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소개장
“아프다는 소식을 내 공작님께 전해 들어야겠느냐!”
꽤 험악한 인상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까지.
늘 교양 있고 매너 있는 척을 하는 귀족들만 상대했던 영애들은 겁에 질린 듯 어깨가 움찔했다.
백작 부인이 평민 출신인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그녀의 가족까지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나 예법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백작 부인의 아버지, 고일의 모습에 더욱 꺼리는 낌새였다.
펠런 백작 부인이야 결혼으로 귀족 성을 부여받았다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저 성도 없는 평민 상단주.
그게 전부였다.
백작 부인도 이를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눈치를 봤다.
이런 상황을 카르벨은 몇 마디로 정리했다.
“제가 모셨습니다. 원래 몸이 아프면 가족이 생각나는 법이죠.”
그는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다른 영애들에게 물었다.
“이런 일도 흔치 않은데, 함께 괜찮으시죠?”
카르벨이 이렇게까지 물으니 다들 언제 불쾌감을 표했냐는 듯 웃으며 답했다.
“무, 물론이죠. 저도 안 그래도 그리 말하려고 했답니다!”
“부녀가 다정한 게 무슨 죄겠나요. 함께 차를 드시겠어요?”
호호호, 웃음이 어색했으나 다들 카르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들 갑자기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리거나 은근히 시선을 피했다.
고일을 마주하는 것을 온몸으로 불편하다고 표시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유일하게 에릴 후작 영애의 표정만은 서서히 혈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부인. 귀한 차는 넣어두시고, 상단에서 구한 차는 없을까요?”
은근히 독차를 물리려고 애를 쓰는 모양새였다.
그녀의 말에 고일이 아주 잘 됐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마침 제가 귀한 분들 뵙는 자리인 만큼, 귀한 차를 구해 왔습니다.”
그의 품에서 자그마한 찻잎이 담긴 병이 툭,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시녀들은 병에 든 찻잎을 단번에 알아본 눈치였다.
고일은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이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이 장소에 있는 모두에게 묻는 듯한 형형한 눈빛이었다.
이에 제일 먼저 반응한 이는 벨이었다.
시녀는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지켜보다, 이내 제 옷자락을 움켜쥔 채 용기를 내 답했다.
“차, 차입니다…….”
누구나 뻔히 아는 답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모든 것을 바꿔놓기 충분했다.
“백작님께서 마님께 선물로 드리라 하였던, 그 차에 들어 있던 것입니다.”
에릴 후작 영애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작 부인이 다시금 물었다.
“그럼 좋은 차잖니.”
벨에게 물었던 질문은 고일에게서 돌아왔다.
“아니다. 딸아.”
“남편이 제 건강을 염려해서 보냈다 했어요.”
“이 찻잎은 독성이 있어. 혼합 없이 타면 죽을 수도 있단다.”
백작 부인은 믿기 힘든 듯 고개를 저었다.
엘로니아는 옆에 앉은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가장 힘들겠지만, 선택해야 할 시간이었다.
“부인. 진실을 들으시겠어요, 아니면 그냥 넘어가시겠어요.”
그녀는 혼란스러운 듯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알고 계셨군요. 그래서 제게 차도 선물해주신 거고요.”
“미안해요. 백작님을 굳건히 믿고 있어 아무런 증거 없이 섣불리 말하기 힘들었어요.”
“들을게요. 알려주세요.”
그녀의 눈에는 이채가 서렸다.
마냥 유약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마음도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카르벨은 서류를 내밀었다.
“해당 차 구매 내역입니다. 하녀로 일을 하는 고아에게 푼돈을 주고 시켰더군요.”
그녀가 서류를 열어 확인했다.
그 안에는 고아를 본 이들의 증언도 담겨 있었다.
경로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
고아가 차를 계산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주변 아는 이들에게 인사를 하며 돌고 돌아 한 시녀에게 전달하는 과정.
그리고 그 시녀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보석상에서 황녀가 부탁한 목걸이를 구매하던 에릴 후작 영애라는 사실까지.
