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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35화 (135/234)

28. 좋은 사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같은 장소, 펠런 백작가의 테라스였다.

초대받은 티타임과 엇비슷한 찻잔과 똑같은 테이블에 다과.

단지 다른 점이라고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에릴 후작 영애였다.

‘펠런 백작 부인이 아니라?’

다른 초대객은 물론, 저택의 안주인인 펠런 백작 부인도 없었다.

‘안주인이 없을 때도 저택에 들어올 정도로 두 분, 친분이 두터운가?’

카르벨이 전해준 명단으로 확인했을 적, 에릴 후작 영애는 펠런 백작 부인이 처음 티파티를 열 때부터 함께 한 사람 중 하나였다.

초창기에 초대할 정도면 이렇게 남의 저택을 편안히 오고 갈 수 있는 걸까?

엘로니아가 의구심이 들 무렵, 과거 속 에릴 후작 영애가 찻잔을 들었다.

그녀는 익숙하게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예전에 있던 티타임은 아닌 것 같은데…….’

에릴 후작 영애는 한창 혼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시녀를 불렀다.

“차 맛이 별로네. 전에 남부에서 들인 찻잎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네. 지금 내올까요?”

“그런 게 있으면 처음부터 준비했어야지. 하나하나 설명을 해야 해?”

“죄송합니다.”

날이 선 지시에도 백작가의 시녀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저택처럼 어떤 차가 새로 들어왔는지까지 알고 있다는 점이 의외였다.

이곳에 익숙하고, 또 편안해 보였다.

시녀는 빠른 속도로 새로운 차를 내왔다.

겉으로 보이는 평범한 모습이 퍽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에릴 후작 영애는 새로 나온 차를 한 모금을 머금었다.

기분이 상했는지, 그녀는 잔뜩 굳은 얼굴로 딱딱하게 말했다.

“벨, 이걸 차라고 내왔어? 다시 내와.”

“예, 알겠습니다.”

한두 번 와서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심지어 시녀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요구에 맞춰 시녀가 재차 새 차를 내왔으나, 결론은 변함없었다.

보다 못한 에릴 후작 영애는 찻잔을 깨버릴 듯이 내려놓으며 짜증 섞인 말로 시녀를 비아냥거렸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서서히 과거의 잔상들이 멀어졌다.

엘로니아의 눈앞에는 현재, 많은 이들이 초대받은 티타임 자리만 존재했다.

지금 보이는 에릴 후작 영애의 행동은 닉스가 보여 준 과거와 판이하였다.

적당한 미소와 격식을 차린 예의에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다.

[와, 가식적이야.]

닉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치를 떨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에릴 후작 영애가 친절하게 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런 그들의 틈으로 시녀 하나가 조심히 다가와 케이크를 내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순간 귀에 익은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방금까지 보던 얼굴이 그대로 눈앞에 있었다.

바로 과거에 에릴 후작 영애에게 한 소리를 들었던 벨이라 불리는 시녀였다.

그녀야 멋대로 과거를 보고 알고 있다지만, 정작 엘로니아를 처음 보는 시녀는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일을 마친 시녀가 돌아가려던 찰나.

“잠깐만.”

에릴 후작 영애가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미처 못 들은 것인지 그대로 트레이를 끌고 나가려 했다.

팔짱을 끼고 이 사태를 구경하던 닉스는 심기가 불편한 듯 입을 열었다.

[그냥 이름 부르면 될걸. 왜 저렇게 번거롭게 해?]

그는 직접 시녀의 곁으로 날아가 고개를 기울여 얼굴까지 확인했다.

비록 상대는 닉스를 볼 수 없으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지만.

[분명 아까 과거에서 본 얼굴 맞는데. 벌써 노망이 들었나?]

그 순진한 얼굴로 노망이라고 말하다니.

괴리감에 표정 관리를 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닉스는 코를 찡긋하며 대단한 것을 발견한 양 소리쳤다.

