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믿습니까!
“마치 저하께서 머물고 가는 일이 확정이라는 투로 들리는군.”
“이렇게 내치는 쪽이 더 의심되지 않겠어요?”
엘로니아라고 보는 눈이 늘어나는데 좋을 리 없었다.
그러나 카르벨은 되레 뻔뻔하게 리프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치 배웅을 나온 사람처럼 돌아가라는 듯이 행동하며 그가 말을 덧붙였다.
“글쎄. 오히려 그편이 자연스러울걸.”
“무슨…….”
엘로니아는 마차 행렬 중 인사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안색 하나 바뀌지 않는 리프리의 반응을 보아하니, 평소에도 종종 이렇게 행동한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르벨의 이어진 말이 가설을 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한 번도 저하를 환영한 적이 없거든.”
그러시구나…….
자랑스럽게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어차피 이렇게 내쳐도 눌어붙을 텐데.”
평소 카르벨이 누군가를 좋게 표현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거절하는 일이 잦은 이도 아니었다.
대부분은 싫어도 내색하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간만에 사람다운 모습에 의외라는 듯 답했다.
“그럼 저하께서 에스피디에 오실 때는 늘 그러셨나요?”
“대부분.”
리프리 저하가 그렇게 고집스럽고 막나가는 인상은 아니었는데.
엘로니아는 여전히 꼿꼿한 모습으로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는 리프리를 훑었다.
단순히 묵기 위해서라면 황실에서도 얼마든지 방을 내어줬을 것이다.
애초에 마법으로도 간단히 이동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굳이 이렇게 싫다는 사람 곁에 와서 묵을 이유는 또 무어란 말인가.
‘뭐 걸리는 게 있나.’
엘로니아는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리프리의 푸른 눈동자와 아주 잠시 마주쳤다.
의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듯 투명해 보이는 눈은 그저 엘로니아를 응시할 뿐이었다.
***
“들었습니다. 펠런 백작께서 최근 원로회에 넘겨졌다면서요.”
리프리의 질문에 태연하게 찻잔을 들던 엘로니아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뜨끔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그의 귀까지 들어간 것을 보면 정말 퍼질 만큼 퍼진 모양이다.
이에 카르벨은 당황한 기색 없이 친절히 답했다.
“예. 아무래도 죄질이 나쁘니 원로회에서 잘 해결해 주실 겁니다.”
펠런 백작과 에릴 후작 영애의 작위 박탈에 대한 논의였다.
이는 카르벨이 안건으로 올렸으며, 폐하의 승인이 떨어지면 가주들의 허락이 필요했다.
증거가 워낙 뚜렷한 데다 그가 이혼한 전처의 가문도 퍽 많은 터라 실상 형은 확정이었다.
카르벨도 확정 전부터 엘로니아에게 확고히 답을 건네줄 정도였다.
‘작위를 빼앗기면 평생 평민일 테니까.’
그렇게 펠런 백작 부인을 보고 무시하더니,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의 틈으로 리프리의 말이 끼어들었다.
“형님답지 않게 시끄럽게 해결하셨군요.”
“그렇게 보이셨다니 유감입니다.”
“평소 남의 일에 큰 관심 없지 않으십니까.”
“엘로니아가 다칠 수도 있었으니까요.”
카르벨의 다정한 손길이 엘로니아의 어깨를 가벼이 감쌌다.
곧 리프리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쿨럭, 순간적으로 사레에 걸린 엘로니아가 힘겹게 기침을 삼켰다.
잘못 삼켰는지 멈추지 않았다.
힘겹게 가슴을 부여잡자, 카르벨은 익숙하게 안주머니로 손을 넣어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나 엘로니아에게 전해지지는 못했다.
다름이 아닌 엘로니아가 손수 수를 놓은 손수건이기 때문이었다.
“그, 그거. 콜록.”
손수건은 뻣뻣해서 그의 손에 들린 지금 이 순간에도 곧은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설마 저걸 내게…….’
이걸 이렇게 돌려받게 되는 건가!
