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57화 (157/234)

50. 명단 속 아이들

‘내가 최근에 치정물에 너무 시달린 탓인가.’

엘로니아는 펠런 백작을 떠올리며 자신의 불손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아셀리의 말이 한 번 더 꼬여서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와 달리 그녀의 표정은 시종일관 온화하고 우아한 황족의 자태 그 자체였다.

그래서 더 헷갈렸다.

아셀리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말을 덧붙였다.

“아, 혹시 말씀하시기 곤란한 내용이라면 괜찮아요.”

그녀의 가늘고 고운 손이 찻잔의 손잡이를 가볍게 쓸었다. 침묵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엘로니아가 괜찮다는 형식상의 말을 내뱉기 전, 기다렸다는 듯이 아셀리의 입이 먼저 열렸다.

“원래 혼인이라는 게, 준비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기도 하고 그러는 거니까요.”

아, 이로써 확실해졌다.

아셀리의 목적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녀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게 단순히 에스피디 제국의 ‘헤일튼 공작’을 아껴서 하는 말인지, ‘카르벨’ 그 자체를 위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진짜 시누이야 뭐야……?’

정작 그녀는 헤일튼 공작가에서 시집살이는커녕, 지참금 하나 없어도 눈치받지 않았거늘.

엘로니아는 모른 척 해사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무엇일까요? 헤일튼가에 어른이 안 계시는 바람에 제가 놓친 게 있을까 해서요.”

“공께서 별말씀 없으시던가요?”

“우리 그이가 하는 말이라면…….”

엘로니아는 쑥스러운 척 자신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녀가 가진 연기력을 쥐어짜, 사랑에 빠져 행복에 들뜬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가끔 다정한 말을 속삭이시는 정도인데…….”

“……공이 하는 말이…… 맞나요?”

“그럼요. 낮에는 친절하시지만 밤에 침실로 오실 때는 오히려 살짝 거친 면이 드러나시는데, 그 차이가…….”

뒷말은 끊어줘야 제맛이지.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엘로니아는 괜히 고개를 돌려 얼굴이 달아오른 척 허공을 응시했다.

실상 그가 밤에 올 때는 대부분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보석을 가져갈 때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럼. 물건을 가져가는 것도 나름 거친 행동이라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으니 황족 기만죄는 피했다며 속으로 자신을 칭찬했다.

주절주절 이어지는 말이 길어질수록, 아셀리의 표정도 덩달아 딱딱해졌다.

여전히 웃는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듯했다.

엘로니아의 말에 아셀리의 분홍빛 눈에 아주 짧게 경멸이 스쳤으나, 그마저도 찰나처럼 빠르게 지워졌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잔을 들며 온화하게 답했다.

“보기 좋네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기분 좋죠.”

“실례가 아닐까 했는데, 다행이네요.”

“아니에요. 공이 그런 식으로 엘로니아 양을…….”

“저요?”

“아, 죄송해요.”

아셀리는 놀란 척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녀와 잘 어울리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번쩍이는 탓에 엘로니아는 잠시 눈을 깜빡했다.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아셀리는 곤란한 듯 자신의 구불거리는 결 좋은 금발을 가볍게 쓸어넘겼다.

“정령사를 앞에 두고 제가 실언을 했네요. 아무래도 저보다 더 카르벨 공에 대해 잘 아시겠죠.”

“아는 것과 함께 알고 지낸 세월이 쌓인 것과는 또 다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전하의 의견도 존중합니다.”

순간, 아셀리가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웃음기 하나 없이 올라간 눈매 속 분홍빛이 짙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앞서 적당히 예의를 뒤집어쓴 모습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아셀리는 여전히 우아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혹시 지내면서 공이 이상하다고 느끼신 적 없으신가요?”

“어떤 점일까요. 종류가 많잖아요. 성격, 취미, 외모, 성적 취향, 과거의 여자…….”

손가락을 세던 엘로니아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아셀리의 답을 독촉했다.

