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네 이름이 왜 거기서 나와?
에릭스는 그저 그런 평범한 재능을 지닌, 극히 평범한 귀족들 중 하나였다.
물론 집안의 재정 상태야 평범한 축에도 못 끼었으나, 그는 귀족이니 돈만 많은 평민보다 나은 편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방학 때가 되면 졸부 주제에 별장에 친구들을 초대하고, 파티를 여는 놈들을 보고 있자면 배가 아픈 것도 사실이었다.
졸업을 앞두게 되니, 슬슬 이 차이가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어이, 너네는 졸업하면 뭐 할 거야?”
“가업을 이어야지.”
평민들은 무슨 의견이 더 필요하냐는 듯이 당연한 것처럼 답했다.
일부 귀족들 중, 사업이나 상단을 운영하는 이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에릭스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 누나라는 사람도 돈이나 달라고 서신을 보내던 사람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결혼을 잘할 줄 알았으면 소액이라도 보낼 걸 그랬나.’
후회가 일었으나, 졸업을 앞둔 지금도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심란한 그의 앞으로 서신이 하나 도착했다.
“에스피디 황실의 내무대신 보조로 널 고용하겠다더구나.”
“저를요?”
“그래. 헤일튼 공작가에서 추천서를 써 준 모양이야.”
아카데미장의 말에 에릭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분명 제 아버지가 힘을 쓴 것이리라.
죽어도 제 누나인 엘로니아가 직접 부탁했을 리 없다.
그래도 그녀가 혼인한 카르벨 공작은 제 누나보다는 훨씬 상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가문을 이을 사람은 나인데, 당연하지.’
그가 내무대신의 보조로 들어간다는 소문은 곧 아카데미 내에 퍼졌다.
그를 무시하고 한심하게 보던 졸부들은 갑자기 친한 척 그에게 달라붙었다.
“우리 가문이 사업을 크게 하는데,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아버지께서 흔쾌히 도와주실 거야.”
“에릭스. 나중에 남부에 있는 별장에서 파티를 할 예정인데 와줄 수 있겠니?”
에릭스는 오만하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 오늘따라 파네가 먹고 싶은데.”
“아, 우리 아버지가 황실에서 주방장까지 하셨던 분이라 요리가 기가 막혀!”
“아카데미 제복도 벗으면 옷이 마땅치 않고…….”
“우리 어머니가 유명한 살롱을 운영하는데, 한 벌 맞출래?”
그래. 이거지.
에릭스는 만족스럽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
“네가 에릭스라고?”
세트론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제 앞에 선 풋내기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디서 있는 대로 금실 자수를 다 박아넣은 듯한 복장 하며, 신발은 어울리지도 않지만 비싼 제품이기는 했다.
딱 봐도 금전 감각은커녕 돈 계산도 못 하게 생긴 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깨끗하고 아무것도 없는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자리는 저기. 당분간은 수습으로 지내면서 일부터 차근차근 배워.”
“바로 실전도 상관없습니다. 이래 보여도 아카데미 출신입니다만.”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까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꼴이 없지만 세트론은 이를 악물며 웃었다.
“그래? 그럼 내가 주는 문서부터 한 번 정리해서 계산해 보겠어?”
그는 제 책상 위에 있던 거대한 서류 더미를 에릭스의 책상에 옮기며 말을 이었다.
“장부 정도는 볼 줄 알겠지? 아카데미 출신이니까.”
그의 엄포에도 에릭스는 휘적휘적,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며 고개를 뻣뻣하게 들 뿐이었다.
***
“그게, 마님. 지금 상황에 파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상단주는 엘로니아에게 보고를 올리기 위해 서류를 잔뜩 들고 헤일튼 공작저를 방문했다.
서류 속에는 꼼꼼하게 매일매일의 제록 나무의 성장이 적혀 있었다.
그는 판매처와 가공해서 판매했을 때 가장 큰 금액을 얻을 방법까지 제법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왜요?”
엘로니아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되물었다.
기껏 돈이 될 수 있는 만큼 자랐는데, 정작 팔지 못한다니.
상단주는 잔뜩 미안하다는 투로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그게, 요즘 작은 상단에게 부과하는 세금이 만만치 않습니다.”
“작은 상단이라는 말은, 큰 상단은 괜찮나요?”
“다 괜찮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죄스러웠는지 뒷말을 흐렸다.
엘로니아는 참지 못하고 그를 재촉했다.
“괜찮으니까 말씀해주세요. 저도 지금 당장 자금 융통이 중요한 건 아니라서요.”
“최근에 세무조사가 좀 빡빡합니다. 별것도 아닌데 트집을 잡아서 벌금을 물리기도 하고요.”
그는 머뭇거리다 더욱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각에서는 그……. 위에 성의를 보이면 된다고들 하던데.”
“미친 거 아니에요?”
엘로니아가 펄쩍 뛰듯 외치자 그는 빠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암요. 그래서 저희는 당분간 추이를 좀 지켜보고자 합니다.”
그녀는 이상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현재 내무대신은 성격이 좀 예민하기는 해도, 깐깐하고 돈 계산에 철저한 사람이라고 정평이 나 있었다.
돈 하나 허투루 새어나가는 꼴을 못 봐서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코르크 마개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그런 사람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엘로니아는 도저히 믿기 힘들어 넌지시 되물었다.
“이전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왜 이렇게 변한 거예요?”
“그게, 이번에 상단 관련 업무를 맡은 분이 새로 부임한 분이라 하시더라고요. 막 아카데미를 수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분이 하필 그런 자리에 앉아서…….”
“안 그래도 말이 많습니다. 아카데미 때부터 연줄이 있는 분들은 알음알음 찔러 넣는 분위기더라고요.”