[네가 봐도 똑같지? 세상에 이렇게 생긴 사람이 둘이 아니라면 말이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펠런 백작 부인이 그 시녀의 이름을 불렀다.

“벨, 잠시 다시 오겠니?”

“아, 예.”

똑같은 이름까지.

더 묻지 않아도 과거의 기억 속, 잔뜩 혼이 났던 시녀라는 사실은 확정이었다.

시녀를 붙잡아둔 백작 부인이 에릴 후작 영애를 보며 친절히 물었다.

“더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영애?”

“설탕을 더 부탁할 수 있을까요, 부인.”

“그렇게 조심히 묻지 않아도 되는데, 정말.”

펠런 백작 부인은 마치 딸을 보는 듯이 말하며 시녀에게 말을 전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대화에 그 누구도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엘로니아는 아니었다.

‘시녀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 굳이……?’

애매하게 부르는 탓에 펠런 백작 부인이 직접 시녀를 부르기까지 했다.

보는 눈이 많아 예의를 차린 걸까.

어딘가 걸리적거리는데, 정확하게 어느 부분이 꺼림칙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에릴 후작 영애가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 목걸이. 펠런 부인께서 선물하신 것이지요?”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엘로니아의 반문에 그녀는 쉽게 답했다.

“부인께서 엘로니아 님께 드릴 선물을 백방으로 알아보면서 고민하셨거든요.”

“아, 혹시 에릴 영애께서 함께 고르신 건가요?”

“그건 아녜요. 저는 그냥 얘기를 들어드린 것뿐이죠. 결정은 부인께서 하셨답니다.”

잔을 기울이며 하는 말에는 펠런 백작 부인에 대한 친근함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아직 장신구에 대해 낯설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이어진 말이 끝나자,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초대객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릴 영애께서 워낙 안목이 뛰어나시니까요.”

“그러고 보니, 헤일튼 공작님께서 말씀하시길 엘로니아 님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셨다던데요?”

“저도 들었어요. 오늘 이렇게 착용까지 하신 걸 보니 사실인가 보네요!”

“원래 부인께서 무얼 보내려고 하셨더랬죠?”

누군가의 질문에 에릴 후작 영애가 곤란한 듯 입을 열었다.

“그건 저와 부인의 비밀로 남겨둘까요?”

“어머, 저희가 또 눈치 없게.”

화기애애한 대화였으나 어째서인지 주최자인 펠런 백작 부인보다 에릴 후작 영애가 돋보이는 주제였다.

다른 이라면 화라도 낼 법한데도, 펠런 백작 부인은 그저 사람 좋게 웃을 뿐이었다.

“아버지에게 상단에서 좋은 물건을 부탁드릴 생각이었어요. 제가 아직 소양이 부족했더라고요.”

선물 하나에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사회에서는 무엇 하나 허투루 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펠런 백작 부인은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가만히 답을 듣던 엘로니아는 저도 모르게 툭, 말을 뱉고 말았다.

“부담 갖지 않으셔도 괜찮았는데. 저는 상단에서 엄선해 보내주셨어도 기뻤을 거예요.”

엘로니아는 자신을 향하는 시선들을 향해 방긋, 웃어주기까지 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시는데,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요? 어차피 보석은 공작님께서 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구해다 주시는걸요.”

쑥스러운 척 뺨을 손으로 가볍게 감쌌다.

누가 듣는다면 퍽 죽고 못 사는 사랑스러운 연인으로 보일 법했다.

그러나 반대로 방금까지 온화하던 테라스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할 걸 그랬나?’

펠런 백작 부인은 작위가 없는 가문 출신이었다.

상단이 워낙 큰 덕에 돈은 많았으나, 가문의 전통에 목숨을 거는 귀족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천시 여겨지는 위치였다.

가문의 힘과 재력이 더해지면 권력이었으나, 재력만 있을 때는 그저 졸부 취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백작과 결혼해 부인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 꼬리표는 사라지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대화에서 은근히 느껴지는 그 기류가 불편했다.

그 탓에 저도 모르게 답을 하고 만 것이었다.

