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52화 (152/234)

45. 남들의 기준

겉면만 봐서는 일반적인 서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흩어진 서류를 줍는 그레이터를 두고 그 기묘한 종이에 손을 뻗었다.

슬쩍 겉장을 들자 흐트러진 종이 틈으로 익숙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전대 공작께서 대여한 마차 상단 인수 및 폐기…….>

그 뒤를 더 읽기 전, 그레이터의 손이 종이를 덮었다.

고개를 들자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로니아 님.”

자연스럽게 마지막 서류까지 챙겨 든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레이터는 아무렇지 않게 서류를 추스른 뒤 까닥, 고갯짓으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네고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엘로니아의 머릿속에는 유독 한 단어가 박혀 둥둥 떠다녔다.

‘마차? 전대 공작?’

리프리를 만난 뒤라서일까. 단순한 서류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뒤늦게 적힌 내용을 묻기에는 늦었다.

그레이터는 이미 빠른 걸음으로 연무장을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그래서 기분이 좀 이상했나?’

엘로니아는 기묘한 느낌이 들던 서류의 그 짧은 구절을 떠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불쑥, 카르벨이 침범했다.

“연무장이 꽤 마음에 들었나 봐.”

“아니에요. 누구께서 오전에 늘 이곳에 계신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요.”

“날 찾아왔나.”

“누구라고 했지, 카르벨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요.”

“급할 때는 파올에게 전해달라 하면 돼.”

그녀의 얄팍한 회피는 그의 답변에 간단히 묻혔다.

빙글거리는 말투에서 은근한 즐거움이 묻어났다.

리프리가 돌아가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었다.

엘로니아는 괜히 큼, 목을 가다듬고는 연무장 주변에 심어진 나무를 보며 질문을 건넸다.

“오전에 나간 게, 그 서류 때문이에요?”

“그럴 수도 있고.”

“뭐예요, 그 애매한 답은.”

곁눈질로 흘기자 카르벨은 그저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까닥이며 장소를 옮기기를 종용했다.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자 그가 보폭을 맞춰 걸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하도 그대의 입궁을 종용하셔서 말이지.”

어라. 그럼 오전에 볼 일이라는 게 황제를 알현하는 일이었던 건가.

오랜만에 보는 듯한 그의 격식을 차린 옷매무새가 그런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그는 습관적인 매너처럼 그녀를 안내했다.

이미 돌아다닐 만큼 돌아다녀 익숙한 저택인데도 꼭 처음 오는 사람을 대하는 듯했다.

“정식으로 임명받은 뒤, 연회에 한 번은 참가해서 얼굴을 비춰야 할 거야.”

그녀가 건넨 질문에서 대화의 주제는 어느새 그녀의 입궁으로 변해 있었다.

너무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 탓에 대화가 원래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말을 돌린 것 같기도 하고…….’

정작 듣고 있는 엘로니아조차도 그가 의도한 것인지 확신이 없을 정도였다.

카르벨은 답이 없는 그녀가 긴장했다고 생각했는지 친절하게 설명을 더했다.

“대단한 걸 묻지는 않으실 거다. 나도 함께 갈 터이니 곤란할 때는 옆에서 도울 거야.”

그의 말이 끝났을 때. 엘로니아는 어느새 집무실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황제가 입궁을 독촉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예정된 일정보다 빠르게 날짜가 당겨졌다.

엘로니아가 제대로 임명을 받는 날이기에 시녀들도 분주했다.

준비를 거의 끝마치고도 빠트린 부분이 없나 여러 번 확인할 정도였다.

“드레스, 구두, 목걸이……. 아니야. 장신구는 뺄까요?”

“머리도. 자연과 함께하는 분이신데 너무 인위적인가요?”

엘로니아는 자신이 무슨 경합 대회라도 나가는 게 아닐까 의심되었다.

그 경합의 주제는 ‘자연’ 정도가 적합하겠다.

벌써 머리만 해도 몇 번인지 모를 만큼 넘겼다, 묶었다, 반만 묶었다, 땋았다, 풀었다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화장대 앞에 나란히 앉은 님프와 노움은 덩그러니 앉아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엘로니아의 모습을 보던 노움은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인간들에게 정령사란 저런 느낌이구나.]

정작 정령들은 그녀가 어떤 모습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님프조차도 고개를 기울이며 눈만 깜빡였다.

아무래도 그들이 생각하는 정령사의 모습과 퍽 괴리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본 엘로니아 역시 눈이 멀어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진짜 눈이 부셔서 제대로 뜨고 있기도 버거웠다.

조금의 빛만 비쳐도 보는 각도에 따라 윤기가 흐르는 듯 반짝이는 드레스와 그 위에 놓인 은실 자수가 자체적으로 발광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뿐인가. 온갖 보석들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가 떨어졌다가를 반복했다.

“아니야, 이게 아니에요! 정령사 같지 않아요!”

도자기를 깨는 장인과도 같은 에이미의 외침 덕에 결국 온갖 장신구가 전부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무언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 뭔가 티 나지 않게 자연스럽지만, 심혈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하나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세상에 그런 건 존재할 수 없어, 에이미.”

엘로니아의 강한 부정에도 시녀들은 머리를 맞대며 고심 끝에 손톱보다 더 작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어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정작 마차까지 에스코트하기 위해 온 카르벨은 의외로 담백한 반응이었다.

“가지.”

다른 부가 설명이나 입에 발린 소리마저도 모조리 생략된 말이었다.

옆에서 그의 안색을 슬그머니 살폈으나 별다른 기색을 찾기 힘들었다.

