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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62화 (162/234)

55. 중요한 것은

카르벨의 앞에 서 있던 후작도 그 수군거림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큰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아아, 요즘 상단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서 말이지. 우리 저택에 납품하던 상단도 당분간 영업이 정지되었다더군.”

“그렇군.”

“그래서 말인데, 괜찮은 상단이 있으면 소개해줄 수 있을까, 공작?”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말하는 것이 이미 소문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 제게 상단을 소개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에릭스를 앉혀두었으니, 상단까지 쥐고 흔든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이 소식을 엘로니아가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최근 그녀가 알려준 빈민가를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 문서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이유의 8할은 엘로니아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구나.”

“아니, 공작. 내가 그래서 물어본 것은 아니고…….”

그의 앞에서 후작이 당황한 듯 변명을 늘어놨으나 전부 들리지 않았다.

카르벨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까 그녀의 질문이 그런 것이었나. 이미 알고, 제게 다시 한번 물어본 건가.

엘로니아는 이번에 무어라 말할까.

솔직하게 답해달라며 대놓고 서운한 티를 잔뜩 내던 그녀라면.

‘실망했을까.’

하찮은 새끼라고, 가진 것은 없으면서 자신을 속였다고.

그렇게 경멸 섞인 눈으로 바라볼까.

한평생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던 친절한 미소가 오늘따라 힘겨웠다.

이 가면을 벗고 싶다. 아니, 벗고 싶지 않다.

솔직한 것은 죄다. 언젠가 그의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화려한 대리석 바닥이 늪처럼 그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제는 경제까지 독점하시려는 건가?”

“하기야, 정령사님과 혼인까지 했으니……. 빨리 헤일튼 공작 쪽에 줄을 대야 하는 거 아니려나요.”

“안 그래도 오늘 노리고 온 이들이 만만치 않아요.”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네요. 아셀리 전하와 혼담이 오고 갈 적부터 느꼈지만, 권력에 너무 치중하시는 것 아닌지…….”

그 순간. 청량한 목소리가 나긋하게 대화를 끊어냈다.

“카르벨이 그럴 사람은 아니에요.”

그레이트 홀은 갑작스러운 엘로니아의 음성에 잔잔한 미뉴에트만 흐를 뿐. 소란스러운 침묵에 휩싸였다.

하지만 엘로니아는 꿋꿋했다.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해요. 이런 식으로 뒤에서 확인되지 않은 말을 전하는 거, 굉장히 불쾌해요.”

냉정한 그녀의 말에 웅성거리던 귀족들은 다급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잔뜩 화가 난 그녀의 시선은 그들을 질책하고 있었다.

‘왜?’

그대는 이렇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내가 이상하지도 않나.

묻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가 묻기 전, 데브니 남작의 호탕한 웃음이 울렸다.

“이런, 엘로니아. 어엿한 공작 부인이 되었구나.”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 서 있는 에릭스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샴페인 잔을 든 채로 싱글벙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누님이 이렇게 귀족들을 일갈할 줄도 알고.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죠.”

엘로니아는 불쾌한 듯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헛소문을 바로잡은 것뿐이야.”

“헛소문이라뇨, 누님. 그야말로 제대로 된 소문인걸요.”

에릭스는 뻔뻔하게 자신의 크라바트를 쓰다듬었다.

다섯 손가락에는 보석 반지가 족히 일곱 개는 끼워져 있는 것 같았다.

에릭스는 샴페인을 가볍게 마신 뒤 입매를 늘려 웃으며 말했다.

“헤일튼 공작가에서 제게 추천서를 써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인재를 미리 알아본 것이지. 암.”

에릭스의 말에 데브니 남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홀에 있는 그 누구도 에릭스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아카데미 출신의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에릭스의 이름이 나돌기 시작한 것도 아카데미에서 졸업하고 돌아온 이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카르벨은 소란이 더 커지기 전에 그들 틈으로 다가가 엘로니아를 감쌌다.

그녀가 가족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안다.

하지만 단순히 가족들에게서 그녀를 분리하고 싶은 것인지, 그들의 입에서 나올 말을 막고 싶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마 둘 다일지도 모른다.

놀란 그녀의 몸이 잠깐 굳는 게 느껴졌으나, 다행스럽게도 내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엘로니아는 에릭스를 향해 조용히 답했다.

“카르벨은 안타깝게도 너처럼 단순하지 않아, 에릭스.”

하지만 에릭스는 자신의 능력에 퍽 자신 있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글쎄요. 아, 누님 덕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죠. 나중에 감사의 인사로 옷 한 벌 맞춰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에릭스는 낄낄거리며 하녀들에게 빈 샴페인 잔을 넘겼다.

이미 엘로니아의 의중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했다.

그는 멀찍이 얼굴을 아는 이가 있었는지, 그들을 향해 태연히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옮길 뿐이었다.

그런 그의 옆을 따라가려던 데브니 남작은 사람 좋은 척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엘로니아와 카르벨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엘로니아. 네가 뭘 모르나 본데. 에릭스는 내가 공작께 자리를 마련해 달라 부탁했단다.”

“…….”

“네가 없을 때 공작저에 잠깐 들렀지.”

데브니 남작은 은근하게 카르벨을 훑고는 태연하게 숙였던 상체를 일으켜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데브니 남작과 에릭스의 뒷모습을 보는 그녀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카르벨은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그를 끌어당기던 늪지가 어느새 몸의 절반을 수렁 속에 삼킨 것 같았다.

