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그레이트 홀에는 카르벨의 목소리만이 잔재처럼 남아 울렸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저들끼리 눈치를 주고받는 것이 보이지 않아도 피부로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데브니 남작이 입을 벙긋했다.
변명이 생각나지 않는지 팔꿈치로 툭, 옆에 서 있던 에릭스를 건드렸다.
그 신호에 에릭스는 더듬더듬 흔들리는 목소리로 변명을 내놓았다.
“폐, 폐하! 내부대신께서 제게 탈세 건을 맡겼습니다! 저는 단지 성실히 장부를 확인하고, 검사하는 과정에서 실수한 겁니다. 그렇습니다!”
“제국의 하나뿐인 태양이시여. 이제 막 아카데미를 졸업해 사회에 나온 놈입니다. 미숙함을 용서하여 주세요.”
옆에서 듣고 있던 데브니 남작도 부리나케 말을 덧붙였다.
장부까지 나왔으니, 실수로 노선을 변경한 모양이었다.
이를 들은 카르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날카로운 눈매 속 잿빛 눈동자가 먹이를 물은 맹수처럼 빛났다.
큰소리를 치거나 검을 든 것이 아닌데도 여유로운 분위기와 더불어 모순적인 압박감이 느껴졌다.
마치 엘로니아가 그를 처음 메티카 감옥에서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카르벨은 차분하게 세트론을 향해 질문했다.
“내무부에서는 신입에게 탈세 건을 맡겼나.”
“제가 과로로 돌아 버리지 않은 다음에야 그럴 리 있겠습니까.”
렌디먼 황제가 은밀하게 지시한 일이었다.
그간 세트론의 업무 방식을 아는 이들이라면, 그가 이렇게 요란하게 해결할 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히려 탈세는 조용히, 불시에 조사에 들어가는 것이 기본이었다.
심지어 소문도 탈세 조사가 아닌, 탈세 누명을 씌워 뇌물을 갈취하는 형식이었다.
연회장 안에 있는 이들 중, 에릭스와 데브니 남작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트론은 질렸다는 듯이 렌디먼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업무 관련 증빙은 올리겠습니다.”
“아니다. 내 그대의 결백함을 모르지 않으니.”
렌디먼 황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곧 그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에릭스 데브니와 데브니 남작의 뇌물 혐의를 조사하라.”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폐하.”
카르벨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예를 갖추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 그의 뒤로 기다렸다는 듯이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가슴에 황실 기사단을 뜻하는 문양이 박힌 기사들이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누가 지시라도 한 듯, 우루루 에릭스와 데브니 남작에게 향하는 길을 터 주었다.
카르벨 역시 엘로니아의 어깨를 감싸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겨 주었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보다시피. 죄인을 인도하는 중이지 않나.”
그의 말대로 에릭스와 데브니 남작은 기사들에게 속박되어 끌려가고 있었다.
아직 앳된 에릭스의 얼굴에 공포감이 서렸다. 제 아버지를 붙잡고는 살려 달라며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데브니 남작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릭스와 작당할 시간조차 없었으니, 어떠한 말을 꺼내야 유리한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사회생활을 오래 해서일까. 데브니 남작은 눈치 빠르게 자신이 빠져야 할 때임을 알아챘다.
“조사는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공정한 조사가 이뤄진다면, 저와 에릭스의 억울함도 풀어지겠죠.”
이를 악문 데브니 남작의 분노를 담은 시선이 엘로니아와 카르벨을 향했다.
하지만 카르벨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친절히 답했다.
“물론입니다.”
기사들이 그들을 끌고 나가자, 연회장에는 한산한 기운만이 남았다.
렌디먼 황제는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누르며 손을 저었다.
“오늘 연회는 일찍 파하도록 하겠다.”
명령과도 같은 말에 숨도 크게 못 쉬고 눈치만 보던 귀족들은 부랴부랴, 인사를 건넨 뒤 빠른 속도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들과 세트론, 아셀리만 남은 홀은 고요했다.
엘로니아에게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키레일에게 듣기로는 카르벨이 에릭스를 내무부에 소개해 주었다고 했다.
그간의 경험상 데브니 남작의 부탁일 확률이 높았다.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카르벨의 옷깃을 뒤로 잡아당겼다.
그의 시선이 짧게 스쳤을 때, 엘로니아는 조용히 읊조렸다.
“앞을 봐요. 지금 제가 미안해서 죽을 것 같거든요.”
가족이 자신을 대단히 도와줄 것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가문을 나오고, 혼인이라도 하면 저도 좀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하던 기대감이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늘 출가하는 게 목표였다. 가족 몰래 돈을 모으고, 악착같이 일을 했다.
하지만 정작 카르벨과의 약혼으로 가문을 나온 지금. 무엇이 달라졌던가.
오히려 약혼을 하기 전이 훨씬 더 나았던 것 같다.
적어도 가족들 중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아무도 그녀가 데브니가 출신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니 말이다.
본래 그녀 혼자 감내하면 될 일이지만, 대체 오늘 얼마나 많은 이들을 힘들게 만든 것인가.
‘창피해.’
어디 숨을 곳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황제부터 친하지 않은 귀족들까지 모두 이 상황을 보지 않았던가.
좁디좁은 사교계에서 소문이 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카르벨이 괜한 피해를 입은 듯한 감정은 지울 수 없었다.
엘로니아는 조용히 다시 한번 사과했다.
“이번 일로 혹시 아버지가 물고 늘어지면, 그냥 파혼할 예정이라고 해요.”
“파혼?”
