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상냥한 사람
카르벨은 먼저 의견을 묻고 행동하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매번 어디를 가는 것도, 일정도 그가 정해놓고 알려주었을 뿐이다.
그런 그가 부탁까지 하니 퍽 상황이 크게 체감되었다.
‘이거, 키레일인지 상단주인지 그놈이 향에 독이라도 푼 거 아니야?’
리아티코를 개량했을 때부터 이상했다.
성격도 괴상해서 그가 무얼 했다고 해도 놀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의사를 부르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하필 데드 경도 자리를 비워서…….’
아무래도 키레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이 좋아 보였다.
평소 이상한 것을 많이 만드는 모양이니, 해결 방법도 알지 않을까.
가게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찰나. 팔목을 움켜쥐었던 그가 그녀를 강하게 붙들었다.
엘로니아는 그대로 강한 힘에 이끌려 휘청이며 중심을 잃었다.
넘어진다고 생각한 순간. 넓은 품이 그녀를 받쳐주었다.
표정이 어두운 게 그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나 싶었다.
엘로니아는 허리를 감싼 카르벨의 팔을 도닥이며 몸을 일으켰다.
“키레일이라도 불러올게요. 기다리고 있어요.”
“필요 없어.”
단단한 팔이 파고들어 그녀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골목 어귀에서 술에 취한 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이, 나가서 한 잔 더?”
“좋지. 아직 밤은 길다고!”
비틀거리는 두 사람의 인영이 멀리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카르벨은 그들을 피해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상태가 안 좋은 그가 주변을 신경 쓸 줄은 몰랐다.
거의 그의 팔에 달랑 매달려 가다시피 한 엘로니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벨. 이쪽은 길이 아니에요.”
“알아.”
그는 뒤에서 끌어안은 채 낮게 읊조렸다.
“잠깐이면 돼.”
속삭이는 듯한 숨결이 목덜미와 어깨 부근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엘로니아가 움찔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남은 그의 한 손이 엘로니아의 고개가 틀어지지 않게 붙잡았다.
뿌리치려고 하면 얼마든지 가능했으나, 그러기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카, 카르벨.”
온 신경이 그에게 쏠리는 기분이었다.
엘로니아의 자그마한 부름에도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까워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더 큰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술에 취한 두 사람이 그들의 근처를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그들이 걸으면서 발로 찬 돌멩이가 데굴데굴 엘로니아의 발아래로 굴러왔다.
한참이 지난 뒤. 침묵 속에서 그녀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공작님, 가, 갔어요.”
조금 거칠었던 카르벨의 숨소리가 천천히 제 박자대로 안정을 찾아갔다.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키레일이 내뿜었던 향은 아셀리에 비하면 배로 짙었다.
최근 가까스로 떨쳐낸 두통이 다시금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카르벨은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숨을 골랐다.
놀랍게도 그녀에게서 전해진 기운이 천천히 그의 머리까지 맑게 만들었다.
그는 조용히 물었다.
“그대는 가게 안이 어떠했지.”
가까이 있는 탓에 제 품에서 엘로니아가 바르작거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고민하는 듯 으음, 하는 신음이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를 타고 그에게까지 전해졌다.
“향이 좀 머리가 아픈 정도?”
“그런 것치고 멀쩡하군.”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혹시 아셀리 전하와 자주 만나세요?”
“아니.”
카르벨은 불쾌한 이름을 듣고 강하게 답했다.
“자주 만났다기보다는, 강제로 자주 부딪혔던 것 같군.”
매번 억지로 저택까지 찾아오고, 연회에서는 꼭 그와 춤을 췄다.
그나마 카르벨이 엘로니아와 약혼을 발표한 뒤로는 보는 눈이 늘어나서인지, 포기해서인지 몰라도 조용했다.
‘아니. 포기는 아니겠군.’
키레일에게 대놓고 한 말을 보면 포기보다는 잠시 뒤에서 지켜보는 모양새려나.