저대로 입에 뭉갰다가는 입술이 전부 까질 것이다.
이미 저 손수건은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굳이 용도를 부여하자면, 아마도 그릇을 닦는데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엘로니아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잠깐 멈칫 한 그의 앞으로 리프리의 하얀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쓰시죠, 형님.”
“감사합니다, 저하.”
카르벨은 그의 손수건을 받아 엘로니아에게 건넸다.
대신 그녀가 손수 수를 놓은 것은 다시 그의 안주머니로 사라졌다.
간신히 기침을 멈춘 엘로니아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콜록. 그 손수건 아직도 갖고 다니셨어요?”
어디 있는지 존재조차 모를 줄 알았다.
손수건의 용도로 쓰이기도 애매한 데다, 굳이 보여서 자랑할 일도 없지 않은가.
미세하게 남은 잔기침에 그는 가볍게 등을 쓸어 내려주며 말했다.
“그대가 준 손수건인데 당연.”
“그것참……. 영광이네요.”
말투를 보아하니 앞에 있는 리프리를 의식한 게 분명했다.
엘로니아도 모를 수 없었다.
둘을 빤히 바라보는 물색 눈동자가 부담스럽기까지 하니 말이다.
‘왜 저 눈은 민망한지 모르겠어.’
별것도 아닌데 다 까발려지는 기분이었다.
엘로니아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녀가 자수를 놓은 손수건을 되돌려받아 화형식을 거행하겠다고 다짐했다.
‘저런 위험한 물건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돼.’
그녀는 하얀 손수건을 움켜쥐며 마주 앉은 리프리에게 말을 걸었다.
“빌려주셔서 감사해요. 따로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레이디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충분합니다.”
시녀를 불러 손수건을 넘기는 틈으로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 틈으로 그레이터가 찾아왔다.
그는 열린 문틈으로 똑똑, 노크를 건네며 물었다.
“각하. 실례하겠습니다.”
“아, 그래.”
카르벨은 그를 보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저하. 어차피 머무르실 것 같은데,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형님의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 마음이 무겁군요.”
“마음만큼 걸음도 무거우신가 봅니다.”
저래도 되는 거야?
잘게 남아 있던 기침도 쏙 들어가는 말이었다.
대놓고 눌러앉지 말고 돌아가라는 뜻이 아니던가.
엘로니아가 놀라 고개를 들자 그는 태연하게 어깨를 끌어당겨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에 엘로니아는 순간적으로 굳었다.
‘왜, 왜 이래. 왜 가까이 와. 그만!’
그러나 그는 피식,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볼 키스를 하는 척 귓가에 속삭였다.
“바람 피우지 말고 있어, 엘로니아.”
“아니, 제가 언제 그랬다고!”
“질투 날 것 같아서 하는 소리야.”
누가 봐도 질투는커녕 신경도 안 쓸 거 뻔히 보이는데도 그는 보란 듯 답했다.
리프리에게도 충분히 들릴 정도였다.
‘펠런 백작 부인 한 번 도왔다고 아주!’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자, 그는 태연히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네고는 그레이터를 향해 사라졌다.
매번 무얼 하는지 모르겠으나 바빠 보였다.
뒤를 돌자마자 웃음기마저 사라지는 얼굴에서 진지함이 돋보였다.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가 짧게 묻자 그레이터가 답을 건넸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카르벨의 고개가 잠시 엘로니아를 향했다.
그녀는 눈짓으로 앞에 앉은 리프리를 힐끔, 가리켰다.
‘설마 나 혼자 독대하라고요?’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한단 말인가.
안 그래도 말수가 적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카르벨이 예전에 암기하라고 준 정보가 전부인 것을.
그러나 카르벨은 가식적인 미소를 한 번 지어 주고는 가벼운 인사와 함께 나가버렸다.
그녀는 카르벨이 사라진 곳을 밉지 않게 노려보았다.
고스란히 리프리를 혼자 도맡게 된 엘로니아는 습관처럼 웃었다.
