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거짓말을 잘하는 아이
키레일은 말투부터 행동까지 가벼웠다.
팔랑팔랑 흔드는 손과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방긋방긋 웃는 모습까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싶었다.
데드 경은 그의 목을 더욱 꽉 붙들며 거칠게 되물었다.
“허튼소리 하지 마라. 그대로 목이 날아가기 전에.”
매번 호쾌한 인상이었던 모습과 상이하게 달라 놀랍기까지 했다.
질문은 데드 경이 했는데 키레일의 붉은 눈동자가 응시한 곳은 마주 본 카르벨이었다.
‘아니, 카르벨을 보고 있는 게 맞아……?’
엘로니아는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피부에 느껴졌다.
카르벨도 느꼈는지, 몸을 틀어 완벽하게 그녀를 가렸다.
키레일은 익살스럽게 연극을 하듯 물었다.
“펠런 백작 부인에게 받은 소개장, 아니던가?”
“그게 엘로니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되지 못해.”
약을 올리는 듯, 장난을 치는 듯한 유들유들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르벨의 딱딱한 음성이 겹쳐졌다.
그의 뒷모습만 보이는데도 냉랭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키레일은 오히려 눈을 끔뻑이며 순진한 척했다.
만약 아무것도 모른 채 만났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보일 법했다.
이에 데드 경이 험악한 얼굴로 다그쳤다.
“각하께서 묻는 말에 대답해!”
“푸, 푸하하. 아니, 헤일튼가 사람들 재밌다!”
키레일은 갑작스럽게 폭소를 터트렸다.
그가 웃는 덕에 검날에 실금 같은 핏물이 고였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에 눈물까지 고이자 카르벨은 검을 들며 말했다.
“그냥 죽이는 게 빠르겠군.”
철컹, 날이 움직이기 직전. 키레일은 항복하듯 두 손을 들었다.
“아아, 그것참. 성격하고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 웃음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입매는 큰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의식적으로 지은 미소일 뿐이었다.
여태 건성으로 답을 하던 키레일이 되물었다.
“당연히 정령사님께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소개장이 헤일튼 공작님의 것은 아니던데.”
“……장난하지 말고.”
“맞을 텐데?”
키레일의 건방진 답변에 데드 경이 소리쳤다.
“말이 짧다!”
“요?”
겁을 먹기보다 태연하게 덧붙이는 말에 데드 경은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잡고 쓰러질 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도 카르벨은 침착했다.
“소개장에는 소개하는 이만 있을 뿐. 그 대상은 언질조차 없었다.”
이는 엘로니아도 직접 확인한 부분이었다.
소개장에는 펠런 백작 부인의 이름만 있을 뿐.
소개하는 대상에 대한 이름이나 직급 등 어떠한 정보도 기입되어 있지 않았다.
‘나인 건 어떻게 알았지?’
엘로니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래 보여도 마도구를 취급하는데 손님도 못 알아뵈고 장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붉은 시선이 천천히 카르벨에게 닿았다.
저렇게 가벼운 말투인데도 만만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키레일은 활짝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소개장을 역추적하면 얼마든지 알아내거든요. 이걸로 벌어먹고 사는데.”
그는 날이 바짝 선 검을 손으로 톡톡 건드리며 비죽였다.
“그러니 이만 검 치워 주시겠습니까, 각하.”
그러나 카르벨은 되레 딱딱하게 물었다.
“펠런 백작 부인에게 무엇을 팔았지.”
“어, 이래 보여도 손님 정보는 확실하게.”
그는 손으로 제 늘어진 입술선을 따라 그었다.
마치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잠시 그를 노려본 카르벨은 마지못해 검을 거둬들였다.
데드 경은 여전히 못마땅한 듯 키레일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이 정도면 불편할 법도 한데 그는 태연하게 자신의 목에 난 상처를 건성으로 만지며 탄식했다.
“이대로 목이 날아가는 줄 알았네.”
