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초조함의 원인
“결단력도 있고, 너그러운 면도 있어요. 제게 공작령에 있는 나무도 그냥 주셨거든요.”
“…….”
“키, 키도 크고 체격도 나름…….”
“…….”
“객관적으로 외형도 나쁘지 않아요. 성격도 함께 있으면 너그러워질 수 있고…….”
“…….”
“머릿결도 좋은 것 같고?”
“…….”
“누, 눈매가 범죄자 잘 잡게 생겼다!”
더 이상 쥐어짤 칭찬이 없어 파헤칠 대로 파헤친 답이었다.
‘이게 무슨 칭찬이야!’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말을 뱉었을 때.
앞에서 풋, 웃음이 터졌다.
고개를 들자, 리프리가 바들바들 떨며 주먹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간신히 웃음을 참는 모양새였다.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충분히 알 것 같네요.”
이거 설마 욕으로 들려서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기뻐할 수 없다.
리프리가 다시 고개를 들자 언제 웃었냐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아직 채 가시지 못한 즐거움이 여실히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범죄자라…….”
그는 그 부분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인지 곱씹기까지 했다.
역시 험담이라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카르벨의 귀에 들어가면 무어라 할지 벌써 암담했다.
이를 알 리 없는 리프리는 큼,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차분히 되물었다.
“정령사라 하셨죠?”
“네. 미리 말씀드리지만 성인 한 명의 과거를 전부 보기에는 저도 정령도 한가한 편은 아니랍니다!”
나중에 괜히 카르벨이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갈까 싶어 엘로니아는 빠르게 제 살 구멍을 만들었다.
‘황실에서도 인정하는 편이고, 펠런 백작을 연행한 것도 범죄자 연행이니까. 그래서 한 말이지.’
그녀의 답이 아쉬웠는지 눈에 띄게 화색이 돋았던 리프리의 얼굴이 차분해졌다.
아무래도 더 말해서 리프리와 카르벨, 두 사람에게 좋을 게 없어 보였다.
어차피 서로 남의 이야기는 듣기 싫을 터.
엘로니아는 대화에서 카르벨의 이야기는 최대한 덜어내기로 했다.
그편이 리프리가 돌아간 뒤, 그녀의 심신 안정에 좋을 듯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엘로니아는 빠르게 대화 주제를 바꿔버렸다.
“전대 공작 부인께서 아주 아름다우시던데 저하께서도 똑 닮으셨네요.”
“아닙니다. 고모님은 왕국에서 연회가 열리면 제국에서도 고모님을 보러 참석할 정도였다 들었습니다.”
“저하도 그러하시던데요?”
“무슨…….”
엘로니아는 황실에서 열렸던 연회에서 아셀리의 손을 잡고 오던 그를 떠올렸다.
제국에서 칭송받는 이의 옆에서도 전혀 묻히지 않았던 리프리였다.
오히려 두 사람이 있으니 범접하기 어렵기까지 했다.
유순한 듯한 리프리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볼수록 카르벨과 참 닮은 점이 없다.
‘리프리 저하도 그렇고, 왕국 쪽은 전부 부드러운 인상인가?’
너무 대놓고 바라봤는지, 리프리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냥 넘어가면 어색할까 싶어 엘로니아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저하도 연회 때 무척 아름다우셨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레이디께서도 춤을 그리 잘 추시는 줄 몰랐습니다.”
“정말요?”
카르벨이 그렇게 놀렸는데!
그녀가 반색하자 리프리는 고개를 비장하게 끄덕였다.
역시 카르벨이 또 인정하기 싫어서 트집을 잡은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닉스의 훈수와 춤 교습을 맡은 멜튼 양의 어지러운 농담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배웠는데!
유일하게 자신이 없던 부분인지라 남다르게 기뻤다.
“감사해요. 연회 때 다음 춤을 권유라도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파트너가 첫 춤 이후로 움직이질 않으셔서요. 아니었다면…….”
큼.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은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함께 하시겠습니까.”
“물론이죠.”
그의 답에 허공에서 스르륵, 닉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뻔뻔스럽게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나 불렀냐?]
가만 보면 닉스도 자존감이 참 높다.