누가 막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움직여야 하는데, 늘 장난스럽게 그녀를 대했던 것처럼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변명이라도 상관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뱉어야만 했다.

“엘로니아.”

“알아요. 카르벨도 다 생각이 있었겠죠.”

그녀는 변명조차 들어주지 않았다.

자줏빛 눈동자가 조금 억울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릭스가 저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도 못 했겠죠. 나도 저놈이 저럴 줄 몰랐거든요.”

그녀는 분한 듯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는 홱 소리 나게 떨쳐냈다.

“아버지랑 동생이 저런 식이니 내가 못 미더운 건 알아요. 이해는 하는데요.”

“엘로니아.”

“근데 난 카르벨의 편이에요. 이것만큼은 의심하지 말아줘요.”

카르벨은 순식간의 자신의 발을 붙잡고 끌어당기던 늪지가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단단한 바닥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아, 그래.

“엘로니아.”

아마도 그녀를 마음에 품은 모양이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 홀로 제국에서 검 하나 들고 버텨왔다.

어떤 소문과 주변 이들의 말에도 그저 자신이 본 대로 판단하고 믿어주는 그녀에게 어떻게 끌리지 않을 수 있을까.

정령사인지 아닌지는 이제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엘로니아…….”

카르벨은 연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안 그래도 엘로니아는 제 가족들 때문에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카르벨이 저렇게 애타게 부르는 것을 보면, 꽤 큰 문제인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데브니 남작이 들어왔을 때부터 살폈으나, 미세하게 표정이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카르벨이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자리에 에릭스를 턱 하니 앉혔을 사람은 아니다.

펠런 백작가에서 이 일을 키레일에게 들었을 때부터 엘로니아가 도출해 낸 결론은 이것 하나였다.

“엘로니아, 어쩌지.”

“혹시 제가 괜한 말을 한 건가요?”

“아니. 아니야.”

카르벨이 조용히 속삭이듯 그녀의 머리 위에 제 이마를 대었다.

에릭스가 너무 생각보다 인간쓰레기라 놀랐나?

엘로니아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카르벨의 탄식과도 같은 낮은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당신, 이제 어디도 못 보내겠어.”

무슨 뜻인지 되묻기도 전에 카르벨은 몸을 일으켰다.

아까와 달리 그는 다시 여유를 되찾은 모양새였다.

그는 조금 진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에릭스, 그대에게 중요한 사람은 아니지?”

“무, 물론이죠. 그냥 갖다 바다에 빠트리셔도 돼요.”

말을 꺼내고도 진짜 그럴까 싶어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말을 덧붙였다.

“진짜 죽이지는 마시고……. 할 거면 합법적으로…….”

“그건 말하지 않아도 분부대로.”

카르벨은 그녀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엘로니아는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였다.

그가 진득하게 입술을 누르고 떨어졌을 때, 커다란 나팔 소리가 울렸다.

“폐하와 아셀리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우르르 예를 갖추며 비켜서는 동안에도 카르벨은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거대한 문이 열리고, 한층 딱딱한 표정의 황제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그런 황제의 옆을 따르는 아셀리의 표정도 연회에 참석한 이라고 하기에는 썩 좋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뒤로 세트론, 내부대신이 은발을 흩날리며 뒤를 따랐다.

단번에 황족들을 위해 마련된 상석에 자리를 잡은 황제는 한 손을 들었다.

그러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눈치껏 연주를 멈추게 했다.

순식간에 고요함이 감도는 그레이트 홀에서 황제가 입을 열었다.

“정령사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겠소. 그대를 위한 연회인데, 내 중대한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지.”

갑작스럽게 훅 몰려드는 시선에 엘로니아는 괜찮다는 의미로 드레스 자락을 들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허락에 황제는 딱딱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최근 들어 한 가지의 이유로 상소가 늘어났소. 이에 대해서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대충 들었으리라 예상되는데.”

혹시 내무부의 일을 말하는 걸까?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제 아버지와 동생을 살폈다.

그들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멀뚱하게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정확한 이유는 모르는 눈치였다.

황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최근 은밀하게 탈세를 조장하는 일이 잦다는 이야기가 들려 이를 잡으라는 지시는 내 세트론에게 전했었지.”

“예, 맞습니다.”

황제의 말에 일부는 조용히 탄식을 삼켰다.

내무부의 일이 단순히 에릭스 단독의 일인 줄 알았더니.

황제가 직접 지시한 일이었다면 말이 달랐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반대였다.

“한데, 어째서인지 규정하지 않은 것으로 돈을 갈취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어. 이에 대해 헤일튼 공작의 의견을 듣고 싶은데, 어찌 생각하나.”

엘로니아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카르벨은 여전히 당당하게 서서 그 말에 답하고 있었다.

“해당 건에 대하여 일찍이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먼저 탈세에 관한 내용은 내무대신이 대신 전할 것입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피곤에 찌든 듯한 세트론이 황제에게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최근 탈세한 상단과 연관된 가문을 추린 명단입니다. 현재는 전부 영업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에릭스의 문제인 줄 알았더니, 그저 탈세 때문이란 말인가?

세트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르벨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최근 불안정한 정세를 이용해, 작은 상단들 중 뇌물을 건넨 것으로 확인되는 이들입니다.”

카르벨의 말에 세트론은 착실하게 다음 서류를 황제에게 건넸다.

카르벨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보시면 아시겠으나, 중소급의 상단에서 단 한 사람에게로 자금이 흐르는 것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조작된 장부는 이미 확보해 놓았으니, 날짜를 잡아주시면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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