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쉽지 않은 길
펠런 백작 부인처럼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할 줄 아는 사람은 실상 많지 않다.
인사 정도 한다고 가문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엘로니아가 만나본 사람들 중 꽤 많은 이들이 그러했다.
카르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미하게 굳은 얼굴이 마땅치 않은 대답인 모양이었다.
“만약 백작 부인이 후계라도 낳는다면, 펠런가는 평생 평민 출신을 들였다는 꼬리표가 붙을 거다.”
“부럽네요. 그만큼 사랑하는 가정을 이룰 것 같아서요.”
“사랑한다는 보장이 있나.”
곧게 직시하는 그의 시선이 민망했다.
엘로니아는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만한 위험 요소를 감안했을 때는, 그만큼 사랑한다는 뜻이겠죠.”
응당 뒤에 카르벨의 반박이 붙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는 말이 없었다.
널따란 집무실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마주 보고 있자니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어색해지는 공기가 싫어, 엘로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그랬잖아요. 원래 사랑이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라고.”
“쉽지 않은 길을 가네, 엘로니아.”
한참 만에 하는 소리가 능글맞았다.
엘로니아는 가문만 내세우던 데브니 남작 부부를 떠올리며 짧게 어깨를 떨었다.
“가문이 있으면 뭐 해요. 세상은 돈이 최고야.”
“결국 그쪽으로 결론이 나는군.”
그는 익숙하다는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 *
카르벨은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가는 엘로니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잠시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오른 그가 짧게 그녀를 불렀다.
“아, 엘로니아.”
그러나 이미 문은 열렸고, 그녀의 놀란 외침이 이어졌다.
곧이어 그레이터의 사과하는 음성이 들렸다.
“두 분이 대화를 나누시는 듯해 기다렸습니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 다음부터 기다릴 때는 문 바로 앞에 말고 한 발짝 떨어지는 게 어때요?”
“한 발짝 말씀이세요?”
“한 네 걸음 뒤면 더 좋고요.”
“유의하겠습니다.”
특유의 부드럽고 차분한 그레이터의 답에 엘로니아는 더 답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곧 카르벨을 향해 간략화된 인사를 건넨 그는 닫힌 문을 한 번 힐끔거린 뒤 말을 이었다.
“각하. 찻잎을 구매한 곳을 찾았습니다만, 구매자가 펠런 백작은 아니었습니다.”
“시종은.”
“판매상이 백작가의 시종들 얼굴을 전부 보여 주어도 아니라고 하더군요.”
만약 제 부인을 독살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가신을 쓸 리도 없었다.
카르벨은 예상했던 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레이터는 품에서 서류를 건넸다.
“구매자는 여성이라고 하더군요.”
* * *
일주일 뒤, 다시금 초대받은 펠런가의 티타임에 가기 위해 준비하던 때.
웬일인지 카르벨이 그녀의 방에 들렀다.
시종을 물린 그는 적당히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가는 건가?”
“수수해요? 뭐라도 하나 걸칠 걸 그랬나?”
저번 티타임 때, 목걸이로 대화가 영 좋지 않게 흘러갔던 터라, 최대한 선물 받은 것들은 덜어낸 터였다.
카르벨이 직접 되묻는 모습을 보아하니, 너무 단출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에이미를 부르기 위해 몸을 틀자, 그는 직접 엘로니아의 뒤로 섰다.
거울 뒤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에이미가 펼쳐놓고 나간 화장대 위의 보석함을 응시했다.
설마 또 가져가나 싶어 거울 속 그를 노려보자, 카르벨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목걸이 하나를 골라내었다.
“이게 좋겠군.”
“이거…….”
황실에서 선물한, 바로 카르벨이 새벽에 난입해 가져갔다가, 며칠 뒤 꼭두새벽 같은 아침에 돌려주고 간 그 목걸이였다.
그의 투박한 손에서 보석은 너무도 작아 보였다.
카르벨은 상체를 숙여 엘로니아와 시선을 맞췄다.