엄살을 부리며 입을 삐죽이는 그에게 카르벨이 물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제가 태어나서 언제 정령사님을 한번 뵙겠습니까. 무려 그렇게나 보기 힘들다는 정령사님이신데!”
“소개장에 언젠가 먼저 들르겠다고 답신한 것도 그저 시간 끌기였군.”
“그게 그렇게 되나?”
거기까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듯 키레일은 제 긴 머리를 가늘고 고운 손가락으로 빙빙 꼬며 되물었다.
묘하게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매번 검을 쥐고 바깥 활동이 잦은 카르벨과 기사들만 보다, 몸 쓰는 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그를 보니 신기하기까지 했다.
호기심 어린 엘로니아의 시선이 때마침 딱, 그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이며 카르벨의 뒤에 있는 그녀를 보려 했다.
“정령사님. 얼굴 한 번만 보여주시죠. 제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거래 대상은 이쪽입니다.”
카르벨은 싱긋 웃으며 단호하게 내쳤다.
그는 언제 검을 겨눴냐는 듯 비즈니스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태도 전환이 소름 끼치게 빨라서 엘로니아도 제 팔을 슥 문지를 정도였다.
키레일이 흥미롭다는 듯이 카르벨의 전신을 훑었다.
그러나 카르벨은 태연하게 엉망이 된 서점 안에서 출입문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안 그래도 할 말이 많은 듯한데. 가시겠습니까?”
“정령사님도 같이 가나?”
“엘로니아는 몸이 약해 저와 함께하시면 되겠군요.”
“어허. 나는 정령사를 소개받았다고?”
“……제가 대리인으로 대신할 겁니다. 그렇지, 엘로니아?”
고집스러운 키레일의 주장에 카르벨이 슬쩍, 몸을 틀어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그늘진 미소에 답은 정해져 있고 그녀는 답만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럼요! 제 약혼자를 통하시면 됩니다!”
“왜?”
키레일은 대뜸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엘로니아가 이해를 못 하고 뜸을 들이자, 그는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여 주었다.
“왜 그래야 하냔 소리야.”
“제가 넘겼으니까요.”
“그게 왜?”
막무가내였다. 이를 눈치 빠르게 알아챈 카르벨은 엘로니아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는 시선은 여전히 키레일을 향해 고정한 채로 친절히 답했다.
“그럼 셋이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 되겠군.”
결국 함께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거 귀한 분들은 간지럽게 이런 곳을 참 좋아하시더라고.”
제도의 번화가는 자신 있다던 키레일이 안내를 맡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걸으면 걸을수록 골목은 더러워졌고, 사람은 줄어들었다.
거기에 시간이 늦어 어둠까지 내려앉으니, 흉흉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귀한 분이 누구인데!’
이쯤 되니 키레일이 대놓고 해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골목에 하나, 둘 불이 들어왔다.
그저 등이 하나 켜진 수준이었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그마저도 희망처럼 느껴졌다.
“여기랍니다. 크, 외관이 죽여주죠?”
“주, 죽여요?”
“그렇죠. 우리 순진한 정령사님은 모르시는구나?”
그는 고개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꼭 하루에 하나씩 실려 나가는 편이죠?”
“왜, 왜요?”
“알면서.”
키레일은 스산하게 웃으며 한 가게의 문고리를 잡았다.
“저, 저……!”
뭐라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는데, 문이 열리자 대뜸 보이는 사람의 덩치가 그녀의 네 배였다.
“아가씨도 들어오십니까?”
고개를 들어 간판을 보니 잡화점이었다.
너무 허름해서 남들이 보면 가게인지 가늠조차 안 될 법했다.
그렇게 번화가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엘로니아는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곳이었다.
‘아니, 무슨 잡화점의 직원 덩치가 저래?’
불안한 기분에 그녀는 카르벨의 옷자락을 붙잡고는 아주 진지하게 제 의견을 전했다.
“잘 들어요, 카르벨. 저는 달리기가 좀 느려요.”
“도망갈 때는 그대를 안고 가면 되겠군.”
