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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43화 (143/234)

36. 새로운 호위

카르벨과 가까운 거리에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내었다.

그는 손 틈으로 흐르듯 빠져나가는 주황빛 머리카락을 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최근 사랑스러운 약혼녀의 대외 활동도 늘었으니까, 적기인 듯싶어.”

“저는 정령이랑 놀아주다 일주일 정도 몸져누웠다고 하면 안 될까요?”

“될 것 같아?”

“아뇨…….”

엘로니아의 빠른 답에 그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보여주기 좋을 때야. 리프리 저하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이렇게 저택에 두고 가도 괜찮을까요? 동행하자 하시면 어쩌시려고…….”

“핑계가 없을걸.”

“그래도 제국까지 오셨는데, 관광 안내라든가, 핑계야 찾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잖아요.”

“그럴 정도로 눈치 없는 이로 보였나?”

그렇지는 않았다.

대화하면 할수록 리프리는 요령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었다.

정해진 답이 있으면 딱 그것만 바라보는 이였다.

더불어 카르벨을 믿지 않는다는 것도.

리프리가 그녀에게 자기주장을 밀어붙이는 것은 아니었다.

조심스럽지만 올곧고 확고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만약 엘로니아가 정말 카르벨의 가식에 속아 약혼했다면, 아마도 리프리에게 크게 감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순진한 이유가 아니었다는 게 문제지.’

그녀는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을 속였다는 생각에 양심이 아파서 슬그머니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이 모든 행동을 카르벨은 그저 신기한 듯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샐쭉한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자 카르벨은 싱긋 눈이 접히게 웃었다.

엘로니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게 다 그쪽이 리프리 저하에게 신뢰가 없어서 생긴 일 아니야.’

정작 제 앞에 있는 남자는 오해가 익숙한 것인지, 그냥 성격대로 무시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전에 연무장이라 그러셨죠?”

“그래.”

어차피 그녀가 낼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알았어요. 날 밝자마자 갈게요.”

“의외네. 빈말로라도 한 번은 거절할 거라 예상했는데.”

“누가 들으면 제가 다 싫다고 하는 줄 알겠어요.”

흐음. 길게 입매를 늘린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권유마다 자잘하게 말을 얹었던 그녀를 되돌아보는 모양이었다.

그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기 전, 엘로니아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약속했으니까요. 일단은…….”

리프리가 의심해서 좋을 것 없으니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의무적인 답에 방 안에는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대화가 줄어드니 자연스럽게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엘로니아의 눈꺼풀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처럼 감겨들었다.

‘지금 졸면 안 되는데.’

온종일 리프리가 지켜보고 있는 탓에 실상 대화를 나눌 시간이라고는 지금뿐이었다.

간신히 의지로 버티고 있는 엘로니아의 이마에 톡, 가벼운 손길이 스쳤다.

“푹 쉬게.”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엘로니아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

“오셨습니까, 마님!”

엘로니아가 연무장에 들어서자, 저택 내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과하게 격식을 차리는 모습에 그녀는 적당히 편안한 답을 돌려주었다.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오랜만이에요.”

“이번에는 마님께 생길 어떠한 문제에도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제가 직접 호위하겠습니다!”

“마음은 고마워요. 하지만 연무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는 않네요.”

“아닙니다. 당분간 주군께서 마님을 호위하라 했습니다!”

“당분간이요?”

“예. 함께 외출하신다 들었기에 만반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바짝 기합이 든 채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언젠가 호위를 따로 붙여준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게 데드일 줄은 몰랐다.

사전에 연락이라도 받았는지 데드는 정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가벼운 복장으로 연무하는 이들과 확연히 달랐다.

옆에서 지켜보던 닉스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구시렁거렸다.

[연무장에서 일이 있어봤자 뭐가 있다고.]

그는 딱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데드를 보며 삿대질을 했다.

[내가 있는데 뭐가 문제야!]

