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퍼즐 조각
그가 얼마나 카르벨에 대해 신뢰가 없는지 단적으로 느껴졌다.
고작 반나절 외출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엘로니아는 살풋 웃으며 답했다.
“설마하니 무슨 일이 있었겠어요. 카르벨도 있었고, 데드 경도 함께했는걸요.”
리프리의 물색 눈동자가 아주 잠깐, 망설이는 듯 그녀에게 머물렀다.
‘너무 과하게 걱정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일어났잖아!]
불쑥, 그녀의 앞에 닉스가 나타나 소리쳤다.
놀란 엘로니아의 어깨가 다시금 위로 크게 치솟았다.
덩달아 놀란 리프리가 당황한 듯 답했다.
“그 정도로 실례가 되는 말일 줄 몰랐습니다. 사과하겠습니다.”
“아뇨. 저하 탓이 아니라, 그, 그냥 어휴. 오늘 날씨가 참 놀랍죠?”
“놀랍다고요?”
“그럼요! 어쩜 이렇게 햇볕이 쨍하고 공기도 청량하고 온도도 적당하고! 자연의 신비란!”
아, 하필 놀랍다고 해서!
분명 그녀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안 그래도 카르벨과의 사이를 의심하는 모양인데, 괜히 의심에 불피운 건 아닌가 걱정되었다.
닉스는 꿋꿋하게 엘로니아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말했다.
[말 돌리지 마! 또 이상한 향을 묻혀 오고! 내가 못 살아!]
그녀가 세 살배기 아이도 아닌데, 닉스는 잔소리를 있는 대로 했다.
[아주 눈만 떼면 어디를 혼자 싸돌아다니는 건지. 다 그놈 때문이지? 눈 찢어진 놈!]
자그마한 손으로 답답한지 가슴까지 퍽퍽 치는 그를 보니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닉스 말이 맞기는 하지.’
그녀는 소개장이 필요한 사람도 아니었고, 갑자기 찾아온 키레일도 사실은 카르벨이 필요해서 부른 거였다.
비록 엘로니아에게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렇게 힘겹게 만나 놓고 나올 때 카르벨은 제법 힘겨워했다.
‘난 좋은 일로 만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안던 품이 떠올랐다.
‘아니……. 이게 갑자기 왜…….’
아무도 그녀의 생각을 볼 수 없는데도 민망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자 닉스의 눈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안 듣고 있지?]
엘로니아는 스트레칭을 하는 척 닉스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비록 닉스가 모기처럼 휙휙 전부 피하는 탓에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엘로니아가 속으로 주먹을 부르르 쥐고 있을 무렵.
“표현이 재미있네요.”
웃지는 않았지만 조금 편안해진 리프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혹시 돌아오지 않으실까 봐 마음 졸였습니다.”
앞을 보는 그의 옆모습이 씁쓸하게도 보였다.
리프리는 아마도 전대 공작 부부를 떠올리는 듯했다.
공작 부부도 일상적으로 나갔다가 사고로 돌아오지 못했으니.
트라우마가 되기라도 한 걸까.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대 공작님과 사이가 좋으셨나 봐요.”
“어릴 적에는 에스피디 제국에서 거의 1년의 반은 지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워낙 사이가 좋으셨거든요.”
“아, 그래서 저택에 익숙하셨군요.”
“오래 헤일튼가에서 일한 파올은 어릴 적부터 봤습니다.”
집사장의 경력이 생각보다 대단했구나…….
엘로니아는 얍삽한 그의 얼굴과 눈치 빠른 행동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정이 묻어 나오는 말투에서 얼마나 그를 친근하게 느꼈는지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런 리프리를 두고 아무런 설명 없이 나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카르벨이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보석을 모으는 취미 때문에 상단을 찾은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목걸이에 들었던 마법 때문에 찾았다는 말에 미미한 고마움까지 느껴졌다.
‘그것도 모르고 수수료나 달라고 하고 있었다니.’
진작 말해 줬으면 알아서 협조했을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저도 관련된 일인데,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면 참, 이상한 데서 믿음직스럽단 말이야.’
연무장에서 기사들을 지켜본바, 카르벨은 엄격하기는 해도 없는 일을 책망하지는 않는 듯했다.
좀 깐깐한 구석은 있을지라도.