‘무슨 대화를 해야…….’
의외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리프리였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님과 원래부터 이런 사이였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사이가 좋아 보이시네요.”
말을 꺼내자마자 엘로니아는 제 입을 때리고 싶었다.
‘좋기는. 대놓고 아웅다웅 난리도 아니더만!’
수습이라도 해야 하나.
그녀가 웃으며 말을 수습하려던 때.
리프리는 착실하게 답을 건네었다.
“어릴 적에는 확실히 자주 어울려 다녔습니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둘 사이는 묘한 선이 있었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적당히 속내를 보이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애초에 카르벨이 누구에게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왕국과의 거리가 있으니, 소원해진 걸까.
엘로니아의 의문을 느꼈는지, 리프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릴 때니까요. 순진한 시절이 아닙니까.”
마치 어린 시절 멋모르고 카르벨과 어울렸다는 투였다.
다른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인데도 희한하게 미미한 후회가 담겨 있었다.
‘그 정도인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지금까지 사이를 서먹하게 만든 걸까.
언뜻 언젠가 님프가 보여 주었던 카르벨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딱히 지금과 별반 큰 차이가 없었다.
그냥 외형만 자랐다 할 뿐, 어린아이치고 제법 성숙한 느낌이 더 강했다.
리프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그녀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정령사님께서는 형님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약혼자 카르벨을 묻는 건가요, 아니면 헤일튼 공작으로 묻는 건가요?”
굳이 따지자면 그녀는 후자 쪽에 더 자신이 있다.
왜냐면 달달 외운 것들이 주로 그런 것이니까.
‘약혼자 카르벨은 다 거짓말로 짜 맞춘 것들뿐이라.’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란 사이면 이런 거짓쯤은 눈치를 챌 수도 있지 않을까.
애석하게도 리프리의 호기심은 전자였다.
“약혼자로 어떠신지가 더 궁금하군요.”
“파이가 사람이라면 이렇지 않을까 해요.”
엘로니아는 수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겉은 딱딱해 보이지만 속은 얼마나 다정하고 부드러운지 몰라요.”
먹고 살기 힘들다.
엘로니아는 제 입으로 그를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에 깊이 탄복했다.
‘겉으론 그럴싸한 척하는데, 속은 시커멓다. 내가 봤다.’
사실대로 말을 할 수 없으니 그저 이렇게 에두르는 수밖에.
“놀랍군요.”
정작 리프리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더 무거워진 듯했다.
대체 카르벨은 어떻게 살았길래 고작 이 정도 칭찬에 사촌을 정색하게 만드는 걸까.
제법 정직한 인상의 리프리였기에 그 무게감이 남달랐다.
‘설마 사촌이라고 생각해서 편안하게 욕이라도 해 줄 줄 알았나?’
약점이라도 잡고 싶었던 걸까.
그는 진지하게 되물었다.
“형님을 믿으시나요.”
“이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말인데…….”
덩달아 심각해진 그녀는 단호하게 눈에 힘을 주었다.
“혹시 국교가 어떻게 되시는지 알 수 있나요.”
“……종교 권유가 아닙니다.”
그는 곤란한 듯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긴 속눈썹이 잘게 떨리는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그 모습이 희한하게도 가련하고 청순해 보였다.
‘뭐 이렇게 사람 마음 약해지게…….’
그래도 현재 그녀의 역할은 카르벨의 약혼녀였다.
그것도 아주 사랑해 마지않는.
“신뢰하니까 결혼을 약속했겠죠?”
리프리의 투명한 시선이 고스란히 그녀의 얼굴에 박혔다.
묘하게 거짓말을 하기 힘든 대상이라 엘로니아는 눈을 접어 웃는 것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가끔 짓궂기는 해도 없는 일을 만들어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
“배려도 있고, 한결같은 점도 좋아요.”
한결같이 능글맞고 약이 오른다.
물론 진심은 그녀의 목구멍 너머로 삼켜졌다.
리프리는 답이 없었다.
설마 더 말하라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