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차를 내와라
의미는 없지만 엘로니아는 눈을 감았다.
그런다고 한들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과거가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엘로니아는 사실 그녀를 보는 사람들이 정령사라 힘들겠다는 말을 건넬 때도 이해하지 못했다.
닉스가 말을 안 들어서 곤란하기는 했어도, 날이 갈수록 제법 다루는 방법에 익숙해지고 있으니.
더불어 님프와 노움은 우호적이기까지 하니 문제 될 일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그녀는 사람들이 왜 이따금 그런 말을 중얼거렸는지 깨달았다.
“루아실. 조금만 기다려. 상단 측에서 투자만 받으면 바로 이혼할 테니까.”
“못됐네, 당신. 내가 준 차는요. 갖다주었어요?”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일말의 동정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저 장난처럼 그를 놀리기 위한 말투였다.
아니나 다를까, 펠런 백작도 그리 큰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의외야, 그대가 그런 것까지 챙길 줄은.”
과거 속, 펠런 백작이 고개를 기울이자 에릴 후작 영애의 팔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 뒤는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봐야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남편의 말을 믿고 독차를 마시던 사람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차라리 이전처럼 이혼을 하지…….’
꼭 죽여야만 하는 거였을까.
아니면 에릴 후작 영애의 단독 소행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차를 그녀가 구매한 것은 사실인 듯하니 말이다.
카르벨이 목걸이를 걸어주며 했던 대화도 이제 와 보니 에릴 후작 영애를 지목하고 있었다.
증거가 없어 입을 다물었을 뿐, 그는 얼추 눈치를 채고 있던 모양이었다.
엘로니아는 그와 펠런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때가 떠올랐다.
‘사랑은 개뿔…….’
그가 옳았다.
실상 정략혼이 대부분인 귀족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누가 누구의 애첩이라거나, 심지어 역사 속 황제들도 제 첩에게 작위를 준 일은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펠런 백작은 아니라고 믿었던 건, 그는 늘 사귀는 이와 재혼했기 때문이었다.
‘결혼은 의미 없는 거였구나.’
묘한 탈력감에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나도 카르벨과 사랑으로 결혼을 결정한 건 아니었으니까.’
제 부모도 사랑보다는 이해관계에 가까웠다.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엘로니아는 차분해진 마음으로 찻잔을 들었다.
이에 닉스는 그녀의 눈앞을 알짱거리며 외쳤다.
[왜 가만히 있어? 가서 찻잔을 얼굴에 부어버려야지!]
그녀라고 가만히 있고 싶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영애들도 있는 자리였다.
엘로니아가 양해도 없이 대뜸 말을 뱉어도 예의가 아니었다.
특히 펠런 백작 부인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리라.
‘부인이 괜찮으실까.’
기껏 병색에서 벗어나나 했는데.
겉은 더할 나위 없이 우아했으나 엘로니아는 속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대체 이런 말은 어떻게 전해야 잘 전했다는 소리를 듣냐고!’
카르벨은 알고 있던 걸까.
목걸이를 보고 하염없이 칭찬을 내뱉던 에릴 후작 영애가 떠올랐다.
새삼 그의 정보력에 놀랍기까지 했다.
다소 힘겨운 과거의 장면이 끝나고 엘로니아가 눈을 떴을 때.
“생각보다 정령사가 제약이 많네요. 정식 임명이 언제셨죠?”
현재.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에릴 후작 영애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이곳에서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엘로니아만 깨달은 게 아니었는지 닉스는 제 팔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저거 완전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었구만?]
과거 속 에릴 후작 영애는 이곳에 익숙한 듯 굴었다.
‘펠런 백작이랑 한두 번 만난 게 아니라는 뜻이겠네.’
무슨 찻잎이 새로 들어왔는지, 시녀의 이름까지 알고 있던 그녀의 행동들이 순식간에 짜 맞춰졌다.
엘로니아는 눈동자만 굴려 펠런 백작 부인을 훔쳐보며 답했다.
“정식 임명은 폐하께서 곧 부르신다 하여 기다리고 있어요.”
“올 건국제 때는 정령사님의 축사를 받겠네요.”
백작 부인이 환히 웃으며 기대된다는 듯이 답했다.
이에 가만히 차를 마시던 에릴 후작 영애가 태연히 답했다.
“정식 임명이 되면 말이죠.”
지나가듯 하는 말에 엘로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 듣던 다른 이들이 괜히 큰 소리로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되겠죠!”
“몸이 약하시다더니, 오늘 뵈니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다른 영애의 노력이 무색하게 에릴 후작 영애는 싱긋 웃으며 웃기지 않은 말을 하고 있었다.
대놓고 약해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어쩐지 목걸이를 태연히 칭찬할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그저 자신과 황실의 인맥을 자랑하기 위한 용도였던 건가.
저번부터 정령사인지 아닌지, 혹은 그녀가 제대로 정령을 사용하는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더니.
그녀가 마음대로 모든 과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에 닉스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저게, 진짜! 엘로니아, 지금이야! 가서 물어!]
강아지도 아니고, 물어! 라니.
물기는 했다.
이를 아주 꽉 물었지.
엘로니아는 마주 보며 온화하게 답했다.
“많이 좋아졌죠. 그러고 보니 백작 부인. 서신에서 보니까 건강에 좋은 차를 남편이 선물하셨다면서요?”
이제는 누가 선물했는지 알 수밖에 없는 차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에릴 후작 영애의 눈동자가 아주 짧게 흔들렸다.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독차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펠런 백작 부인은 해맑게 답했다.
“맞아요. 지금은 안 마시고 있지만요.”
“저희도 마셔 볼 수 있을까요?”