이에 그녀는 덤덤히 답했다.

“……아니에요. 워낙 싫은 소리를 안 하는 이라, 저도 모르게 궁금했나 봐요.”

아셀리는 짧은 침묵 끝에 해사한 미소로 화제를 바꿨다.

“두 분의 혼인식이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부디 초대해주시길 바라요.”

그 뒤에 건넨 말들은 사소하고 형식적인 이야기였다.

의식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대화 속에 카르벨의 이름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헤일튼 공작저를 뒤로한 채, 아셀리는 에스피디 황가의 인장이 박힌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녀는 자신을 배웅하는 엘로니아에게 적당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마차의 문이 닫히자, 그녀의 얼굴에 옅게 깔려 있던 친절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정령사가 아니네.”

그녀는 멀어지는 헤일튼 공작저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셀리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기회를 주었다.

정령사가 아니라고, 그에게 속았다며 카르벨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그러나 정작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카르벨의 천한 태생도, 마차 사고도 다른 그 어떤 것도.

분명 어디 가난하지만 전통은 있는 순진한 여자를 데려다 앉혔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도 카르벨과 같은 일을 해야 한다면 그러할 테니까.

천한 태생이 가지고 있는 갈망이란 결국 똑같다.

작위, 돈, 명예. 모든 걸 가져도 가질 수 없는 게 바로 혈통이니까.

그와 아셀리는 닮았다.

그래서 확신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정령사를 배출한 가문인 데브니 남작가일 줄은 몰랐다.

그녀는 조금 피곤한 듯 자신의 목덜미를 가볍게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데브니 남작이 아들 얘기만 해서 딸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단 말이지.”

데브니 남작에게 어릴 적, 역사를 배웠다.

어린 그녀가 황실에 들어온 뒤부터 제법 성장해 데뷔탕트를 치르고, 성인식을 치르기 직전까지.

사실 수업보다는 그의 아들 자랑이 더 많았다.

속이 뻔히 보이는 사내였다.

자신에게 잘 보여 제 아들에게 괜찮은 자리 하나 마련해주길 바라는 이들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엘로니아가 그 집안에서 당했을 일은 불 보듯 뻔했다.

카르벨 정도씩이나 되는 이가 유혹한다면 쉽게 넘어갔으리라.

‘그러면 그렇지. 갑자기 대뜸 정령사를 데려왔다 할 때부터 이상했어.’

폐하께 조금 신중히 지켜보자 조언을 한 사람도 그녀였다.

하나뿐인 딸의 이야기를 기꺼이 수긍해준 덕에 임명까지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펠런 백작의 일은 도저히 정령사가 아니라고 의심할 수 없었다.

분명 카르벨이 짜둔 판일 것이다.

아셀리는 차가운 낯빛으로 마차의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읊조렸다.

“대단한 줄은 알았는데, 쇼도 제법 훌륭하게 만드네.”

역시 탐이 난다.

주변을 이용해 자신의 전통성을 이렇게 입증하는 사람이라니, 그녀에게 필요한 유형이었다.

단지 조금 거슬리는 게 있다면.

“진심은 아니겠지?”

카르벨이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사람을 믿지 못한다.

제 태생을 숨겨야 하니 끝내 마음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카르벨에 대해 말하는 엘로니아에게서 미미한 신뢰감이 느껴졌다.

사랑을 속삭였다는 말은 거짓이겠지만, 그 말을 꺼내는 기저에는 퍽 우호적인 태도가 깃들어 있었다.

아셀리는 자신이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들이켰다.

“신뢰? 하.”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카르벨이 친절해 보이는 것은 항상 적당한 선을 두기 때문이다.

언제고 필요가 없어지면 순순히 버릴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사랑? 그것도 가짜로 데려온 정령사와?

“말도 안 되는 소리.”

다그닥,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의 바퀴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베른에서는 노파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보통 젊을 때 죽는 일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레이터는 기어코 베른 출신의 사람을 찾아냈다.