아카데미라는 말에 엘로니아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들이 나와서 사회활동을 막 시작할 시기였다.
‘에릭스도 이번이 졸업이던가.’
이맘때까지 버티면 에릭스도 돈을 벌 테니 숨구멍이 트이겠거니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엘로니아는 한숨을 내쉬며 깊은 생각 없이 되물었다.
“혹시 새로 오신 분의 성함은 아시나요?”
“예. 에릭스라고 얼핏 다른 상단주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성은 잘 모르겠네요.”
“에릭스요?!”
네 이름이 왜 거기서 나오니?
엘로니아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휘둥그레졌다.
놀란 상단주가 가슴을 부여잡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 세상에 에릭스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근데 하는 꼴이 어째…….’
정말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졸업 시기부터 이름. 그리고 행동 패턴까지.
딱 제 동생을 빼다 박았다.
엘로니아는 침착하게 생각하기 위해 우선 상단주를 돌려보내려 애써 태연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요. 그럼 제가 부탁드린 양만 목검으로 만들어서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상단주는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물러났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까지 확인한 엘로니아는 뒤늦게 경악에 가득 차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걔가 대체 무슨 실력으로 황실까지 들어간 거야!”
그는 절대 내무를 맡을 인재가 아니었다.
한 번도 제가 보내는 돈을 알뜰하게 쓴 적이 없었다.
매번 돈이 모자란다고 남작 부인에게 징징대며 서신을 보내는 통에, 없는 돈을 쥐어짜서 보낸 적이 몇 번이란 말인가.
“아카데미 출신이면 다 저런 자리에 앉을 수 있나?”
그녀가 알기로는 그렇지 않았다.
귀족가의 개인과외 선생님이나, 시녀로 들어가는 일이 훨씬 많았다.
말 그대로 에릭스는 아카데미 내에서도 퍽 잘된 편이라는 뜻이었다.
똑똑, 그녀의 방문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엘로니아는 테이블에 이마를 괸 채 침울하게 답했다.
“들어오세요.”
“이런.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들여보내면 되나.”
카르벨은 능글맞은 웃음을 건네며 들어왔다.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표정을 관리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황실 연회 초대장이 도착해서. 폐하께서도 참석하시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그대에게 정령사로 일을 맡길 생각인 모양이야.”
“아……. 알겠어요.”
정령사의 일이라. 닉스가 순순히 도와줄지 모르겠다.
가짜 정령사일 때는 뭘 준비하라고 카르벨이 자세히 사전 안내를 해주었는데, 진짜라고 주장한 뒤로 그의 지원이 뚝 끊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가짜라고 할걸.’
사실 진짜면 그의 도움이 필요 없어야 정상이기는 했다.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카르벨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맞췄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니에요. 별일 없어요.”
“안색이 좋지 않은데.”
그렇게 별로였나. 엘로니아는 가볍게 제 뺨을 쓸어내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카르벨은 집요하게 그녀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면 그 역시 따라왔고, 뒤로 내빼어도 그보다 배로 가까이 다가왔다.
“말 해봐. 사실 가짜 정령사였다고 해도 괜찮으니.”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피하니까 의심스럽잖아.”
그의 진중한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울렸다.
가까운 숨결에 엘로니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허리 부근이 간지러운 것도 같았다.
묘하게 숨을 쉬는 것도 신경이 쓰여, 괜히 몸이 움츠러들었다.
코끝이 가볍게 스치자, 그의 입술 틈으로 자그마한 웃음이 공기처럼 흘러나왔다.
이 상황을 피하려면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에릭스가……. 내무부에 취직한 모양이에요.”
“에릭스면, 처남이군.”
처남이라는 말이 못마땅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기에 그녀는 입을 찌그러트리는 것으로 제 의사를 표명했다.
카르벨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래서. 아니꼬웠나?”
“그건 아니고……. 좀 과분한 자리에 앉은 것 같아서요.”
“혹시 아나. 일을 잘할지.”
“그건 아닐걸요. 벌써 악평이 자자하던데요.”
마음 같아서는 에릭스를 내무부에서 해고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또한 결국 카르벨의 권력에 기대는 모습이 아니던가.
차마 그런 부탁까지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꾸준히 일을 못 해서 빨리 잘렸으면 좋겠다.’
그래. 이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었다.
엘로니아는 폐하께 슬쩍 익명의 고발 편지라도 보내볼까 고민했다.
애초에 익명의 편지가 황실까지 전해질 리도 없지만 말이다.
순간, 그녀의 미간이 꾹 눌렸다.
정신을 차리자 카르벨이 엄지로 가볍게 그녀의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너무 인상을 쓰는군.”
“아, 죄송해요. 잠깐 생각 좀 하느라.”
“그 정도로 에릭스가 그 자리에 있는 게 불만인가?”
아, 사이가 안 좋아서 그렇다고 생각한 건가.
엘로니아는 빠르게 반박했다.
“아뇨. 에릭스가 상인들을 대상으로 과하게 벌금을 물리는 모양이에요.”
“벌금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걸로 물고 늘어지기는 힘들 텐데.”
“이것저것 끼워 맞춰서 악용하는 거죠. 일부 상단에게는 뇌물을 받기도 하나 봐요.”
“그래도 끼워 맞출 수 있다는 건, 그쪽에서도 빌미를 주었다는 뜻이야. 일 잘하는군.”
허. 이걸 칭찬하다니.
엘로니아는 넋이 나가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눈을 접어 웃으며 친절히 말을 이었다.
“왜?”
“아니에요. 연회 준비해야죠.”
엘로니아는 휙, 도도하게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뒤로 카르벨의 유쾌하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