“그럴까요?”
그녀의 질문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아직 마시던 차도 다 안 마셨는데, 굳이…….”
말끝을 흐리던 에릴 후작 영애는 찻잔을 불안정하게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영애들은 그저 펠런 백작을 칭찬하느라 미묘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백작께서 얼마나 부인을 아끼시면 차까지 선물하셨을까. 궁금하네요.”
“이렇게 금방 건강해지신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라니까요.”
엘로니아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들을 부추겼다.
“사실 너무 궁금했어요. 얼마나 좋은 차인지.”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금방 준비시킬게요. 벨!”
펠런 백작 부인이 멀찍이 서 있는 시녀를 불렀다.
차가 나오면 모두가 마실 수밖에 없다.
독차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에릴 후작 영애라면 분명 마시지 않을 터.
그렇다고 귀족들이 쓰러지기라도 했다가는 영락없이 혼자 마시지 않은 그녀가 추궁을 당할 것이다.
엘로니아의 뒤에는 카르벨의 말처럼 헤일튼 공작가가 받치고 있을 테니까.
백작가의 시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오자 펠런 백작 부인이 나긋나긋하게 부탁을 건넸다.
“백작께서 선물하셨던 차를 손님에게 내오겠니?”
“예?!”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질문에 시녀는 펄쩍 뛰듯 놀라 되물었다.
덩달아 놀란 펠런 백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니? 차가 꽤 남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그, 그게 아니라…….”
“손님들이 원하니 가서 내오겠어?”
흔들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벨은 마지막에 에릴 후작 영애를 보고는 초조한 듯 입을 달싹였다.
묘한 반응이었다.
‘전에 보니까 에릴 후작 영애가 함부로 대하던 시녀 아닌가?’
여기서 그 차가 독차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에릴 후작 영애와 엘로니아.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벨은 덜덜덜 떨면서 차를 가져왔다.
그 모습이 불안해 보이니 펠런 백작 부인이 걱정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춥니? 손을 많이 떠는구나.”
“아, 아닙니다!”
그녀는 꿋꿋하게 모든 잔을 새 잔으로 바꿨다.
엘로니아의 잔이 바뀔 무렵.
가만히 옆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닉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엘로니아, 이것 좀 봐.]
예고도 없이 과거의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펠런 백작의 방에서 편지를 들고 나오는 벨의 모습.
그녀는 초조한 듯 편지를 가슴에 묻고는 주변을 살피며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백작 부인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주위를 맴돌았으나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모든 것까지.
‘알고 있었구나.’
엘로니아가 짧은 과거를 본 사이, 에릴 후작 영애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린 뒤였다.
독차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곧 그녀와 펠런 백작의 관계도 들킬 위험이 컸다.
벨이 떨리는 손으로 차 포트를 들었을 때, 누군가 에릴 후작 영애를 보며 물었다.
“어머,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세요?”
“차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그러나 눈동자는 재빠르게 테이블 위를 훑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정말 큰일이라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건강에 좋은 차라니까, 다른 차는 물리시고 새 차를 드시는 게 좋겠어요.”
“그래 보았자 차죠. 정령사님께서도 의원을 더 신뢰하라 하셨잖아요.”
이런 식으로 빠져 나가겠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가 독차를 선물하지 않았냐고 하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엘로니아에게는 이렇다 할 증거가 없었다.
우려 섞인 말들이 오고 가던 중, 백작가의 시종이 다소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마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어떤 분이?”
백작 부인은 곤란한 듯 테이블 위를 눈동자로 쓱 훑으며 눈치를 줬다.
귀중한 손님이 있으니 적당히 처신하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시종은 대놓고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시종의 뒤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숙녀분들의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카르벨?”
[쟤가 왜 여길 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방문이었다.
엘로니아는 놀라 일어난 채로 굳어버렸다.
손님이 카르벨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백작 부인은 언제 축객령을 지시했냐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헤일튼 공작께서 어쩐 일이세요.”
“엘로니아가 걱정되어서요. 요 며칠 백작 부인을 걱정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잔 터라.”
“어쩜……. 두 분이 어떻게 이 정도로 신경을 써주실 수가. 오신 김에 함께 하시겠어요?”
“숙녀분들 모임에 불청객이라. 괜찮으시겠습니까?”
카르벨은 싱긋 웃으며 모두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능청스러운지, 엘로니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은 그는 태연하게 엘로니아의 뺨에 가벼운 키스를 하며 말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나, 엘로니아?”
누가 보아도 다정한 행동이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당황해서인지, 갑작스러운 입맞춤 때문인지 엘로니아는 잠시 생각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카르벨이 빠르게 속삭였다.
“독차를 구매한 증거를 갖고 왔다.”
슬쩍 카르벨을 보자, 그는 정중하게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손가락으로 톡. 신호를 주었다.
특유의 종이 재질이 울리는 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들렸다.
그의 품 안에 서류가 있는 모양이었다.
엘로니아는 곧장 환히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짚었다.
“카르벨도 참.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백작 부인의 안부도 물을 겸 해서.”
그는 다시금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상체를 곧추세웠다.
민망한 듯 그들을 보는 초대객들의 시선에 엘로니아의 뺨에 옅은 열이 올라왔다.
그러나 카르벨은 아무렇지 않게 펠런 백작 부인을 향해 말했다.
“손님이 한 분 더 계시는데. 이번에는 백작 부인을 위한 선물이랍니다.”
들은 바가 없는 소식이었다.
백작 부인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어리둥절하게 앉아 있었다.
곧 그가 턱짓으로 테라스 입구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곳에는 제법 괴팍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첼레나.”
낯선 이름을 부르자, 백작 부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읊조렸다.
“아,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