그녀가 답이 없자, 닉스는 허공에서 자랑스럽게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내 춤이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나는 네 그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에 말문이 막히는구나.
그를 무시하고자 했으나, 진정으로 자신의 칭찬이라고 생각했는지 닉스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너도 나를 인정하는구나. 난 이렇게 될 줄 다 알고 있었어.]
그의 자그마한 손이 툭, 엘로니아의 이마를 건드렸다.
또다시 과거가 머리로 흘러들어왔다.
헤일튼 공작저는 지금과 달리 침울했다.
그곳에는 익숙한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지금보다 조금 앳된 얼굴의 리프리와 카르벨이 보였다.
골격이 잡힌 체격은 지금보다는 아니지만 제법 균형이 잡혀있었다.
갓 성인식을 치른 걸까.
지금까지 온통 하얀 옷을 입은 모습만 보았는데, 과거의 리프리는 반대였다.
리프리가 입고 있는 검은 제복에는 왕실 문양이 수 놓여 있었다.
분위기가 살벌했다.
어차피 지나간 과거라 그들에게 그녀 모습이 보일 일도 아닌데 괜히 숨을 참을 정도였다.
리프리는 살벌하게 카르벨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형님, 사고로 돌아가신 게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빈민촌에 가실 이유가 없잖습니까.’
‘간간이 배고픈 이들을 챙기셨습니다.’
‘그렇다면 가문의 마차를 타고 가셨겠죠. 숨길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저 운이 좋지 못했을 뿐입니다.’
리프리의 두 손이 꽉 쥐어졌다.
‘혹시…….’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찰나, 그레이터가 카르벨을 불렀다.
‘공자님. 장례식은 진행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지.’
덕분에 열렸던 리프리의 입은 다시 닫혔다.
장례식이라는 말에 그들의 온통 검은 복색이 이해되었다.
과거는 다시 희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사이가 틀어진 게, 전대 공작님의 사고 때문인가?’
카르벨은 사고라고 주장했으나, 리프리는 아니라고 믿는 듯했다.
엘로니아도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두 사람이 이상하다 여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카르벨이 숨길 이유도 없는걸?’
오히려 그는 일찍이 가문을 승계받아 힘든 점이 더 많았다.
기반을 닦을 틈도 없이 작위를 받았기에 그의 초반 업적은 가히 인간인가 싶을 정도였다.
‘카르벨이 아무리 인성이 의심되어도 막 죽일 그런 사람…….’
문득 메티카에서 죽이겠다고 말을 하던 그가 떠올랐다.
‘……인가……?’
막상 말만 그렇게 할 뿐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리프리를 빤히 직시했다.
그러자 그는 다 식은 찻잔을 들었다.
고개를 숙인 리프리의 귀가 천천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런 그는 조용히 말을 건넬 뿐이었다.
“기대됩니다.”
“제 춤이 그 정도였나요?”
엘로니아의 고개가 반대로 기울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그의 물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것도 포함해서요. 제가 말씀드렸던 것. 잊지 마십시오.”
여전히 붉은 기가 감도는 귀를 한 채 그는 단호히 말했다.
“제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부탁하셔도 됩니다.”
***
카르벨은 집무실 책상에 걸터앉은 채 팔짱을 꼈다.
평소라면 앉았을 테지만 그리 오래 있을 장소가 아니라 판단했다.
그레이터는 정중히 보고를 올렸다.
“일단 펠런 백작 부인께서 보내 주신 소개장을 전했습니다.”
“그쪽에서 다른 반응은 없고?”
“상단 측에서 빠른 시일 내에 저택으로 사람을 보내겠다 합니다.”
“대체 무슨 상단이길래 그리 철저한 것이지.”
“소문에는 흑마법을 연구하는 이라고 합니다. 연구비를 충당하기 위해 물건을 내다 판다고 합니다만…….”
“목걸이에서 그런 낌새는 없었다.”
“예. 하지만 상단주가 일반적인 물품을 판매하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이렇게 암암리에 이뤄질 거래라면 좋은 물건만 있지는 않을 터.
그랬다면 진즉 수면 위로 떠올랐어야 했는데, 아직까지 그런 소문은 듣지 못했다.