‘그게 문제야…….’

닉스는 자신을 못 믿어 호위를 붙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때문에 데드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덩치는 왜 이렇게 커? 넘어지면서 봐도 호위인 거 온 세상이 다 알겠네.]

그는 엘로니아의 어깨에 딱 붙어서는 눈에 힘을 주며 연무장 내부를 전부 꼬투리 잡았다.

특히 연무장은 닉스의 단골 트집 대상이었다.

[어느 놈이 연무장 주변에 이렇게 나무를 심어둬?]

엘로니아는 그가 가리키는 주변을 훑었다.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다시피 하던 곳에 최근에 옮겨 심은 듯한 나무들이 한 군데에 집중적으로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실제로 목검이 부러지던 날 이후로 한 번도 들른 적 없었던 연무장은 꽤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특히 황량하게 앉을 의자 하나 제대로 없었던 곳에는 누가 보아도 새로 만들어 둔 듯한 화려한 소파가 놓여 있었다.

심지어 빛을 받으면 반들반들한 금빛 틀이 번쩍였다.

‘대체 연무장에 누가 이런 고급 가죽 소파를…….’

심지어 대부분 흙바닥인데 딱 소파 주변만 누군가 잔디를 깔아둔 것처럼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자라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가 햇볕까지 가려 주니 꼭 숲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 것 같았다.

텅 빈 주변과는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닉스도 똑같이 느꼈는지, 한소리를 얹었다.

[초상화 그릴 때 배경으로 쓰라는 거야, 뭐야?]

그녀가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자, 데드가 먼저 선뜻 말을 건넸다.

“마님 전용 자리입니다.”

“저요? 제 자리라고요?”

“예!”

엘로니아가 질색하며 바라만 보고 있자, 데드는 쑥스럽다는 듯이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설명했다.

“이 장소가 연무장 내부가 전부 보이는 곳입니다. 경관이 아주 좋습니다!”

그게 쑥스러운 거야?

왜 아무도 이 비싸 보이는 가죽 소파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 걸까.

역시 그녀 혼자만의 생각인지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앉으십시오, 마님.”

그는 두 손으로 정중하게 소파를 가리켰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었다.

그러자 많은 기사들이 재빠르게 시선을 돌리거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몸을 푸는 등 어색하게 모른 척했다.

‘다들 내가 앉기를 기대하고 있어…….’

데드부터 잔뜩 부담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처음부터 그녀의 자리는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이 많은 이들 앞에서 이곳에 앉아 있어야 한다니.

‘차라리 공작님보고 방으로 찾아오라고…….’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데드가 말을 덧붙였다.

“주군께서 불편하지 않게 모시라고 했습니다.”

“아, 예…….”

“보석과 금을 좋아하신다고 하여 가장 화려한 것으로 골랐는데,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네요…….”

금은보화는 은밀하게 주머니에 찔러줄 때나 좋은 것이지, 이렇게 대놓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좋은 게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카르벨이 준 이상, 그녀가 거절할 명목이 없었다.

그녀가 애써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데드는 뿌듯한 기색이 만연한 얼굴로 감격에 차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마님께서 큰일이 날 뻔한 이후로 안전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의 말대로 연무장 내부가 훤히 다 보였다.

정작 연무를 하는 곳과 꽤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도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뙤약볕이 그대로 내리쬐는데도 그녀가 있는 곳은 시원하다 못해 서늘할 정도였다.

[과보호야, 흥.]

이번만큼은 닉스의 말이 옳았다.

이렇게까지 연무를 본격적으로 구경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카르벨이 오전에 나오라고 해서 나왔을 뿐인데.

정작 그는 어디에 있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데드 경, 혹시 카르벨은 아직인가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가 먼저 운을 떼자, 데드는 곤란한 듯 답했다.

“마님께서도 모르십니까? 안 그래도 말입니다, 주군께서 매일 새벽같이 보좌관님과 함께 나가시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일찍이요?”

