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소란스러운 인사
‘아셀리 전하인가……?’
뒤늦게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향을 지닌 자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엘로니아가 아는 한, 진한 리아티코 향수를 쓰는 이는 아셀리, 한 명뿐이었다.
그녀 외에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닉스도 낯설어했을 정도면 말 다 했지.’
하지만 번화가에서 사람들이 제국의 유일한 황녀를 못 보고 지나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특히나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금발은 화려함의 극치였던 황실 연회에서도 빛을 발했다.
인파에 숨어 있다고 하더라도 모를 수 없었다.
엘로니아는 몸을 돌려 카르벨을 마주 보았다.
그에게 묻기 위해 입을 벙긋했던 그녀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카르벨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카르벨?”
넌지시 이름을 부르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처럼 입매를 늘려 웃었다.
“꼬치 두 개로는 부족한가.”
“그게 아니라, 방금 리아티…….”
말을 이어가던 중, 옆으로 용병단이 시끄럽게 지나갔다.
카르벨은 자연스럽게 팔로 엘로니아를 감싸 안았다.
이전까지는 한 걸음 정도의 거리를 지키던 그가 바짝 몸을 붙였다.
엘로니아가 놀라서 몸이 뻣뻣하게 굳자, 그는 태연하게 답했다.
“무슨 향?”
“카르벨은 못 느꼈어요?”
“글쎄. 사람이 워낙 많아서.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려준다면 좋겠는데.”
카르벨이 주변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우락부락한 근육과 엘로니아의 몸의 두세 배는 될 법한 다리를 지닌 용병들이 서 있었다.
호랑이인지 뭔지 모를 이상한 가죽까지 어깨에 걸친 그들은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자그마한 토끼를 든 채 귀엽다며 거대하고 두툼한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토끼는 안쓰러울 정도로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엘로니아는 질색하며 답했다.
“제가 착각했나 봐요.”
카르벨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고는 반대로 돌렸다.
“이 근방에 그대가 좋아할 만한 곳이 있어.”
슬그머니 등을 떠미는 힘에 엘로니아는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를 확인한 카르벨의 고개가 아주 짧게 뒤를 향했다.
그의 시선이 닿자, 로브를 쓴 인영은 모른 척 몸을 돌렸다.
‘황실에서 나온 이는 아닌 것 같은데.’
살기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엘로니아나 그를 해칠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닌 듯 보였다.
꾸준히, 그저 곁을 돌아다닐 뿐이었다.
마치 주위를 맴돌며 사냥감을 몰이하는 이처럼.
카르벨이라고 리아티코의 향을 맡지 못한 건 아니었다.
‘지긋지긋한 그 향을 모를 수 있어야지.’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전과 달리 그 향을 지닌 자는 남자였다.
‘남자가 리아티코 향수라…….’
쓰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주로 어린 영식들이 막 사교계에 들어섰을 때, 자신이 맘에 둔 어린 영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쓰는 용도였다.
‘그리 어려 보이지는 않았는데. 20대 중반?’
체격으로 보나, 골격으로 보나 그 이하라고 보기 어려웠다.
로브를 걸친 탓에 변수는 있을 수 있겠지만.
상념에 빠져 침묵하고 있을 때, 앞서 걸어가던 엘로니아가 밝게 말을 건넸다.
“이따가 광장에서 공연을 한대요. 그거 보러 가요.”
도망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는 들뜬 모습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채 숨기지 못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매번 퇴근 시간이랑 겹쳐서 제대로 못 봤거든요. 괜찮죠?”
“얼마든지.”
카르벨은 느긋하게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데드가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리면 슬쩍, 그라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
번화가에 위치한 작은 서점에는 중고 서적부터 언제 출간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오래된 책들이 가득했다.
“이 책만 읽으면 날아가던 새도 아가씨를 보고 아름답다고 내려앉을 정도로 변할 수 있다니까요, 아가씨. 딱 한 번만 믿어 봐.”
서점 주인이 그녀에게 책을 내밀었다.