강제라는 말에 그녀의 어깨가 작게 튀어 오르는 걸 보니 놀란 모양이었다.
‘작은 동물이 이러할까.’
엘로니아는 당찬 척하면서도 꽤 겁이 많았다.
꼭 제가 잡아먹기라도 한다는 듯이 굴었다.
자신이 그리 위협적으로 보였나 고민하느라 그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덜어낸 카르벨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그녀의 어깨 부근에서 깊게 숨을 마셨다.
간지러웠는지 엘로니아의 허리가 잠시 꼬였다.
그마저도 그가 팔에 힘을 주니 금세 멎어 들었다.
엘로니아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제 의견을 주장했다.
“향수 주문한 사람, 아셀리 전하 같지 않아요?”
“그대가 눈치를 챌 정도란 말인가.”
카르벨도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만약 아셀리라면 키레일이 그렇게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손님 에 대해 말을 아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황실의 사람이라면 섣부르게 입에 올리기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키레일은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저희 둘 다 알아챌 정도면……. 불이익이 가거나 하지 않겠죠?”
“걱정까지 해주다니. 상냥하네.”
카르벨은 빈말로 그녀를 칭찬했다.
제멋대로 구는 놈, 뭐가 예쁘다고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지.
키레일인지 뭔지 괴짜 같은 놈이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할 때도 그러려니 했다.
말로는 손님의 정보는 팔 수 없다면서 정작 유추할 수 있을 만큼 힌트를 주기에 소개장을 얻은 값은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 생각은 그러한데.
‘불쾌하군.’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모를 감정이 그의 속 안에서 똬리를 틀었다.
지금 제 품에서 벗어나려고 낑낑대는 엘로니아도, 키레일도 전부 불쾌했다.
“각하. 어디 계십니까? 엘로니아 님!”
데드의 힘찬 목소리가 들리자, 엘로니아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카르벨은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미동조차 없었다.
‘그냥 팔을 콱 물어버려?’
가능한가 싶어 엘로니아가 고개를 숙여 그의 팔까지 거리를 가늠해보려던 찰나.
그대로 굳었나 싶던 카르벨이 드디어 상체를 일으켰다.
동시에 엘로니아도 자유를 찾았다.
“덕분이야. 고맙네.”
뭐라고 한소리라도 하려고 했는데, 막상 한결 후련한 듯한 그를 보니 말이 쏙 들어갔다.
대신 엘로니아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제 괜찮은 거예요?”
“원래 심한 편은 아니었어. 가끔가다 그럴 뿐이지.”
“평소에는 전혀 못 느꼈어요.”
“자잘한 것까지 신경 쓰면 일 못 하지.”
그는 익숙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픈 게 먼저지, 일이 먼저인가?’
엘로니아야 한 푼이 아쉬워 자발적으로 일을 했다지만, 금전적 여유까지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너무 엄격한 듯했다.
카르벨은 언제 힘겨워했냐는 듯 골목으로 나가며 대충 큰 소리로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이쪽이야.”
엘로니아는 갑작스럽게 허전함이 느껴져, 어깨를 한 번 쓸어내렸다.
이제야 멀리서 전해지는 야시장 특유의 시끄러운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적막하다고 느꼈는데, 실상 바깥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카르벨의 뒤를 따라 다시 가게 앞으로 돌아온 엘로니아는 피곤한 기분이 들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단순히 아무런 의미 없이 한 행동이었으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조금 전과 달랐다.
방금까지 눈앞에 있었던 가게와 다른 가게가 눈앞에 있었다.
간판도 잡화점이 아닌 주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 어?”
순간 말문이 막힌 엘로니아가 주점을 가리키며 어버버하자, 카르벨은 태연하게 말했다.
“버젓이 번화가에 가게를 낼 정도면 소개장을 그리 힘들게 받을 필요도 없었지.”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골목을 걷는 그를 엘로니아가 빠르게 따라잡았다.
“미리 눈치라도 좀 주시지.”
“줬는데 약혼녀께서 못 알아듣더라고.”
“언제요. 설마?”