매번 자잘하게 반박을 했던 그는 이제 그녀에게 익숙해졌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엘로니아는 불안감에 그의 옷자락을 꽉 쥐고 속삭이듯 외쳤다.
“부탁드려요. 저 두고 가시면 안 돼요, 공작님.”
“걱정하지 마, 엘로니아.”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방이 어두운데도 그의 잘생긴 얼굴은 환하게 보이는 듯했다.
카르벨은 닫히려는 두툼한 문을 붙잡고는 엘로니아를 향해 들어가라는 듯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정 안 되면 그냥 다 베어버리면 돼.”
그의 말에 힘을 실어주는 듯, 데드 경 역시 뒤에서 열심히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이고 있었다.
이런 부분에서 믿음직스러울 줄은 몰랐다.
가게에 들어서자, 기다란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잡화점이라는 간판이 무색하게 판매 가능한 물건이라고는 그림 몇 점이 전부였다.
키레일은 로브를 대충 벗어던지며 콧노래를 섞어 물었다.
“자, 그럼 우리 정령사님이 필요하신 건 무엇이려나?”
그의 말에 근육질의 거대한 남자가 눈을 빛냈다.
“맙소사. 정령사요? 정령사님이시라고요?”
그는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섬세한 손동작으로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앉으십시오, 정령사님. 나중에 나가실 때 저 악수 한 번만 해주십시오.”
“아, 네…….”
부담스러움에 엘로니아가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며 착석했다.
하지만 그녀 몫의 의자를 제외하고는 카르벨과 데드 경이 앉을 곳은 없었다.
“키레일, 미안한데 의자가 부족한 것 같아요.”
“응? 아닌데?”
그는 마주 앉아 턱을 괴고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시커먼 놈들이야 알아서 하라 하고. 나는 소개장을 받은 이에게만 들으면 되는 일이라서.”
대놓고 차별하는 말이었다.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온 카르벨은 엘로니아의 어깨를 잡고 뒤로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괜찮아, 엘로니아. 신경 써 줘서 고맙지만 난 서서 들어도 괜찮으니.”
“그렇다네, 정령사?”
눈동자만 굴려 카르벨을 확인하고는 키레일은 재차 물었다.
“그래서, 우리 가게를 어언 일로 찾으셨을까?”
이유를 모르는 엘로니아를 대신해 카르벨이 답했다.
“최근 펠런 백작 부인에게 판 목걸이. 부인의 주문이던가?”
“아아, 그거. 별거 아니지 않았나?”
“마력이 섞여 있었다.”
엘로니아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어깨에 놓인 카르벨의 두 손이 그녀를 아프지 않게 꾹 눌렀다.
가만히 있으라는 뜻처럼 보였다.
‘처음 듣는 말인데!’
선물이 오자마자 포장지를 뜯었던 사람도 카르벨이었고, 마음대로 가져간 뒤 어느 날 갑자기 돌려준 것도 그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보석을 수집하니 뭐니 했던 자신이 떠오르자 미미한 수치심이 올라왔다.
미리 말을 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고마움도 함께 피어났다.
그것도 모르고 그녀는 태연하게 지냈다.
큼, 목을 가다듬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데, 키레일의 붉은 눈동자가 빤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흠칫, 몸이 떨렸다.
키레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카르벨을 향해 눈이 휘어져라 웃었다.
“왜, 정령사님이 마음에 안 드신대?”
“묻는 질문에 답해 주었으면 하네만.”
“부인의 주문은 아주 별로였어. 예쁘고 강인하고 세련되면서 고풍스럽지만 트렌디한 걸로 골라 보내 달라고 했거든.”
키레일은 제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느리게 넘기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알잖아? 이런 주문이 제일 까다롭거든.”
“그, 그렇죠.”
“마침 손님이 하나 와 계시길래 물었지. 이렇게 주문하면 뭐가 떠오르시겠어요? 그랬더니 그러더라고.”
그는 차갑게 엘로니아를 보며 답했다.
“거짓말을 잘하는 아이에게 어울리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