<남녀노소를 홀리게 만드는 생활 마법>이라고 적힌 책은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엘로니아는 가늘어진 눈으로 겉표지에 번들거리는 글자를 훑으며 되물었다.
“이거 말고 정령이라든가, 그런 책은 없나요?”
“아, 정령도 있지. 무려 읽은 후 3일 만에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는 전설의 책!”
“정말 확실해요?”
“그럼!”
서점 주인이 그녀에게 책을 건넸다.
대충 건성으로 훑어보니 알 수 없는 이상한 용어도 종종 쓰여 있었다.
엘로니아가 호기심을 보이자 주인은 두 손을 비비며 설명을 더했다.
“딱 두 권인데, 한 권은 최근에 새로 탄생하셨다는 정령사님이 사가셨다고! 그 남은 한 권을 아가씨가 얻을 수 있겠어!”
엘로니아는 처음 듣는 말에 눈을 끔뻑였다.
‘나는 산 적이 없는데?’
현재 정령사라고 알려진 이는 그녀 하나였다.
급격하게 떨어진 신뢰도에 엘로니아의 얼굴이 서서히 차게 식어갔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불쑥 손 하나가 들어왔다.
“두 권치고 인쇄 부수가 꽤 되는군.”
팔랑, 종이를 넘긴 카르벨이 혼잣말인 것처럼 중얼거렸다.
이에 서점 주인은 눈을 굴리다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하, 다른 책이던가?”
급기야 서점 주인은 청소를 깜빡했다며 복잡한 가게 안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미 발 디딜 곳도 없이 복잡한 곳에서 청소라니.
“어떻게 거짓말을 해도 이런 걸…….”
“원래 모르는 이들이 더 말도 안 되는 내용에 관심 갖기 마련이거든.”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책을 받아 갔다.
제법 진지하게 책을 읽는 그를 보며 엘로니아는 입을 삐죽였다.
“이상한 언어만 잔뜩 쓰여 있던데. 읽을 줄 알아요?”
“엉터리 마법 수식이야. 허술하다 못해 아무거나 갖다 붙인 수준이야.”
“마법 수식을 읽을 줄 알아요?”
마법사가 워낙 귀한 제국인 만큼, 마법 수식을 읽을 줄 아는 이도 드물었다.
엘로니아가 태어나서 처음 본 마법사가 리프리일 정도니 말이다.
라티에 왕국은 왕족 모두가 적당한 마력을 타고났는데, 가끔씩 리프리와 같은 뛰어난 인재가 나오기도 했다.
놀란 엘로니아의 말에 그는 태연히 답했다.
“어머니가 왕국 출신이라 관련된 책을 좀 읽었어.”
“설마…….”
라티에 왕가를 떠올려 보자니 그도 마력을 가지고 태어났나 싶었다.
그녀의 뒷말을 알아챈 카르벨은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으며 단호히 답했다.
“아니. 나는 아니니 기대하지 말게.”
“누가 기대했다고 그래요.”
엘로니아는 괜히 민망해 목을 가다듬었다.
카르벨은 꼬질꼬질한 책장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직 볼 게 더 남았나?”
“으음. 조금만요.”
헤일튼 공작저에 있는 책들은 전부 훌륭했다.
너무 훌륭해서 재미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딱 카르벨답게 검증을 거친 것들만 들여두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허황하더라도 단순한 즐거움을 위한 책들이 읽고 싶은 법이다.
엘로니아는 바닥에 쌓인 책들을 넘어 좁은 책장 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구불구불 기다란 책장은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엘로니아가 책 하나를 꺼내려고 발꿈치를 드는 순간.
“무엇을 찾으십니까, 고객님?”
“어우, 깜짝이야.”
로브를 쓴 남자가 옆에서 물어왔다.
누가 다가온다거나, 옆에 있다는 느낌조차 없었지만 고개를 돌리니 그가 있었다.
엘로니아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되물었다.
“지, 직원이세요?”
“뭐, 비슷하려나요? 다들 주인이라고 부르기는 합니다.”
“아, 아까 그분이 주인이신 줄 알았는데. 제가 오해했나 보네요.”