“에릴 후작 영애…….”
백작 부인의 조용한 부름에 에릴 후작 영애가 소리쳤다.
“음모예요! 제가 부인을 죽여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요!”
“그러게요. 저는 딸처럼 여겼는데,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부인. 정령사의 말을 믿으세요? 여태 아무것도 보인 것 없는 정령사가 하는 말을요?”
아무도 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편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그녀는 테이블 위의 잔을 던져버리며 외쳤다.
“아버지께 말씀드릴 거예요! 귀족 모욕죄로 전부 다 마땅한 처벌을 받을 겁니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에 다른 영애들이 소리를 지르며 피했다.
주변에 있던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일부는 ‘백작님, 백작님!’을 외치며 저택 안으로 뛰어갔다.
시종들이 에릴 후작 영애를 잠재우려고 했으나, 함부로 몸에 손을 댈 수 없으니 얻어맞는 것이 전부였다.
한참 뒤, 소란에 펠런 백작이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그는 고일과 카르벨을 보고는 사태를 파악하는 듯 잠시 침묵했다.
씩씩거리는 에릴 후작 영애를 보고도 그는 자연스럽게 고일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장인. 언제 오셨습니까.”
깍듯하게 건넨 인사였으나, 고일은 냉랭하게 되물었다.
“내 딸을 죽이려고 공모했던가.”
“무, 무슨 소리십니까!”
“자네가 내 하나뿐인 딸에게 독차를 먹였어? 내 딸에게! 감히!”
쾅. 테이블을 내리친 고일은 시뻘건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내 돈밖에 없다지만, 그 돈이라도 있어 다행이구만. 자네와 저 파렴치한 여자까지 반드시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죽이고 말걸세!”
“장인어른. 무슨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는 다급하게 고일의 말을 막았다.
“저는 그저 부인의 건강이 염려되어 고민하던 차에 에릴 후작 영애가 추천해준 차를 주었을 뿐이에요!”
“뭐라고요?”
에릴 후작 영애의 날카로운 되물음에도 그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 차가 독차인지 어찌 알았겠습니까! 매번 차를 타는 시녀들도 모르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고집스럽게 나오니 고일도 긴가민가하는 눈치였다.
고함이 오고 가는 테라스에서 엘로니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벨, 가져오렴.”
순간 거짓말처럼 소란이 뚝 멈췄다.
테라스 한쪽 면에서 다른 시종들과 서서 떨고 있던 벨이라는 시녀가 고개를 번뜩 들었다.
“네?”
“네 방의 침대 밑. 숨겨둔 서신. 갖고 와 줄래?”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펠런 백작이 에릴 후작 영애와 나누던 서신. 네가 갖고 있잖아.”
그녀의 말에 모든 이들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벨이 덜덜 떨며 찻잔을 가져올 때.
닉스는 아주 짧은 과거를 보여주었다.
펠런 백작이 주고받은 편지를 시녀에게 주며 명령했다.
“태워버려.”
자고로 귀족가의 시종이란 입은 무겁고 행동은 빨라야 하는 법.
벨은 아무런 의심 없이 서신을 태우러 가던 차에 실수로 그 내용을 읽고 말았다.
<독차는 구매해 뒀어요. 하루 일정량만 먹이면 한 달 내로 생이 다 할 거예요. 그동안 상단 재산은 당신이 알아서 해주세요. 언젠가 당신과 온종일 함께 할 날을 그리며.
-루아실 에릴>
벨은 그 뒤로 꾸준히 백작 부인의 주변을 맴돌았다.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으나,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누명을 쓰고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백작 부인의 펠런 백작에 대한 믿음이 강해 보였던 탓이었다.
엘로니아의 구체적인 지시에 벨은 울 것처럼 고개를 숙인 뒤, 뛰어가 편지를 갖고 왔다.
내용을 본 백작 부인은 현기증이 나는 듯 잠시 머리를 부여잡았다.