‘아니, 어차피 부인에게 잘 보여야 부티크 소개장을 얻을 수 있으니까. 괜찮아, 잘했어!’

이 모임 자체가 그리 중요한 이들이 모인 자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아무 배경이 없는 펠런 백작 부인이 모을 수 있는 인맥은 이것이 한계였으리라.

엘로니아를 꼭 초대하고 싶어 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싸늘한 분위기에도 펠런 백작 부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밝게 화답했다.

“다음에 상단의 좋은 물건이 들어오면 받아주시겠어요?”

“물론이죠. 받기만 해서 죄송스러워요.”

따로 덧붙이지는 않았으나, 티파티를 망친 것을 포함한 사과였다.

이를 알아들었는지 펠런 백작 부인은 그저 사람 좋은 미소로 답을 내어주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수척한데도, 그녀는 맑게 웃고 있었다.

병색이 짙었으나, 마음만큼은 강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 * *

“공작님.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그래. 한 시간째 같은 얘기를 하는 그대가 너무하기는 해.”

엘로니아는 무심하게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보는 카르벨을 샐쭉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육중한 책상에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처음 보고 겸 이야기를 하러 들어왔을 적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 그대로였다.

티파티를 다녀오자마자 그에게 보고를 전했다.

그 과정에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이 추가되니 말이 길어졌다.

어차피 그도 알아두면 나쁜 것 없는 정보였다.

‘닉스가 준 정보를 다른 데서 들은 척 흘리기까지 했는데. 너무 관심이 없네.’

저 혼자만 이상하다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는 작게 입을 삐죽이며 답했다.

“전에는 돈보다 정보가 좋다 하셔놓고.”

“그래서 가만히 듣고 있잖아.”

정말 듣기는 한 게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그는 태연하게 서류를 넘겼다.

그는 펜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부티크 소개장은.”

“아직이요. 끝마무리가 좀 그래서 물어보기 어려웠어요.”

“오늘 일로 호감은 샀을 테니 시간 문제겠군.”

오로지 카르벨의 관심은 소개장뿐이었다.

그의 기대에 부응하듯 다음 티타임 날짜도 이미 정해진 뒤였다.

엘로니아가 말을 꺼낸 뒤, 겉도는 듯한 예의 차린 말만 주고받았던 그 상황을 떠올려보면 벌써부터 다음이 걱정되었다.

그녀는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카르벨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돼?”

“걱정까지는 아니고, 좀 피곤하겠다 싶어서요.”

“하고 싶은 대로 해. 어차피 헤일튼가 아래에서 꿈쩍도 못 할 이들이야.”

위로보다는 당연한 반응처럼 이어진 말이었다.

그의 뻔뻔한 자신감에 엘로니아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전대 공작님은 행복하시겠어요. 아드님께서 이렇게 가문에 자부심이 넘치는 데다, 가주로도 손색이 없으시니.”

“글쎄.”

“새삼스럽게 왜 겸손한 척하고 그러세요. 무섭게.”

엘로니아는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혹시 누군가 있나?

그렇지 않고는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답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슬그머니 물러서려던 찰나. 카르벨의 입이 열렸다.

“백작 부인의 일은 크게 신경 쓰지 마. 평민 출신이라면 대부분 그런 시선으로 볼 테니까. 그걸 아니까 백작 부인도 티타임에 그렇게 공을 들이는 거고.”

그는 예의 그 가식적인 미소를 뒤집어쓴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펠런 백작이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은 거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서류를 정리했다.

그녀가 정리할 때는 늘 한 구석이 삐뚤빼뚤하게 되었는데, 희한하게 그의 손에서는 한 장처럼 착착, 보기 좋게 겹쳐졌다.

깔끔하게 삐져나가는 곳 없이 맞춰지는 종이가 꼭 틀에 맞춘 것처럼 반듯해졌다.

꼭 흠집 없는 새 종이로 보이려는 것처럼.

엘로니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부인은 좋은 사람이잖아요. 그 외에 다른 이유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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