“예! 어딜 그리 가시는 것인지 저도 참 답답할 지경입니다.”

펠런 백작 부인에게서 받은 소개장 때문은 아닌 듯한데.

데드 경의 울분이 터지기 직전. 때마침 카르벨이 많은 기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걸어 들어왔다.

멀리서도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툭 튀어나온 그가 보였다.

데드 경의 말대로 그레이터와 함께 들어온 그는 베스트까지 갖춰 입은 상태였다.

연무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복색이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던 카르벨은 그녀가 있는 곳을 확인하고는 보란 듯 웃으며 까닥, 고갯짓을 했다.

방금까지 그녀에게 서러움을 토로하던 데드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뻣뻣하게 굴었다.

일부러 엘로니아를 향해 쓸데없는 설명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오늘은 짧게 보고 가신다고 하셨으니 여, 연무장에 오래 계시지는 않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 기사들 틈에서 그는 무어라 말을 전했다.

그가 말을 할 때면 단체로 ‘예, 각하!’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엘로니아는 거드름 피우는 이가 한 명도 없는 기사들을 보며 신기한 듯 되물었다.

“다들 부지런하네요. 매일 이렇게 하는 건가요?”

“예. 눈이나 비가 와도 일정은 변하지 않는 편입니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조금 쉬어도 될 텐데.”

“전쟁은 날씨를 가리지 않으니까요.”

제법 묵직한 데드의 답에 엘로니아는 자신이 얼마나 가볍게 생각했는지를 깨달았다.

단순히 매번 일찍부터 움직이는 그가 신기해서 물은 말이었다.

엘로니아도 퍽 부지런히 살았다지만 카르벨은 한 번도 자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어제도 나보다 늦게까지 깨어 있었고.’

심지어 졸린 기색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아침에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있으니까. 그래서 툭 던진 말이었다.

누가 질책한 것도 아닌데 엘로니아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고통스러워 카르벨을 욕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런 그녀에게 익숙한 음성이 질문을 건넸다.

“많이 기다렸나.”

“아뇨! 별로 안 기다렸습니다!”

지레 찔린 엘로니아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갑작스러운 큰 목소리에 카르벨은 놀란 듯했으나 능숙하게 미소로 표정을 가렸다.

“연무장까지 오게 해서 피곤한가 했어. 아침에 잘 못일어나지 않던가.”

“카르벨이 과하게 일찍 일어나는 거예요.”

“비몽사몽한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말이지.”

엘로니아의 곁에 뻣뻣하게 서 있던 데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카르벨의 입에서 나온 말이 꼭 같은 방을 쓰는 사람에게 할 법한 말처럼 들렸다.

‘에이, 설마. 주군이…….’

더군다나 예비 마님이 입을 꾹 다물기까지!

그러나 막상 눈이 마주친 카르벨은 형형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등골이 서늘해진 그는 빠르게 자신의 잘못을 곱씹었다.

호위, 이상 무. 예비 마님도 다친 곳 없고, 예비 마님을 모실 안락한 장소도 마련했고. 실수로 속마음이랑 내뱉는 말을 바꿔 말한 적도 없다.

분명 이상한 게 하나 없는데 이 찝찝한 기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어진 카르벨의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연무장으로 부른 건 그대 곁에 붙일 호위 때문이었네.”

“굳이 거추장스럽게…….”

“예비 공작 부인이 혼자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으니.”

카르벨은 엘로니아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데드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데드 경은 어떠한가.”

“으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꿔주겠네.”

데드는 깨달았다.

안락한 장소와 말실수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바로 예비 마님의 허락이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작 엘로니아는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닉스는 금방이라도 카르벨을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눈에 힘을 주고 항의했다.

그녀의 목덜미 뒤로 슬금슬금 숨기까지 했으나, 정작 들어야 할 카르벨은 닉스의 안타까운 외침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카르벨을 조금 무서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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