혹시 두 사람이 오해가 있는 건 아닐까.
누가 사촌지간 아니랄까 봐,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점 또한 두 사람이 닮아 있었다.
큼. 목을 가다듬은 엘로니아는 알짱거리는 닉스를 무시한 채 리프리를 향해 은근히 말을 건넸다.
“그동안은 카르벨과 조용히 지내느라 외출할 일이 없었거든요. 그제 저하와 단둘이 있어서 조금 심통이 난 모양이에요.”
분명 나갈 때만 해도 어떠한 목적이 있지는 않았다.
카르벨이 조금 많이 미화된 듯하지만 어떠한가.
원래 연인들끼리는 이러는 거다. 이 모든 것은 서점에서 본 책에서 배웠다.
하지만 리프리는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형님께서요……?”
“그럼요. 카르벨도 가끔 기분전환을 하고 싶을 때가 있을 테니까요.”
“그럴 리가요. 형님은 이유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아, 서로 너무 잘 알고 있으니 이런 점이 불편하네.
그래서 약혼조차 의심하고 있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카르벨도 사람이다. 향수에 힘겨워할 정도의 사람.
엘로니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사람이 어떻게 매일 이유가 있겠어요.”
“…….”
리프리의 푸른 눈동자가 되레 덤덤히 그녀를 응시했다.
잠시 그의 빤한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 보니, 설마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엘로니아는 애매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하께서는 이유가…… 있어요?”
“예. 일도 있고, 개인적으로 알아봐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럼 언제 쉬어요?”
“쉬어야 합니까? 지금도 충분합니다.”
카르벨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서, 이게 쉬는 거라니!
감시가 언제부터 쉬는 일이란 말인가.
엘로니아는 떡 벌어지는 입을 다무느라 애썼다.
이를 곁에서 듣고 있던 닉스도 혀를 내둘렀다.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잖아?]
어쩐지 카르벨과 단순히 외출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했다.
본인이 그렇게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엘로니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난 적 있어요?”
“없습니다.”
“의미 없이 꽃 한 송이를 꺾어다 꽃잎을 세어 본 적은요?”
“꽃은 함부로 꺾으면 안 됩니다.”
“길고양이에게 빵을 준 적은요?”
“이동 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길에서 만날 일이 없습니다.”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보고 사셨네요.”
그는 엘로니아의 말에 더욱 의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빛이 흔들렸다.
대체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면 이렇게 사람이 교과서처럼 살 수 있는 걸까.
카르벨보다 게으르고, 리프리보다 덜 도덕적인 엘로니아는 덥석.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럼 오늘 해요.”
“무엇을 말입니까.”
“쉬는 거요.”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시키면 되는 일이다.
자신과 하루를 지내고 나면, 그도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이다.
‘의심을 거두고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볼 가능성도 있겠지.’
[각 잡고 오늘 쉰다고 하는 게 쉬는 거야?]
닉스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엘로니아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 * *
리프리의 하루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했다.
간단한 운동을 하며 머리로는 오늘의 일정과 할 일을 계산했다.
이는 전부 어린 시절, 헤일튼가에서 보고 배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마법 연구도, 일정도, 훈련도 아닌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엘로니아 양.”
“말하지 마요. 저 진짜 괜찮으니까.”
그녀는 온갖 이맛살을 찌푸리며 카드를 들고 눈치를 봤다.
테이블 위에는 각이 맞춰진 포커가 일렬로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이 판은 그가 이긴 게임이었다.
“죄송하지만 스트레이트 플러시입니다.”
그가 카드를 내려놓자, 엘로니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마법이죠? 사람이 어떻게 된 게 한 번을 안 져요?”
“이런 게임에 마법을 쓸 리가 있습니까.”
“카드에 수작을 부린 것 같진 않은데…….”
그녀는 원망스러운 듯 허공 어딘가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리프리는 무려 체스부터 포커까지 12전 12승을 달성 중이었다.
연패에 분했는지 그녀는 한 번 질 때마다 카드를 바꿔도 보고, 체스 말의 색도 바꾸고, 급기야 앉은 자리까지 바꿨다.
사실 엘로니아의 표정에 그녀의 생각이 전부 드러나는 탓이 컸으나, 그녀는 모르는 눈치였다.
엘로니아는 지치지도 않는지 카드를 마구잡이로 뒤섞어 버렸다.