오히려 그보다 주변을 신기한 듯 맴도는 님프의 행동에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신기한 듯 엘로니아를 빙빙 돌며 확인하다 꺄르륵 수줍게 웃기를 반복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으니 문득 최근 보지 못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닉스가 보이지 않네.’

리프리가 돌아간 날을 기점으로 그는 불러도 대답조차 없었다.

처음 본 이후로 이렇게까지 길게 보이지 않은 적이 없어 슬슬 걱정이 되던 차였다.

엘로니아는 눈대중으로 물었다.

‘님프. 혹시 닉스를 본 적 없어?’

대수롭지 않게 물은 질문에 님프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리저리 그녀의 앞을 빠르게 왔다 갔다 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무, 무슨 뜻이야?’

무언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님프는 바지런히 설명했다.

그러나 엘로니아의 귀에는 그저 꺄르륵 웃는 소리와 크게 다를 바 없이 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님프를 따라 바삐 움직였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엘로니아는 눈에 힘을 주며 님프의 행동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를 모르는 카르벨은 그저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피곤하면 마차 안에서 눈이라도 붙이고 있어.”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는 눈을 마주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의 뒤로 님프가 보이니 마주 웃기도 곤란했다.

‘갑자기 왜 불안하게 왔다 갔다 해서…….’

그러고 보면 매번 님프의 말은 노움과 닉스가 해석을 해 주다시피 했다.

‘평소에는 대충 잘도 알아들었네.’

엘로니아는 마차에 올라타며 미안한 듯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중에 와서 케이크 줄게.’

나중이라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님프의 얼굴이 급격하게 침울해졌다.

그 모습에 엘로니아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돼. 가야 하거든. 대신 돌아와서 많이 줄게.’

그제야 님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쁜 듯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카르벨은 마차의 문을 가운데 두고 그녀의 모습을 희한한 듯 지켜보았다.

문턱에 턱, 한 손을 짚은 그는 고개를 숙였다.

엘로니아와 눈높이를 맞춘 그가 말했다.

“머리가 무거우면 그냥 풀지 그래.”

님프에게 답한 것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곱게 틀어 올린 머리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 이거요. 정령사 같지 않아요?”

“별로.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를 따를 생각이라면 긴 생머리를 풀었어야지.”

“그건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힘들어요. 저는 직모가 아닌걸요.”

카르벨은 그녀의 모습이 소문처럼 떠돌던 정령사의 모습을 본떴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칭찬 한마디 없더라.’

누가 정령사의 모습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단 말인가.

여태 대륙에 정령사의 이미지를 만들 만큼 많은 수의 정령사가 나온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세간에 돌아다니는 정령사의 이미지가 있는 듯했다.

시녀들조차도 그녀의 머리를 두고 여러 의견이 분분했으니 말이다.

입고 있는 드레스도 그 이미지에서 파생된 결과물 중 하나였다.

‘어쩐지 머리를 계속 만지더라니. 알려진 이미지랑 달라서 고민했던 거네.’

묶어 올린 머리도 본래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적당히 감춘 느낌이 들었다.

한 가닥 의도적으로 흘러내린 옆머리를 괜히 만지작거리자 카르벨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전부 다 남들이 말하는 기준에 맞출 필요는 없어.”

잿빛 눈동자가 싱긋, 미소 속으로 감춰졌다.

그는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리본을 단번에 풀어냈다.

에이미의 노고가 순식간에 물결처럼 스르륵, 풀려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주황빛 머리칼이 그녀의 등을 뒤덮었다.

카르벨은 그런 그녀를 만족스럽게 보며 말했다.

“우리는 가짜니까.”

***

황궁에 도착한 마차는 정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황실 기사단이 그들을 맞이했다.

“폐하께 극진히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가장 멀리 있는 이의 이목구비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고작 알현실까지 가는 길을 그들은 절도 있게 가리키고 있었다.

그제야 새삼 정령사라는 위치가 훅 체감되었다.

더불어 카르벨이 가짜 정령사를 입에 올린 일이 얼마나 대범한 일이었는지까지도.

‘들키면 카르벨은 최소 황족 기만죄는 깔고 들어가는 거 아니야?’

더욱 부담스러워져 엘로니아는 입을 꽉 다물었다.

하지만 카르벨은 익숙하게 그들이 내어준 길을 걸어갔다.

“긴장하지 마. 어차피 임명하는 곳에는 폐하만 계실 테니.”

그는 긴장이라도 풀게 할 요량인지, 잡은 손등에 입술을 짧게 지분거린 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을 칠 수 있는 그가 대단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고개를 숙인 기사들 틈을 걷자, 그녀의 머리카락 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났다고?’

그러고는 푸하, 간신히 고개를 내민 님프가 놀란 듯 눈을 끔뻑였다.

‘사라진 줄 알았더니, 머리카락 틈에 있었구나!’

님프는 새로운 장소에 겁을 먹은 듯 엘로니아의 머리카락을 커튼처럼 움켜쥐었다.

엘로니아는 침착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들이쉬고, 내쉬고. 그런 그녀의 호흡을 지켜보던 님프가 똑같이 따라 하는 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을 타고 느껴지던 떨림이 서서히 멎어 들었다.

그리고 그 대신, 그녀의 머릿속으로 갑작스러운 과거의 광경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빨간 장미가 도드라지는 황실의 정원이 보였다.

무수히 많은 기사들이 나열하고 있는 현재와 달리, 단 세 사람만이 존재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두 부부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로엘 황태자.

헤일튼 공작저 정원에서 봤던 사이 좋은 모습과 정반대되는 모습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