엘로니아는 카르벨에게 서신을 넘기며 물었다.
“이 정도면 어때요?”
“완벽해. 더 할 것 없이.”
그는 싱긋 웃으며 기사를 불렀다.
카르벨은 서신을 든 채로 그들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귀족을 시해하려 한 죄로 이송하겠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테라스 안으로 황실 기사단이 밀려들었다.
일부는 메티카 감옥에서 본 이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귀족을 시해하려 했다는 말에 펠런 백작이 소리쳤다.
“어째서 귀족 시해지? 이것은 잘못되었다!”
“그대가 가문의 성을 결혼이라는 제도로 부여하지 않았던가.”
“뭐?”
“폐하께서 결정하실 사안이지만, 그대의 가문은 부인이 이어갈 수도 있겠군.”
카르벨은 감정 하나 없이 날카롭게 답했다.
그 말을 끝으로 끌려 나가는 이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늘 장난스러운 모습만 봤던 엘로니아에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
“감사합니다, 정령사님. 감사합니다.”
모두가 정리된 백작저에서 고일은 허리가 굽어라 고개를 숙였다.
엘로니아는 부담스러운 인사에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뭘 했다고 이러세요.”
“이 은혜를 어찌 갚겠습니까. 앞으로 상단이 필요하실 때는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그는 돌아가는 마차에 타는 순간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텅 빈 펠런 백작저는 평소와 달리 조용했다.
마차가 닫히려는 순간. 백작 부인이 그녀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받아주세요.”
“뭔가요?”
“전에 소개장이 필요하다고 하셨잖아요. 그 목걸이를 구매한 상단입니다.”
이걸 얻기 위해 이 고생을 했구나!
엘로니아는 기쁘게 소개장을 받았다.
백작 부인은 과하게 예를 갖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령사님에게 자연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그 말을 끝으로 마차는 헤일튼저로 출발했다.
엘로니아는 그들의 모습이 작아질 때까지 확인한 뒤, 소개장을 카르벨에게 내밀었다.
“……자요. 받아왔어요.”
그는 당연하게 소개장을 받아 확인하며 넌지시 물었다.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하네.”
“그냥. 조금 신기해서요.”
소개장을 읽던 그의 시선이 잠시 마주 앉은 그녀의 얼굴을 찔러댔다.
엘로니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저렇게 나서서 화도 내주시고 하는 걸 처음 봤거든요.”
데브니 부부는 엘로니아에게 관심이 없었다.
한 번도 그녀의 일에 나서 준 적이 없으니, 고일과 같은 아버지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신분 차이 탓에 소리 지른 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카르벨은 소개장을 접어 안주머니에 넣으며 답했다.
“그런 게 부럽나.”
“부럽다기보다는 그런 부모도 있구나, 정도?”
그나마 고일이 재력이라도 있어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이혼을 하는 것도, 이렇게 일을 진행하는 것도 힘들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돈이 중요하구나.’
카르벨과 이혼 전에 밑천을 단단히 모아둬야 할 것 같았다.
제록 나무가 돈 나무가 되는 의미 없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쯤.
카르벨이 툭 말을 던졌다.
“앞으로는 그대가 무슨 일을 당하면 헤일튼가가 나설 테니 부러워하지 말아.”
엘로니아는 석양이 지는 바깥을 창문을 통해 보다 피식, 웃었다.
“뭐예요. 오늘 총사령관으로 멋있었다고 자랑하시는 거예요?”
“멋있었나 보지?”
순간 태연하게 되묻는 그의 말에 엘로니아는 합, 입을 다물었다.
카르벨은 능글맞게 두 눈이 접히도록 환히 웃으며 말했다.
“다시 말해주겠어?”
“취소예요. 그냥 일을 열심히 하셨다! 이런 뜻입니다!”
“약혼녀가 솔직하지 못하네.”
작게 웃음을 흘리며 엘로니아를 빤히 응시했다.
묘하게 창피하게 느껴져, 엘로니아는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