 빨개.]
노움의 태연한 음성에 닉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바, 밤이라 그런 거야! 내가 손수 물수건까지 올려 주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의 말에도 훌쩍이는 소리는 커져만 갔다.
‘우는 건 님프겠구나.’
머리 위의 차가운 기운이 그제야 인식되었다.
어째서인지 어깨까지 축축한 게 영 기분이 이상하지만, 차차 주변 상황이 인지되고 있었다.
말은 참 안 들어도 저들 나름대로 그녀를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따뜻했다.
‘부모님도 내가 아플 때 이렇게까지 걱정은 안 해 주셨는데.’
의원을 쓸 돈조차 없어 최대한 참았다.
그렇게 참다 보면 또 어느새 나아져 있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런 관심이 조금 간지러웠다.
푹 쉬어서인지 가뿐해진 몸을 일으키니 투둑, 머리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수건이 떨어져 내렸다.
얼마나 물을 많이 먹었는지, 축축하다 못해 그녀의 네글리제를 온통 적실 정도였다.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차가웠다.
엘로니아는 희한한 물수건을 들고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이건 어떻게 계속 차가울 수 있는 거지?”
그런 그녀의 볼에 빠른 속도로 어둠 속에서 무언가 달려들었다.
[정령사!]
퍽, 소리와 함께 그녀의 볼이 따끔했다.
볼을 문지르자 닉스가 그녀의 손을 피해 주변을 빙빙 돌아다니며 시끄럽게 외쳤다.
[정신이 들어? 내가 보여? 네가 누구인지는 알지? 이게 몇 개로 보여?]
우다다 질문을 쏟아 낸 그는 엘로니아의 앞에 손가락 네 개를 쭉 펴 보였다.
엘로니아는 모른 척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두 개인가……?”
그러자 닉스는 사색이 되어 님프를 향해 소리쳤다.
[어떡해, 님프. 정령사가 바보가 됐나 봐.]
그의 말에 님프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노음은 그런 그녀를 달래며 의견을 냈다.
[호두가 머리에 좋대. 한 번 깨 볼까?]
[좋아, 노움. 네가 호두를 가져올 동안 나는 얼음으로 뒤통수를 한 번 때려 볼게. 혹시 알아? 충격을 주면 돌아올지…….]
장난 한 번 쳤다가 진짜 골로 가게 생긴 탓에 엘로니아는 빠르게 반박했다.
“닉스, 네 개, 네 개! 어두워서 안 보였어!”
그녀가 외치자 닉스의 얼굴에 작은 기쁨이 서렸다.
그는 아닌 척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역시 내가 물수건을 차갑게 해 준 덕이지. 고마워하라고.]
“그래. 고마워, 닉스.”
그녀의 답에 그는 부끄러운 듯 입을 삐죽였다.
이제는 그 모습마저 귀여워 슬며시 미소를 짓자, 그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내가 그놈 마음에 안 든다고 했잖아. 그러게 왜 내 말은 안 듣고 가까이 가서…….]
“그놈?”
[불의 정령, 이프리트.]
엘로니아의 질문에 닉스는 못마땅한 듯 콧잔등을 우그러트리며 말을 이었다.
[정령사가 감당하기에는 조금 벅찬 놈일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