“됐어요. 다른 거 할 거예요.”
“조금 봐 드리겠습니다.”
“안 돼요. 봐주지 마요. 이건 제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자신만 너무 내리 이기는 것은 너무한 듯해, 봐주겠다고 해도 저렇게 나온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엘로니아는 고민하는가 싶더니 대단한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래요. 저하도 이건 못 하시겠지?”
그녀는 대뜸 시녀를 불렀다.
“에이미, 퍼즐을 가져다줘.”
“예?”
“퍼즐! 조각이 아주 섬세하게 나뉘고 머리카락 개수만큼 개수가 많은 걸로!”
“알겠습니다!”
시녀는 왜소한 외형과 달리 우렁찬 대답과 함께 퍼즐을 가져왔다.
그녀의 지시대로 머리카락 개수만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조각만으로는 원그림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엘로니아는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리프리 저하라고 해도 이건 못 하실 거예요.”
그녀는 보드라운 털로 만든 러그 위에 와르르, 퍼즐을 쏟아 버렸다.
그리고 외부의 시선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순간 당황한 그는 그녀를 일으켜야 하나 갈등이 생겨 몸을 움찔했다.
엘로니아는 그를 보더니 못마땅한 듯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꼿꼿하게 앉아 있으면 안 힘들어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올바른 답이 아니잖아요.”
입을 한 번 삐죽인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를 잡아끌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아차 싶었는지 되물었다.
“잠깐 만질게요, 저하.”
그대로 그의 어깨를 붙잡은 엘로니아는 낑낑, 힘을 주어 그를 앉히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 강한 힘이 아닌지라 버티려면 버틸 수 있었으나, 제법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니 눈치껏 앉아야 하는 것 같았다.
리프리는 엘로니아의 힘이 이끄는 대로 조용히 러그 위에 앉았다.
그제야 그녀는 뿌듯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때요. 편하죠?”
“……예.”
딱히 앉아 있는 게 불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터라 그는 대충 답을 했다.
엘로니아는 두 손으로 퍼즐 한 뭉텅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저하는 이걸 맞추세요. 저는 남은 걸 할 테니.”
“알겠습니다.”
도저히 그녀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이게 쉬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그저 시간을 낭비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엘로니아는 꽤 진지하게 퍼즐에 임하고 있었다.
리프리가 퍼즐을 다 맞추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그동안 단 세 조각을 끼워 맞췄을 뿐이었다.
그녀는 넋이 나간 듯 퍼즐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이 집안은 어떻게 된 사람들이…….”
조금 원망스러운 듯한 시선에 리프리는 사과를 해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엘로니아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사과하지 말고, 그냥 힌트만 줘요. 제힘으로 해 볼게요.”
“게임을 못 한다고 큰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못하는 게 아니고, 저하가 너무 잘하는 거예요.”
엘로니아의 샐쭉한 시선이 그를 흘겨보았다.
자그마한 손은 다시금 흩어진 퍼즐을 들었다.
한참을 이리저리 굴리길래 그가 손가락으로 빈 곳을 가리켰더니 바로 바르르 화를 낸다.
“힌트를 주시라니까요. 알려주시면 어떡해요.”
“음. 남쪽에서 찾아보세요.”
“좋아요.”
그제야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프리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에는 제법 익숙하게 들락날락하던 장소라 익숙했다.
자연스럽게 카르벨이 떠올랐다.
그러자 귀신같이 엘로니아의 지적이 들어왔다.
“또 다른 생각 하신다.”
“아닙니다. 안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시간이 이렇게 길었던가.’
커다란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정오의 햇살과 아무도 없는 익숙한 방 안.
리프리는 지그시 엘로니아를 바라보았다.
처음 카르벨과 약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디서 허수아비로 세울 여자를 데리고 왔나 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는 생각보다 너무 순진하고 정이 많았다.
카르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라 더 걱정됐다.
분명 그녀도 카르벨과 그의 사이를 얼추 알고 있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막는 대화의 흐름이 그러했다.
궁금할 텐데 묻지 않았다.
그저 한 번도 쉬지 못한 그와 어울려주기 위해 진심을 다하고 있었다.
‘아깝다.’
카르벨에게는 과한 여자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리프리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이…… 헤일튼가의 적통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