엘로니아는 유독 그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미인계를 쓴 게 그런 이유였어요?”
“그렇게 묻는 건 통했다는 건가?”
그녀는 거북이가 이족보행을 한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 감정을 가득 담아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흘겼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잿빛 눈동자가 접히도록 웃는 카르벨을 보자 그녀는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빠르게 반박했다.
“그렇게 볼 시간에 더 확실히 알려주셨어야죠!”
“앞에서 상단주가 눈을 버젓이 크게 뜨고 있는데 대놓고?”
“아까 보니까 다른 말은 잘만 하시던데요.”
그녀는 맞춰 걷던 보폭을 크게 늘렸다.
비록 카르벨이 맞춰 걷는 바람에 큰 의미는 없었지만 말이다.
***
“재미있으셨습니까.”
다음 날 느지막한 오후, 님프에게 줄 파이를 들고 정원에 쪼그려 앉아 있던 엘로니아의 등 뒤에서 덤덤한 음성이 들렸다.
화들짝 놀란 그녀의 손에 들린 파이가 잠시 거칠게 흔들렸다.
떨어질 듯 접시 위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파이를 그녀는 이리저리 손을 움직여 무사히 잡아냈다.
“휴, 살았다.”
다행스럽게도 님프의 일용할 양식이 추락하는 참사는 막았다.
뿌듯하게 이마를 닦아낸 엘로니아의 뒤로 리프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왜 이곳에서 디저트를 드시는 거죠.”
부담스러우리만큼 곧은 시선이 그녀의 얼굴과 파이를 번갈아 가며 확인했다.
엘로니아는 벌떡 일어나 방긋 웃으며 밝게 답했다.
“아, 이거요. 음. 오늘은 밖에서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해서요!”
“요청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엘로니아 양의 티타임이라면 거절하지 않았을 텐데요.”
“차는 부담스러워서요!”
엘로니아는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풀 속에서 빼꼼, 그녀의 그릇을 바라보는 님프의 눈이 안타까움과 아련함으로 촉촉하게 물들고 있었다.
‘미안하다…….’
어째서 리프리는 꼭 님프에게 올 때면 나타나는지 모를 일이다.
마법사라 본능적으로 정령의 기척을 알아채기라도 하는 건지.
정작 리프리는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접시 주시죠. 제가 들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접시를 받은 그가 아무렇지 않은 듯 먼저 길을 안내하며 말했다.
“저도 차는 즐기지 않습니다. 디저트만 해도 괜찮습니다.”
엘로니아는 머릿속으로 그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그녀가 알기로 그는 디저트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방금 그의 말은 엘로니아에게 맞춘 것뿐이리라.
어제 그를 두고 카르벨과 도망치듯 광장으로 향했을 때 마지막으로 봤던 리프리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가 화를 내도 할 말이 없었다.
‘손님을 팽개치고 놀러 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엘로니아는 습관처럼 얼굴에 미소를 지어냈다.
“그럼 에이미에게 디저트를 준비하라 할게요. 따로 선호하시는 종류라도 있으신가요?”
그녀가 디저트 종류를 질문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주 잠깐 리프리의 눈빛에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엘로니아 양께서 좋아하시는 것으로 준비하시죠.”
“케이크보다는 쿠키는 어떠세요? 조금 더 담백하답니다.”
“……알고 계셨군요.”
리프리의 물빛 눈동자가 어색하게 엘로니아를 한 번 훑고는 정면을 응시했다.
민망한지 그의 두 볼에 옅게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정령사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그의 취향을 아는 건 전부 카르벨이 정보를 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반응하려나.
이렇게 보면 둘이 얼마나 친했는지를 알 수 있는 듯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리프리는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보지 않은 채, 조금 쑥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어제 저를 두고 나가신 것에 대한 작은 복수라고 여겨주십시오.”
엘로니아의 시야에 새빨개진 그의 귀가 보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속이 좁아 보이는군요. 그저 형님과 둘이 나가셔서 걱정되어 그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