베른만큼 거친 곳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빈곤한 듯한 주변 풍경을 둘러본 그는 조심스럽게 똑똑,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오래전에 베른에서 지내셨다는 분이 계신지 여쭤도 될까요.”

한참 만에 끼익, 낡은 문이 열렸다.

노인은 제법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귀해 보이는 이가 여기까지는 웬일입니까?”

“잠시 들어가서 대화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들어오라는 듯이 문 앞에서 비켜주었다.

점술집이라도 하는 것인지, 주변에는 점을 보는 주사위와 바위 등 기묘한 것들이 널려 있었다.

노인은 적당히 그것을 치워가며 물었다.

“베른에서 떠난 지 세월이 좀 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찾아오셨습니까?”

“점을 보실 줄 아십니까?”

“보기는. 그냥 적당한 눈속임과 눈치이지요.”

그녀는 껄껄 시원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이 잔재주 덕에 돈을 모아 베른을 나왔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그녀의 말에 그레이터는 조심스럽게 품에 지니고 있던 명단을 넘겼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지, 노인은 오만상을 찌푸려가며 서류 속 인물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레이터는 설명을 덧붙였다.

“혹시 아시는 이가 있으신가 해서 여쭤봅니다.”

“아아, 그래. 전부 베른에 살 적 보았던 아이들이네요.”

“그렇습니까?”

그레이터는 놀랐으나 능숙하게 제 감정을 숨겼다.

그런 그에게 노인은 계속해서 설명을 덧붙였다.

“이 아이는 어릴 때 죽었는데, 명단을 보아하니 그때보다 일 년 전쯤에 만들어진 건가. 여기 이 여자애도 죽었어요. 집이 무너졌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혹시, 여기 있는 이들을 전부 기억하시나요?”

“전부는 모르겠고. 대부분 베른에 살던 아이들은 맞는 것 같네요. 베른은 아이가 살기에 워낙 척박해서 꽤 마음이 쓰였거든.”

그녀의 말대로 실제 명단에서 살아남은 이는 극소수였다.

그마저도 노인이 베른을 떠나기 전을 가정하였으니, 지금은 살아 있는지도 모호했다.

그레이터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혹시 베른에 계실 적, 귀족 부부께서 방문한 일은 없습니까?”

“있지. 둘 다 곱게 생긴 부부였어요. 특히 부인이 가지고 있던 백금발에 하얀 피부가 얼마나 눈이 부시던지. 귀족을 볼 일이 워낙 적어서 애들이 아주 난리가 났지, 아마?”

“베른에서 무얼 하셨던가요?”

“딱히.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음식을 나눠주고 옷을 주고 했지.”

“기간은 기억하십니까.”

“추울 때였던 건 기억하는데……. 한 반년쯤 오가다 언제부터인가 발길을 딱 끊었어요. 애들을 유독 좋아해서 기억이 나요.”

아마도 그들이 죽은 뒤 발길이 끊긴 모양이었다.

그 외에 노인이 해 준 말대로라면 일반적인 귀족들이 빈민가에 가서 하는 일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소식을 들고 그레이터는 당당히 공작저로 돌아왔다.

그는 카르벨에게 노파의 말을 전했다.

명단에는 그녀가 기억하는 대로 죽은 이와 이사 간 이.

혹은 운이 좋게 밑바닥에서 일을 하다 입양되거나 결혼을 한 이들까지 표시되어 있었다.

그레이터는 뒤늦게 진척이 생긴 공작 부부 일에 대해 희열을 내비쳤다.

“각하. 전대 공작님께서 꾸준히 가셨던 곳이 베른이 맞는 듯합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의 말에도 카르벨은 답이 없었다.

그는 묵묵히 표기된 명단 속 아이들을 응시했다.

베른. 엘로니아의 입에서 갑자기 나온 지역이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그곳을 그녀는 단번에 집어냈다. 자신이 진짜 정령사라고 주장하면서.

‘설마, 진짜…… 정령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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