엘로니아는 번들거리던 얼굴로 영업을 하던 남자를 떠올리고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하니 제 직원을 괴롭혔다고 직접 나온 건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직원의 잘못이었다.
거짓말로 속여 상품을 판매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직원을 혼내기보다 대신 나서는 주인은 처음이라 생소한 느낌도 들었다.
엘로니아는 로브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서점은 되게 오래된 것처럼 보였는데, 주인은 젊네.’
기껏해야 20대 중반?
미성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로브 틈으로 길게 흐트러지듯 흘러내리는 결 좋은 보랏빛 머릿결까지.
잘 보이지는 않으나, 볼에 찍힌 점과 벌어진 로브 틈으로 보이는 유독 하얀 피부는 햇볕조차 제대로 쬐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훌쩍 큰 키가 호리호리한 그의 체형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남자는 히죽, 웃으며 즐거운 듯 되물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하셨습니까?”
“딱히 뭘 정하고 온 건 아니고요. 그냥 보고 괜찮은 게 있으면 구매하려고요.”
“아, 안타깝지만 저희는 구매 전에 보는 건 불가능하답니다.”
헉, 순간적으로 엘로니아는 숨을 삼켰다.
하도 책이 산처럼 바닥에 쌓여 있고, 손때가 묻은 것도 많아 당연히 봐도 되는 줄 알았다.
직원조차도 제게 펼쳐서 보여주었으니 더욱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어쩐지, 주인이 나왔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엘로니아는 여태껏 펼쳐 보았던 책들을 떠올리며 미안한 듯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제가 그런 줄 모르고…….”
“아뇨. 레이디라면 제가 만나 뵙고 싶었으니까요.”
그가 고개를 숙이자 보랏빛 머리칼이 찰랑이듯 흔들렸다.
순간, 리아티코의 독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방금까지 전혀 못 느끼고 있었는데……?’
향수라면 보통 뿌린 이에게서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방금 맡은 리아티코 향은 마치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듯했다.
그가 의지대로 거둬들인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만나고 싶었다고?’
엘로니아가 고개를 들어 로브 속 남자의 얼굴과 마주하기 직전.
남자가 작게 속삭였다.
“아쉽네.”
순간 그녀의 어깨가 뒤로 훅 끌어 당겨졌다.
커다란 품이 엘로니아를 감쌌다.
“괜찮은가.”
“카르벨?”
“누군가 마법을 걸어놓은 탓에 깨는 데 시간이 걸렸어.”
그의 손에는 언제 뽑았는지 모를 예리한 검이 들려 있었다.
카르벨은 그녀를 뒤로 숨겼다.
코끝에 독하게 맺혀 있던 리아티코 향도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이윽고 로브를 쓴 남자의 여유로운 음성이 들렸다.
“이거 너무하네. 초면에 검부터 들이대고 말이야.”
엘로니아가 카르벨의 널따란 등에서 간신히 고개를 빼내자 제일 먼저 데드 경의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로브를 쓴 남자의 목에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호위라더니, 주변에 있었기는 한 모양이었다.
양옆의 책장이 만든 좁은 길목.
그 길목에 카르벨과 데드가 남자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검을 겨누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로브를 쓴 남자는 전혀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카르벨은 차갑게 물었다.
“신상을 밝혀라.”
“거 검 좀 놓고 얘기합시다? 이쪽은 무기랄 게 아무것도 없는데.”
항복하듯 두 손을 든 남자의 말에 카르벨은 대답 대신 그의 목에 더욱 가까이 검을 들이댔다.
꾹 눌린 살이 조금만 움직이면 베여 피를 뿜어낼 것 같았다.
카르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데드는 그의 로브를 벗겼다.
그러자 퍽 고운 외모의 남자가 즐거운 듯 웃으며 들었던 두 손을 흔들었다.
“이거 원, 소개장을 받고 직접 가겠다고 답까지 드렸는데 말입니다, 헤일튼 공작 각하?”
그는 두 눈이 접히게 환히 웃으며 인사했다.
“마법 상단주, 키레일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