“오늘은 이걸 착용했으면 해.”
“이제 공작님 취향으로 저를 꾸미기까지…….”
물결처럼 어깨를 감싼 머릿결을 손수 넘겨주는 그를 보며 엘로니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그러자 그는 익숙하게 목걸이를 걸어주며 말했다.
“찻잎. 펠런 백작이 구매한 게 아니더군.”
“분명 서신에는 백작께서 드렸다고…….”
“다른 이가 구매해서 넘긴 듯해.”
“누구요?”
금속의 차가운 기운이 목에 걸쳐졌다.
가운데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 보석이 유독 눈에 띄었다.
꽤 많은 선물을 받았으나, 마음에 드는 것들 중 하나였다.
카르벨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뒤에서 속삭였다.
“확실하지는 않아.”
등이 파인 드레스 탓에 그의 숨결이 닿을 때면 간지럽게 느껴졌다.
엘로니아가 잘게 몸을 떨자, 그는 바람이 빠지는 듯 웃음을 섞어 말을 이었다.
“이게 아마도 누구인지를 알려줄 듯싶더군. 부탁하지.”
그는 톡, 얼어붙은 그녀의 볼을 가볍게 건드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마차까지 손수 불러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펠런 백작가에 도착하자, 한층 더 얼굴빛이 좋아진 펠런 백작 부인이 마중을 나왔다.
“오셨어요?”
“얼굴이 전보다 훨씬 좋아지셨네요.”
“보내주신 차 덕분이죠. 정말 효과가 좋더라고요.”
불과 일주일 전, 핼쑥했던 얼굴에는 다시 이전처럼 서서히 살이 올라오고 있었다.
목소리와 걷는 걸음에도 힘이 실려 있었다.
전과 같은 테라스에 도착했을 때, 대부분의 초대객들은 도착해 있었다.
지난번의 마무리가 너무 어색했기에 우려했으나, 익숙한 듯 그들은 태연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그중 제일 먼저 반가운 기색을 내비친 사람은 에릴 후작 영애였다.
“정령사님. 오늘 한층 아름다우시네요.”
막상 또 이렇게 화두를 여니 이전에 느낀 미세한 적의는 착각인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고마워요. 영애께 그런 말을 들으니 부끄럽네요.”
“어쩜. 공작님께서 그런 말은 안 해주시나요?”
그러면 그렇지.
역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모양이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제법 마음을 먹고 왔기에 그들이 원하는 답을 줄 수 있었다.
“너무 습관처럼 모든 걸 예쁘다고 해주시니 믿을 수 있어야지요.”
[너 딱 한 번 듣지 않았어?]
옆에서 닉스가 작게 끼어들었으나 엘로니아는 가볍게 무시했다.
카르벨의 대외적인 모습이라면 못 믿을 법한 말도 아니었다.
옆에서 부럽다는 입에 발린 말이 이어졌으나, 에릴 후작 영애는 전혀 다른 것에 집중했다.
“오늘 목걸이가 저번에 본 것보다 훨씬 잘 어울리세요.”
갑자기 칭찬을 건네니 긴장되었다.
그다음에 분명 본심이 나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심인 듯 그녀는 한결같이 칭찬만 건넸다.
“한층 피부도 밝아 보이시고. 옷은 어디서 맞추시나요?”
“어, 글쎄요. 공작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는 터라…….”
“나중에 제게도 알려주시겠어요?”
“그, 그래요.”
전투력을 최상위로 끌어올렸거늘.
무안하리만큼 그녀는 칭찬을 이어갔다.
닉스조차도 잔뜩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엘로니아의 어깨 뒤로 슬그머니 숨기까지 했다.
‘펠런 백작 부인의 심미안을 비꼬려고 하는 건가?’
[쟤 왜 저래? 부인이 선물한 목걸이도 저가 고른 거 아냐?]
듣고 보니 그 말도 맞았다.
그녀가 이 목걸이를 칭찬한다는 건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에릴 후작 영애가 저렇게 띄워주니, 덩달아 옆에 있던 이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걸로 누가 독차를 구매했는지 알 수 있다더니. 대체 뭘 알 수 있다는 거야.’