카르벨은 고개를 까닥이며 물었다.
“마차 쪽은.”
“마부의 딸을 수소문했습니다만,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죽었다고?”
“예. 전대 공작님께서 마차 전복으로 돌아가시고 1년 뒤 사망하였습니다.”
“원인은.”
“아는 이들은 병이라고 하는데, 워낙 가난하게 살았던지라 의원 한 번 못 찾아간 이라서요.”
“알 수 없다는 뜻이군.”
그의 답에 그레이터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전대 공작 부부의 사망은 마차 사고였다.
외출을 하던 그들이 저택에 버젓이 있는 마차를 두고 외부에서 마차를 빌렸다.
‘공작가에서 나왔다는 걸 숨기고 싶었다는 건데.’
그리고 그날. 전복된 마차는 마부와 그의 부모를 앗아갔다.
그저 사고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카르벨은 아니라고 여겼다.
마부의 딸이 1년 뒤 세상을 떠난 것만 보아도 이질적이었다.
생각을 이어가던 카르벨은 작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이 원인을 알고 있었다.
‘엘로니아에게 허튼소리를 하지는 않겠지.’
리프리가 저택에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왕래가 잦아 그리 나쁜 관계는 아니었으나 마차 사고가 일어난 뒤.
리프리는 이 모든 원인이 그에게 있다고 여겼다.
‘웃기지도 않는군.’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친했기 때문에, 더 잘 아는 사이라 더.
리프리는 공과 사가 명확했다.
기준에서 벗어난 악행은 가족이라도 용서하지 않았고, 그 기준대로 처리했다.
요행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리프리였다.
‘내가 적자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가문까지 다른 친척들에게 넘길 놈이야.’
적자가 아니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사고 덕에 어떠한 유언도 남기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과연 마차 사고를 주도한 사람이 그가 아니라고 믿을 수 있을까?
대부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믿을 만한 것들만 보여 주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날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가 한둘이어야지.’
앞에서는 그를 숭배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이다.
그가 약해진다면 뒤에 칼을 꽂을 이는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카르벨은 전대 공작 부부에게 어떠한 억하심정도 없었다.
그가 정말 적자가 아니라도 그들은 티 한번 내지 않았다.
오히려 헤일튼 공작은 손수 그에게 검을 쥐어 가르칠 정도였다.
엄하기는 했어도, 그는 어릴 적부터 검술에 두각을 드러내는 카르벨에게 늘 말했다.
‘카르벨. 네가 나중에 네 한 몸을 지키려면 강해져야 한다.’
전대 공작의 엄격한 교육 덕분에 그는 지금 가문도 자신도 지키고 있었다.
‘엘로니아에게 하는 꼴을 보아하니, 내가 성격을 숨기고 데려왔다고 믿는 모양인데.’
어차피 엘로니아는 그의 민낯을 안다.
그녀는 의외로 강단도 있고, 자기주장도 명확하며 약속도 곧잘 지키는 편이었다.
가끔 좀 엉뚱하게 구는 게 문제지만, 그 정도는 귀엽게 넘어갈 수 있다.
‘이것도 내가 헤일튼 공작일 때 이야기이지.’
권력으로 눌러 데려온 만큼, 권력이 사라지면 끝은 뻔했다.
지금도 제 할 말을 은근히 다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사실은 헤일튼 공작의 적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리프리에게 듣게 된다면, 엘로니아는 분명 파혼을 요구할 것이다.
더는 가짜 정령사인 척을 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언제 내쳐질지 모르는 권력을 쥔 이에게 겁을 먹을 성격이 아니지.’
엘로니아는 신분이 상관없다고 하지만, 그건 입에 바른 소리일 뿐이다.
대부분은 그렇게 말한다. 그게 교양이고, 매너며, 배려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리프리, 그놈이 허튼소리를 하기 전에 돌아가야 해.’
카르벨은 아직 가짜 정령사가 필요했다.
그는 헤일튼이라는 성을 지키고 싶었다.
이런 와중에 리프리가 아셀리와 국교를 통해 종종 만남까지 가지니 카르벨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다.
이 초조함의 원인은 단순히 리프리가 그에 대해 폭로할 것 같아서.
그래서 생긴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