“네. 그럼 더 이상 뜯어먹을 게 없으니까 카르벨에게도 안 오겠죠!”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들자, 카르벨의 서늘한 얼굴과 마주했다.
잠깐 그녀를 응시하던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데브니 남작 때문인가.”
엘로니아는 그의 질문이 이해가 되지 않아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예정보다 빠른 파혼이라 그런 건가?
“뭐……. 그렇기는 하죠?”
굳이 원인을 꼽자면 데브니 남작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 이유가 아주 없지도 않으니 적당히 수긍했다.
그러자 카르벨은 반듯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런 거라면 괜한 걱정이야, 엘로니아.”
“무슨 소리예요. 폐하께서도 단단히 화가 나신 것 같은데!”
축객령이 내려진 뒤로, 렌디먼 황제는 관자놀이를 누른 채 굳은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멀찍이 세트론과 아셀리까지 있는데도 그 누구에게도 선뜻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화가 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카르벨은 아주 뻔뻔하게 답했다.
“원래 자주 편두통이 있으셨어.”
“거짓말.”
“사실이야. 고민이 많은 자리이니.”
엘로니아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미심쩍은 듯 그를 흘겼다.
하지만 카르벨은 제 옷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데브니 남작과 동생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
“증거는 충분한 거예요?”
“물론.”
제법 심각한 사안이었지만 그의 답은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너무 짧았다.
마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대신 힘을 전해 주는 듯했다.
그 작은 행동이 백 마디 말보다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의 커다란 손에 감싸여진 탓에 그녀의 손은 보이지 않았다.
검을 잡아 거칠어진 손바닥의 피부 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손등에 난 자잘한 상처에 눈이 갈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이번 조사 이후로는, 에릭스를 못 볼 수도 있어.”
“정말요?”
“그대의 말대로 합법적으로 처리할 거야.”
“아니, 그건 말이 그렇다는 거고…….”
마치 제가 부탁해서 그를 없애 버리는 듯 들린다면 착각일까.
떨떠름한 기분에 말끝을 흐리자, 그 낌새를 눈치챈 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마침 내무부 안에서 주목을 끌어 줄 사람이 필요했어.”
잠깐의 텀을 두고 카르벨의 덤덤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러니 사과하지 않아도 돼. 그대 잘못이 아니야.”
* * *
세트론은 죽을 맛이었다. 정확하게는 사직서 말고 떠오르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 낼까. 내일 낼까.’
그만두면 이 불편한 꼴을 안 봐도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안 될 것을 알기에 그는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한참 만에 렌디먼 황제의 입이 열렸다.
“대체 에릭스 데브니라는 이는 왜 고용했는가.”
“일단 헤일튼 공에게 추천서를 받았습니다만…….”
세트론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보고 되도록 장부 정리만 시키라 하더군요.”
처음부터 추천서에 그리 적혀 있었다.
안 그래도 탈세 관련하여 조사하던 중이었다. 손과 발을 동시에 써도 모자라는 시기에 추천서라니.
그것도 무려 일 잘하기로 소문난 헤일튼 공작의 추천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얼굴을 보자마자 혹시 저를 과로로 죽이려고 사주한 건가 의심이 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에릭스는 일을 못 하는 것은 둘째치고, 자아도취가 심해 옆에 있기만 해도 머리에 혈압이 오르는 일이 여럿 있었다.
그래도 아카데미라는 연줄이 있고, 거저 졸업을 시켰겠나 싶은 마음이 아주 조금 있었다. 정말 마지막 잎새와 같은 희망 정도.
일을 하는 꼴을 볼 때마다 욕이 나오긴 했지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감상은 조금 달리 바뀌었다.
“그가 여러 곳에서 들쑤시고 다녀 주는 덕분에, 세금감사가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는 곳이 다수였습니다.”
덕분에 증거도 여유롭게 잡아 낼 수 있었으며, 불법으로 유통하던 야생 동물 등을 수거하는 추가적인 소득도 있었다.
그래서 내버려 뒀다. 일단 다른 의미로 쓸모가 있었으니까.
곰곰이 생각하는 렌디먼 황제를 두고 세트론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장부 정리만 맡긴 것을 보면, 에릭스 데브니의 행동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사 후 적법한 절차를 밟으면 되겠군.”
“확실하게 처음부터 증거를 수집해 두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
세트론의 말에 렌디먼 황제는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 그에게 제출된 증거들이 너무도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제 손으로 직접 어설프게 장부 조작까지 했으니 필체부터 흠잡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를 떠올리니 괜한 소름이 돋아 세트론은 가볍게 어깨를 털어냈다.
대놓고 걸려 들라고 함정을 파둔 것이 아닌가.
‘처음부터 치워 버릴 생각이었구먼.’
세트론은 무언가를 속닥이고 있는 엘로니아와 카르벨을 응시했다.
묘하게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 * *
“소란스럽게 하여 미안하오, 정령사.”
렌디먼 황제의 사과에 엘로니아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고개를 들기 죄송스럽습니다.”
“아닐세. 내 두 사람은 카르벨 공에게 맡겨 죗값을 치르게 하겠네.”
“감, 감사합니다, 폐하.”
엘로니아는 얼떨결에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카르벨의 말대로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아까와 달리 렌디먼 황제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오늘 그대에게 미안한 일만 계속 부탁할 것 같아 미안하구려.”
마치 다른 부탁이 있다는 투였다.
뒤늦게 돌이켜보니, 연회가 열린 목적부터가 분명했다.
그녀의 정식 임명을 축하하는 것도 있겠지만, 정확하게는 정령사로 할 일이 있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