애초에 황실에서 선물로 받은 목걸이였다.
이곳에서 황실과 크게 연이 있는 이도 없었다.
순간 직전에 했던 닉스의 말에 그녀는 무언가 퍼뜩 떠올랐다.
‘저번에 펠런 백작 부인이 보낸 목걸이도 후작 영애가 골랐었지?’
자신을 치켜세우기 위해 대놓고 말하던 그녀였다.
그리고 언젠가 황실에서 선물을 받던 밤.
그녀가 보았던 단편의 과거.
‘아셀리 전하도 누군가에게 목걸이를 골라 달라고 했었지?’
언뜻 다시 떠오르는 기억 속 마차 너머의 목소리는 에릴 후작 영애와 똑 닮아 있었다.
놀란 탓에 엘로니아의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는지, 그녀가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저희끼리 너무 신이 났네요. 괜찮으세요?”
“그러네요. 데브니 영애께서는 무엇을 좋아하시려나요?”
펠런 백작 부인은 넌지시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기억해두었다가 뭐라도 선물을 할 속셈이 훤히 보였다.
받기 부담스러워 잠시 말을 고르는 사이, 먼저 에릴 후작 영애가 입을 열었다.
“정령사님은 과거를 보신다잖아요. 궁금해요. 저희도 뭐가 보이시나요?”
그녀의 질문에 옆에 있던 일부 초대객들이 호기심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아무거나 다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럼 너무 힘들 것 같아요. 한두 명도 아니고…….”
예상 범위에 있던 질문이라 답을 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달달 외웠던 그들의 정보를 떠올리며 적당히 응대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볼 수는 없어요. 연관된 물건이나 장소가 있어야 하기도 하고요.”
“아쉽네요. 전에 잊어버린 로브를 찾을 수 있을까 했는데.”
에릴 후작 영애가 아쉬운 듯 내뱉는 말에 닉스는 툴툴거렸다.
[지금 고급인력인 나를 고작 잃어버린 물건 찾는 용도로 쓰겠다고 한 거야?]
허, 하고 기가 찬 웃음까지 뱉은 그는 씩씩거리며 엘로니아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엘로니아와 이마를 맞대고는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엘로니아. 우리가 보여주는 거야.]
‘뭐를……!’
[내가 아주 기가 막힌 걸 보여주지! 죽었어, 저 이상한 여자.]
평소라면 머리가 가벼워졌을 텐데, 제법 화가 났는지 그는 그대로 엘로니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박아버렸다.
그래봤자 자그마한 녀석이라 아프지는 않았으나, 해일처럼 밀려드는 과거의 기억들이 순간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똑같은 테라스였다.
이번에도 역시 에릴 후작 영애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평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보통 외출할 때 저런 옷을 입던가?’
의문이 들기 직전, 낯선 음성이 그녀를 불렀다.
“루아실.”
에릴 후작 영애의 이름이었다.
실제로 부르는 이는 처음이라 낯설 정도였다.
티타임에 오는 이들 대부분 행동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예법에 맞춰 성을 불렀다.
친근한 척을 해도 대부분은 영애라고 불렀으니 과거의 일이라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르는 이는 남자였다.
테라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에릴 후작 영애에게 다가간 이는 엘로니아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펠런 백작?’
바로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그보다 휘몰아치는 기억의 양이 더 많았다.
에릴 후작 영애는 예민하게 물었다.
“오늘 그 여자 안 오는 거 맞아요?”
“그럼. 오늘도 승마를 배우겠다고 나갔어. 네 시간은 족히 걸릴 거야.”
“그런 걸 배워봤자, 평민이 귀족이 되는 것도 아닌데. 애쓰네요. 불쌍하게.”
“또 왜 이리 골이 났을까.”
펠런 백작이 상냥하게 되물었다.
은근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그 친근한 행동에도 에릴 후작 영애는 거절하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그저 친한 관계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